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전 Jan 31. 2020

푸른 눈의 신부가 거지 작가 사진집을 낸 이유

-경북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을 다녀와서 1

왜관 IC에서 내려 5분쯤 달렸을까? 왕복 6차선 대로변을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성 베네딕토 수도원> 안내판과 함께 붉은 벽돌의 긴 담장이 나타났다. 수도원이라 당연히 도심과는 동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으려니 했던 예상과는 달리 자동차들이 내달리는 도심 한복판에서 만나는 수도원의 담장은 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정문을 통과해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려서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바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내가 기대하고 왔던 바로 그 풍경이었다.     


담벼락 너머 자동차 소음 가득한 세상과는 다른 공간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도 원안은 새들의 지저귐으로 충만했다. 마치 조명등이라도 매단 듯 빨간 까치밥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감나무 주변으로 손바닥 크기 만한 작은 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따뜻한 풍경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경북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 전경

마지막 잎새마저 떨구고 앙상한 줄기를 드러낸 나무들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우리는 대부분 나무의 화려한 잎과 열매만을 보고 그 나무를 평가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바로 저 올곧은 나무의 줄기와 뿌리가 아닐는지, 줄기와 뿌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다음 해 봄을 기약할 수 없지 않은가. 일체의 장식을 버리고 검은색 줄기와 가지만으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검은 사제복을 입은 수도사를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묵화 같은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붉은 벽돌 성당은 묘한 대조를 이루며 한껏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냈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붉은 벽돌 성당은 1928년 세워진 왜관 최초의 성당이다.

1928년 세워진 왜관 최초의 성당

일제강점기 프랑스에서 온 선교사들이 붉은 벽돌을 쌓아 올려지었다는 성당은 왜관 지역에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유독 치열했던 한국 전쟁의 포연을 견디고 용케도 살아남았다. 현재 이 성당은 예배당으로 사용되지는 않고 역사적인 건축물로 보존돼 있다. 성당 왼쪽에 있는 작은 벽돌 건물 역시 1935년에 건축돼 왜관 최초의 유치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크고 작은 붉은 벽돌 건축물들이 어우러진 수도원 입구는 마치 중세 유럽의 어느 도시로 들어서는 느낌을 자아낸다. 


너무 많은 관계와 너무 많은 욕심 속에, 너무 많은 말들의 소용돌이 속에 한 해를 보냈다는 생각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지난 12월, 익숙한 것들로부터 벗어나 거울을 보듯 스스로를 비춰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직접 와 보니 그럴 때 찾아오기에 <성 베네딕토 수도원>은 더없이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 베네딕토 수도원 <피정의 집>은 가톨릭 교도가 아닌 사람도 누구나 신청해서 들어올 수 있다. ‘벗어나 고요한 곳에 머무른다’는 뜻의 피정(避靜)처럼 조용히 머물 곳을 찾아온 나는 성당 사무실을 찾아 2박 3일 동안 머물 <피정의 집> 열쇠를 받았다.    

성 베네딕도 수도원 피정의 집 입구

피정의 집 입구에 붙어있는 < 침묵 >이라는 종이가 반가웠다. 어차피 혼자 왔으니 말을 나눌 상대가 없기도 했지만 꼭 필요한 몇 마디 외에는 되도록 말을 안 할 수 있는 조용한 곳으로 오고 싶었던 참이다. 방은 겨우 책 한 권 펼칠 정도의 작은 나무 책상과 딱딱한 의자, 작은 침대가 전부였다. 그 소박하고 단출함이 맘에 들었다. 일단 방 배정만 받고 나면 수도원에서는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는다. 아침 미사를 비롯해 하루 종일 열리는 몇 차례 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미사가 열리는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 본당

조용히 방에 머물며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식사시간만 맞춰 식당으로 가면 세끼 식사가 제공된다. 그것도 수도원 수사들이 직접 농사지은 윤기 나고 밥맛 좋은 쌀에 신부님들이 직접 독일에 가서 배워 와 만든다는 독일식 소시지, 직접 기른 채소로 지은 간소하지만 풍성한 식사다.    


수도원의 하루는 종소리로 시작해 종소리로 끝이 난다. 새벽을 깨우는 5시 종소리는 빠르고 경쾌한 리듬, 끝기도 시간인 저녁 8시 종소리는 천천히, 마음을 다독이듯 낮게 울린다. 나는 가톨릭 교도는 아니지만, 아침, 저녁 미사를 꼬박꼬박 참석했다. 본당에는 독일에서 제작된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돼 있다.

성당 내부 파이프 오르간

파이프 숫자가 2747개, 긴 파이프의 길이가 5미터에 달해 성당 벽 한 면을 다 채우고 있는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은 그 깊은 울림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하다. 낮고 천천히 울리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맞춰 수 십 명의 수사들이 부르는 미사곡은 천상의 소리 같은 신비감을 자아낸다.     


성 베네딕토 수도회의 모토는 < 기도하고 일하라 > 때문에 베네딕토회 소속 신부들은 전 세계 어디에 있든 몸을 움직여 직접 일을 하고 그 수입으로 독자적으로 수도원을 운영한다. 왜관 수도원에는 70여 명의 신부들이 거주하며 수도생활을 하는데, 목공소를 비롯해 금속 공예실, 양초 공예실, 가구 제작소까지 다양한 작업장이 있다. 사실 ‘기도하고 일하라’ 이 두 가지 삶의 자세만 제대로 갖춘다면 누구나 가장 인간답게, 잘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감당할 수 있는 일들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감당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겸손히 기도하는 것 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런 의미에서 전 세계 곳곳에 있는 성 베네딕토 수도원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 기도하고 일하라 >는 모토는 들을 때마다 가슴 깊이 와 닿는다. 그렇게 분류하자면 내게 수도원의 2박 3일은 ‘기도하는 시간’인 셈, 일은 세상 속에서 해도 되는 것이니 되도록 하지 않기로 했다. 수도원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고, 가끔 책을 읽었으며 틈 날 때마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수도원 길을 혼자 산책했다. 물기 하나 없이 마른 낙엽이 발밑에서 바스락바스락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산책하는 것은 실로 참 오랜만이었다.


