-메러디스 빅토리호, 기적의 사람들 10
1950년 12월 25일, 벌리 스미스는 평생 잊을 수 없었던 21살 생일날을 메러디스 빅토리호 위에서 맞고 있었다. 그나마 배가 곳곳에 도사린 포탄과 기뢰의 위험을 뚫고 거제도 가까이 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이 한 가지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정오 무렵이 되자 섬에 있는 교회들이 일제히 울리는 종소리가 배에까지 들려왔다. 드디어 이 섬은 이 정처 없는 피난민들을 받아줄 것인가?
잠시 후 하선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또 하나의 난관이 있었다. 거제도 앞바다는 수심이 얕아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선착장까지 접근할 수 없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배는 할 수 없이 거제도 장승포항 앞에 있는 작은 섬 지심도 앞에 정박했다. 장승포항 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올해 83살 주수권 씨도 그때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화물칸 안에 타고 있었다.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탔죠. 그냥 따뜻한 남쪽나라 간다. 그것만 알고 탔죠." -83세 승선 피난민 주수권
23일 밤 배에 올랐던 그들은 벌써 배 안 화물칸에서 사흘째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 배에서 내릴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한 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하선 방법에 관한 연락이 왔다. 전차상륙함인 LST가 메러디스 빅토리호까지 와서 피난민을 싣고 내륙항인 거제도 장승포항까지 수송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 대의 LST가 태울 수 있는 피난민들은 많지 안 않았다. 하선을 하는데만 해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방법이 결정되자 바로 하선이 시작됐다. 배에 가장 늦게 올라 갑판에 있던 피난민들부터 하선이 시작됐다. 갑판 위의 피난민들이 모두 내리자 드디어 화물칸의 피난민들이 하선을 할 차례, 그러나 벌리 스미스와 멜 스미스를 비롯해 모든 선원들은 화물칸을 여는 것이 두려웠다고 한다. 화물칸을 닫은 이후 사흘 동안 한 번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제도에 도착했을 때는 피난민들 사이에서 어떠한 문제도, 시끄러운 소리도 없고 조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랐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주갑판 위에 있는 사람들뿐이었기 때문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화물칸 안에서 죽었어도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3등 항해사 벌리 스미스
그러나 화물칸을 들어 올리는 순간, 그들의 염려는 기우라는 것이 밝혀졌다.
"화물칸을 열 때 밑으로 내려다보면서 반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일제히 위로 쳐다보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보였습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화물칸 한 칸을 비우고… 이제 다음 판자를 치우고 다시 밑의 화물칸을 열었습니다. 더 아랫칸 사람들 중에는 죽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죽어가고 있지 않을까, 염려하며 문을 열었는데... 그런데 일제히 위로 쳐다보는 피난민들의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온전히 살아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화물칸에서도,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나는 그들이 어떻게 마실 물도 하나 없이 살아난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3등 기관사 멜 스미스
화물칸 사이 가로막을 덜어냈을 때 일제히 빛이 들어오는 위를 올려다보던 사람들의 얼굴, 누구도 죽지 않았고 모두가 살아있던 그 순간의 감동은 멜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사진으로 남았다.
더 놀라운 일은 갑판이 아니라 지하 화물칸에서 김치 2,3,4,5가 태어난 것이다. 14,000명의 피난민은 사흘 만에 14,0005명이 되어 있었다. 누구도 죽지 않고, 누구도 다치지 않고 그들이 배에서 내리던 모습은 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에게도 잊을 수 풍경이었다고 훗날 그는 고백했다.
" 그들은 선원들을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배에서 내렸어요.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고마워하는 마음이 그 자세에서 느껴졌어요" -로버트 러니
드디어 주수권 씨의 차례가 돼 배에서 내리던 순간을 주수권 씨도 기억한다.
"좀 더 작은 배로 옮겨 탔어요. 그런데 일단 날씨가 함흥과 엄청 달랐어요. 함흥은 칼을 에는 찬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휘날렸는데 거제는 바람이 따뜻한 거예요.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있었어요. 그게 기억에 남아요."
12시경 시작된 피난민들의 하선은 늦은 밤이 돼서야 끝이 났다. 혹시 배에 남은 사람들이 있지나 않은지 선원들은 배를 순찰했다.
" 피난민들이 내린 뒤 우리는 배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염려했던 것과 달리 어떠한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창구 밑에는 피난민들이 남기고 간 거대한 쓰레기 더미와 물건들, 그리고 오물들이 가득했습니다. 선실마다 오물들이 거의 2미터 정도는 쌓여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죠. -벌리 스미스
지독한 오물들을 보자 새삼 피난민들이 어떻게 이런 환경 속에서 사흘을 버틴 건지 새삼 놀라웠다고 한다. 배 전체에 냄새가 배인 것도 큰 문제였다. 배를 일본 사세보로 가져가 오물을 제거하고 청소를 하는 데만도 한 달 이상이 걸렸다.
" 우리 선원들도 밑으로 창구로 내려갔습니다. 항해사들도 삽을 들고 내려가서 (청소 업체) 사람들과 배설물을 삽으로 퍼냈습니다. 그리고 소방 호스를 가지고 각각의 창구를 소금물로 씻어냈죠. 그리고 일본인들이 준 레몬 파우더 포대를 창구에 뿌려서 냄새를 없애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지독한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죠."
한 달 동안 배 청소를 했지만 냄새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결국 배는 화물선인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냄새가 너무 심해 다른 화물을 받지 못한 채 빈 배로 미국으로 향해야 했다.
" 바람이 뒤에서 불어오면 배가 많이 흔들립니다. 배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흔들렸어요. 매우 불편한 항해였습니다. 우리 배는 시애틀에 들어갔는데 시애틀에 있는 사람들이 악취 때문에 배가 도착하기 20마일(32km) 전부터 배가 들어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중에 만들어질 정도로 배의 악취는 정말 심했고 오래갔습니다. " -3등 항해사 벌리 스미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지만 14,000명을 살리기 위해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원들이 겪은 댓가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그들은 누구도 이 일을 생색내서 말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기적의 배'로 불리기 시작한 메러디스 빅토리호, 그 많은 수고를 스스로 감내한 본인들은 자신의 배가 '기적의 배'라고 불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벌리 스미스에게 질문을 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 나는 우리 배만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흥남 앞바다에는 피난민들을 실어 나른 크고 작은 배들이 많았습니다. 일본 배도 있었고 영국 배도 있었고 미국 배도 있었죠. 작은 어선들도 있었습니다. 메레디스 빅토리는 흔치 않은 숫자를 태웠기에 많은 주목을 받았을 뿐이죠. 그러나 메러디스 빅토리 호도 그 많은 기적의 배들 가운데 한 척일 뿐입니다. "
그 답변은 마음속에 잔잔한 감동을 알려주었다. 목숨이 오가는 전장의 바다에서 쉽지 않은 선택으로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했지만 자신의 공을 전혀 내세우지 않은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원들, 그들 모두는 어쩌면 이후 가톨릭 사제의 길을 걸어간 레너드 라루 선장을 닮아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