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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전 Dec 15. 2021

독일에 흐르는 압록강

-독일 교과서에 실린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새로 읽어야 할 책들도 쌓여있지만 한번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경우도 많다.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아 자세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나이에 따라, 환경에 따라, 이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을 새로 발견하는 재미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 압록강은 흐른다>가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펼쳐 든 책에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많은 울림들이 담겨 감동을 더했다. 


1946년 독일에서, 독일어로 발간된 책 <압록강은 흐른다 >, 이 책은 발간된 그 해 독일에서 '올해 독일어로 발간된 소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독일어로 이 책을 쓴 사람은 한국인 작가 '이미륵'이다. 한국 동물학 1호 박사 이미륵, 그는 어떻게 독일에 갔으며 어떻게 독일어로 < 압록강은 흐른다>를 쓰게 됐을까?  

이 책은 한 시대의 문이 닫히고 새 시대의 문이 열리던 혼란한 시기에 관한 아름답고 슬픈 기록이다.  1900년대 초 국권 상실의 위기에 처한 시기, 황해도 해주의 감찰인 이동빈의 아들 미륵이 자라나는 가정은 옛 시대의 권위와 품위가 살아 있던 한 선비의 가정이다. 서당에서 < 사략>과 < 맹자>와 < 중용>과 <통감>을 읽던 미륵은 옛 시대의 정서를 고스란히 간직한 마지막 세대였다.


"가을에는 무엇이 아름답지?"
"들판에서 재잘대는 시원한 바람, 나무에서 떨어지는 마른 나뭇잎, 고즈넉이 비추는 달.
"아주 잘했어. 겨울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지?"
"언덕과 산이 하얗게 덮이고, 오솔길에선 나그네조차 만날 수가 없네."
"너 정말 똑똑하구나!"
셋째 누이가 나를 칭찬했다.


겨우 여섯 살 남짓이던 미륵의 답변에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수백 가지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이야기꾼 셋째 누이는 종종 이런 칭찬을 하곤 했다. 미륵의 아버지 이동빈은 어린 아들에게 서예와 한자, 한시에 담긴 깊은 의미를 가르치길 좋아하던 선비였다. 그러나 그도 다가오는 시대의 변화를 감지한 뒤 한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미륵을 신식 학교에 보내게 된다. 그러나 신식학교에서 처음 배우는  화학과 물리, 수학은 미륵에게는 어렵기만 하다.

   

"학교가 온통 낯설기만 했어요.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될까 봐 한참을 걱정했어요. 제게 익숙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거든요"
아버지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슬펐니?"
" 그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옛 서당이며 우리 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아들을 신식학교에 보낸 아버지는 어느 날 괘종시계를 사 와서 마루에 놓는다. 아들을 신식학교에 시간에 맞춰 등교시키기 위해서였다. 매일 아침 옛시대의 질서와 정서가 온전히 살아있는 안락한 집을 나서 새로운 시대의 상징인 학교로 힘든 걸음을 옮기는 아이, 그러나 조화롭고 자연스러울 것 같던 시대의 교체는 어느 날 거리에 총칼을 메고 위협적인 군가를 부르는 일본군들이 등장하면서 깨어지고 만다. 남문 벽에는 임금의 국새가 날인된 포고문이 붙는다.


그것은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읽게 된 임금님의 편지였다. 그것은 오백여 년동안 우리를 지켜주었던 왕조의 작별 편지였던 까닭에 엄숙하면서도 슬픈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아주 많은 일본어를 배워야 했고 모든 과목의 교과서는 일본어로 대체되었다. 우리는 완전히 다르게 쓰인 역사를 배워야 했다. 자주 국가 조선 시대에 일어났던 사건은 모두 삭제되었다. 

한일합방으로 모든 것이 일본식으로 바뀌어가는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한 미륵은 잠시 학교를 그만두고 쉬게 된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미련은 남아 유럽으로 갈 꿈을 꾸던 미륵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그 어려운 경성 의학 전문학교에 합격을 한다. 황해도 해주를 떠나 처음 온 서울 거리는 모든 것이 낯설다. 곳곳에 유럽풍의 음악들이 흘러나왔고  쇼윈도는 유럽풍의 물건들과 일본식 물건들로 가득했다. 반면 갓이며 여자의 비단신 같은 옛 시대의 물건들은 거리에서 단 몇 푼에 팔리는 골동품 취급을 당했다. 급기야 일본인들은 성벽을 부수고 존엄한 건물을 허물고, 심지어 도자기를 찾아 무덤까지 파헤치는 만행을 서슴지 않는다. 