간혹 필요한 게 있어 수도원 정문을 나서 도심 편의점을 갔다가 다시 수도원으로 들어올 때면 특히 기분이 좋았다. 마치 내 집을 들어가기라도 하듯, 태연하게, 자연스럽게 수도원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 마치 내가 수도자라도 된 듯 한 기분이었다.    


70여 명의 수사들이 생활하는 수도원은 꽤 넓었다. 성당 뒤쪽으로는 소나무 숲이며 농사짓는 밭들이 있어 시골길을 산책하듯 걸을 수 있었다. 신부님들이 작업하는 작업장들은 대부분 문이 닫혀 함부로 들어가기가 머뭇거려졌는데, 분도출판사 팻말을 보자 꼭 들어가 보고 싶었다.

막상 들어서자 한쪽 방에서는 인쇄기가 분주히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신부님들이 바삐 오고 가는 모습은 보였지만 외지인들에게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손님맞이방이라는 팻말이 있어 들어갔더니 그동안 분도출판사가 펴낸 수백 권의 책들이 잘 정돈돼 꽂혀 있어 반가웠다. 내가 베네딕토회 왜관수도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바로 이 분도출판사 때문이다.     


사진계의 ‘렘브란트’, ‘빛의 사진작가’로 불리며 세계적인 사진작가의 명성을 얻었던 최민식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최민식 선생은 "분도출판사가 없었다면 사진작가 최민식은 아마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진작가 최민식의 사진

평생 < 인간 >을 테마로 사진을 찍은 최민식의 렌즈는 항상 당대의 가장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향해 있었다. 1967년 영국 사진연감에 사진이 실린 것을 비롯해 세계 20여 개국에  입상할 정도로 인정을 받았던 최민식, 그러나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새마을운동을 한창 벌이던 유신 정부에게 최민식은 ‘눈엣 가시’였다.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을 찍지 않으면 사진작가로서 모든 혜택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최민식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계속 가난한 이들을 찍는다. <거지 작가>라는 별칭까지 얻게 된 최민식은 주요 감시대상이 됐고 정부는 그의 활동 반경을 전부 막아버린다. 필름 살 돈은 물론이고 살림을 꾸릴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모든 활동은 다 막혀버린다.      


그런 최민식을 찾아와 계속 사진을 찍을 것을 권한 사람이 바로 왜관 성 베네딕토 수도원 분도출판사 소속 임세바스찬 신부였다. 당시 분도 출판사 사장이었던 독일인 임 세바스천 신부는 최민식에게 당시 월급쟁이들이 받던 한 달 월급 이상의 돈을 8여 년 동안이나 지원하면서 최민식이 사진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돕는다. 최민식은 미안한 마음에 열심히 사진을 찍고 그중에 좋은 사진들을 매달 들고 가 임 세바스천 신부에게 보여준다. 바로 그 사진들이 분도출판사에서 최민식의 인간 시리즈 사진집으로 나온다. 최민식이 생전에 펴낸 인간 시리즈 14집 가운데 유신시대에 나온 4,5,6,7,8집은 전부 분도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최민식 사진집 인간 4권

그중 4집과 5집은 출판되자마자 정부로부터 판금까지 당했지만 임 세바스천 신부는 굽히지 않았다. 4집이 출판됐을 때 분도출판사로 걸려온 전화를 임 세바스천 신부가 직접 받은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아, 여기 중앙 정보 분데... 이번에 나온 최민식 사진집 있죠?
그게 사진이 너무 어둡던데... 

한국말을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잘했고 유머감각이 뛰어났던 임 세바스천 신부는 그 말을 다 알아듣고도 외국인이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척 공손하게 말했다고 한다


아, 그렇지요. 좀 어둡게 나왔습니다. 
안 그래도 다시 인쇄를 할 참이었습니다.
    
최민식의 사진집을 펴낸 푸른 눈의 신부 임 세바스천

푸른 눈의 신부 임 세바스천의 남다른 안목과 두둑한 배짱이 없었다면 우리는 사진작가 최민식이 담아낸 리얼리티 사진의 걸작들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임 세바스찬 신부는 그 후 20여 년 간 분도출판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당대 최고의 문제적 신앙서적이었던 < 해방신학 >을 비롯해 400여 권의 책을 펴낸다.        


삭막한 사막 한가운데 숨겨진 오아시스처럼 흔하지는 않지만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배짱 좋게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도 이 삭막한 세상을 걸어갈 위로와 힘을 얻는다.    


지금은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성 베네딕토 수도원, 그러나 1909년 우리나라에 첫 발을 디딘 이래 굴곡 많은 우리나라 현대사와 함께 걸어온 베네딕토 수도회의 지난 100년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마치 지금 수도원 마당에 굳건하게 서서 겨울날 채비를 하고 있는 겨울나무들처럼 굳건한 믿음과 신념으로 모진 풍파와 시련을 참고 견딘 덕에 비로소 지금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베네딕토 수도회가 걸어온 지난 100년의 역사를 알게 되면, < 피정의 집 >에서 보내는 하룻밤의 평화와 안식이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