1919년 대학교 2학년이던 미륵은 친구들과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 단체에 가입하게 되고 선전문을 작성하는 부서에서 활동한다. 파고다 공원에서 열린 3.1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결국 일경에 쫓기는 몸이 돼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 어머니는 더 멀리 몸을 피할 것을 권한다. 마침내 닥친 이별의 시간 동구 밖까지 따라 나온 어머니가 미륵에게 말한다.

"여러 번 겁을 내기는 했어도 너는 늘 네 자신의 길에 충실했단다. 난 널 믿는다. 용기를 내거라!...세월은 아주 빨리 지나간단다. 혹시 우리가 다시 못 만나게 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넌 내 생애에 너무도 많은 기쁨을 주었단다. 자, 내 아들, 이젠 너 혼자 가렴. 멈추지 말고!"


미륵은 상해를 거쳐 배를 타고 독일에 닿는다. 독일에서 집으로 보낸 안부 편지에 대한 답장이 5개월 만에 도착했다. 큰 누이가 보낸 답장에는 어머니가 며칠 동안 앓으시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담겨있었다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이미륵

옛 시대의 마지막 적자인 '미륵'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시대의 회오리 속에서 고향을 떠나 낯선 세계에 홀로 서 가는 과정을 그린 < 압록강은 흐른다 >는 지극히 한국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이 발간되자 독일에서는 작품에 대한 찬사가 쏟아진다. 무엇이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독일인들의 마음을 그렇게 움직인 것일까?


이 작품은 두 차례의 전쟁으로 상처 받은 독일인들에게 어린 시절의 순수한 영혼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폐허가 되어버린 그들 고향의 평화로웠던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하며 깊은 감동을 안겨 주었다. 미륵은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와 삶의 원리를 모두 어린 시절, 고향 집에서 배운다. 아버지가 가르치는 바둑에는 미륵이 평생 견지해야 할 삶의 태도가 담겨 있다. 


"상대방이 바둑돌을 놓거든, 그 울림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라. 네가 돌을 놓는 경우에는 절대 경솔해서는 안된다!"  


이 책에는 거칠고 험난한 시대를 지나면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세계의 원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원형의 아름다움이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작품은 6살 미륵이 성장해 21살이 되던 해 독일의 한 도시에 도착하는 걸로 끝이 나지만 이미륵의 삶은 계속된다. 의학에서 동물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뮌헨 대학에서 우리나라 1호 동물학 박사가 된 이미륵은 이후 어렵게 전공한 동물학도의 길을 가지 않고 작가의 길로 간다. 중단편 소설을 집필하다 처음 쓴 자전적 장편소설이 < 압록강은 흐른다>이다. 전후 독일인들의 마음을 울리며 가장 아름다운 독일어로 인정받은 이 작품은 독일 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리게 된다. 독일어로 써진 책은 훗날 독일로 유학을 간 전혜린이 1959년 번역해 국내에 소개하면서 비로소 우리나라에 알려진다.


고향에서 산 기간은 겨우 20년, 한국인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독일에 유학생 1호로 정착을 해 그 후 30여 년을 독일에서 살다 독일에 묻힌 이미륵, 고향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을 타국에 살면서도 한국적인 정서와 고유한 사상을 오롯이 유지하고 살았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미륵이야말로 몸은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정착하면서도 영혼만은 온전히 한국인으로 산 진정한 '디아스포라'가 아니었을까? 이미륵에게 한시와 서예를 배웠던 독일인들은 그를  '동양에서 온 현인'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뮌헨 공동묘지에 있는 이미륵의 묘

어머니의 마지막 말처럼 '여러 번 겁을 내긴 했으나 용기 있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간' 이미륵,  그의 아름답고 슬프면서도 용기 있는 성장사를 다룬 < 압록강은 흐른다>를 '내 마음속 서재' 한 켠에 꽂았다. 세대를 막론하고 좋은 책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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