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모지즈 할머니, 평범한 삶의 행복을 그리다>를 읽고
딱히 어떤 책을 사야겠다 마음을 정하지 않고 잠깐 들른 서점, 진열대 사이를 오고 가다 내 시선을 사로잡는 책을 발견했다. 동화 같이 예쁜 책 표지가 눈길을 끌었다.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언덕배기에 자리한 시골 마을, 마을 중앙에 있는 공터에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 말을 몰며 이제 막 도착한 사람도 보이고 기다란 마차에 여러 사람을 태우고 도착한 말도 있다. 수십 개의 알록달록한 풍선을 쥐고 걸어가는 사람 뒤 울타리 안에서는 아이들이 공터 안 풍경이 궁금한 듯 내다보고 있다. 즐거운 마을 축제라도 벌어지는 듯 여러 사람들이 모여 약간은 들뜨고 소란스럽지만 즐거운 풍경, 보는 것만으로도 따스하고 정겨운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단순하면서도 소박하게 그려진 그림이라 언뜻 보면 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누구일까?
책을 펼치자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반전 스토리가 펼쳐진다. 나의 예상과 달리 이 그림은 그린 사람은 어린이가 아닌 90세 할머니, 더 놀라운 것은 평생 농부였던 이 할머니는 75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1세까지 계속 그림을 그렸단다.
집이 가난해 12살부터 가정부로 일해야 했던 ‘시시’라는 소녀, 해가 떠 오르기 시작하는 이른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 종일 일을 하는 고단한 생활을 반복하던 시골 소녀 '시시'는 27살이 되자 같은 농장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시집을 간다. 농부의 아내로서의 삶도 만만치 않았다. 농사만으로는 생계를 잇기 어렵자 소를 키우면서 버터를 만들어 팔았다. 버터 만들기를 능숙하게 잘해 한때 그녀 별명은 '버터 만들기 챔피언'이기도 했다. 토마토 통조림도 과일잼도 뭐든 잘 만들었던 모지스, 농사를 짓지 않는 겨울 동안은 단풍나무에서 수액을 받아 밤낮으로 졸여서 단풍나무 시럽을 만들었다. 부지런하고 열정적이었던 농부 모지스, 10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중 다섯 아이를 잃는 아픔을 겪고 남은 아이들을 키워 내는 동안 '소녀' 시시는 '할머니'가 되었다.
더 이상 몸을 움직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나이가 된 75세의 모지스 할머니, 할머니는 우연히 손자의 방에서 그림물감을 발견하곤 어린 시절 '소녀' 시시의 꿈을 떠올린다. 그림을 좋아했지만 물감이 살 돈이 없어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가난한 소녀 시시의 꿈은 화가였다. 할머니는 어린 시절 꿈을 떠올리며 손자의 그림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림을 배워본 적도 없이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은 할머니의 마음에는 꽤 그럴싸해 보였다. 할머니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엽서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마을 약국에서는 할머니의 그림을 곧잘 약국에 붙여 놓았는데, 어느 날 미국의 유명한 미술 수집가 루이스 칼더가 우연히 이 시골 약국에 들러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을 발견하면서 그녀의 그림은 처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든 살이 되어서 드디어 할머니의 첫 전시회가 열리는데, 화가의 이름조차 내세울 수 없어 < 어느 농부의 아내가 그린 그림들 >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가 열린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후 모지스 할머니는 돌아가시는 101세까지 무려 16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더구나 그녀가 그린 그림 중 무려 250점은 100세 이후에 그린 그림이다.
“저는 과일과 잼으로는 상을 받았지만 그림으로는 상을 못 받았어요 ”
그림으로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의 그림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녀의 100번째 생일을 기려 뉴욕시는 '모지스의 날'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한 참 뒤인 2006년에는 단풍나무 수액을 받아 시럽을 만드는 과정을 그린 그의 그림 “슈거링 오프”가 120만 달러 (한화 14억 원)에 팔린다.
할머니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할머니에게 좀 더 일찍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겠느냐고 자주 물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 사람들은 늘 내게 늦었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사실 지금이야말로 가장 고마워해야 할 시간이에요, 진정으로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에겐 바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때입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딱 좋은 때이죠 ”
삶의 이력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그녀의 그림은 나같이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도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작가를 만나게 해 준 이 책의 저자에게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를 아트 메신저라고 말하는 이 책의 저자 이소영 씨는 20대 때 우연히 대학도서관에서 모지스 할머니의 책 한 권을 발견하면서 그녀의 그림에 매료돼 컴퓨터에 폴더를 따로 만들고 모지스 할머니에 관한 모든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지리산 언저리에서 자랐다는 저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 풍경과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을 엮어 마치 ‘ 그림 읽어주는 여자’처럼 세세하게 설명을 곁들이고 있어 책을 읽은 재미가 더하다.
주로 마을 풍경과 마을 사람들의 일상, 가사노동을 그림의 소재로 삼아 그려낸 모지스 할머니, 책 속에 삽입된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을수록 놀라운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렇게 세세하게 모든 것을 관찰하고 기억해 냈을까?
일흔다섯에 그림을 시작해 여든이 되고 아흔이 되고 백 살이 됐을 때는 눈도 침침하고, 기억도 흐릿해지고 팔에 붓을 들 힘도 없었을 텐데... 어쩌면 이렇게 세세한 생활의 풍경들을 그려냈을까?
"시간이 나면 창밖의 풍경을 관찰합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 때면 눈을 감고 추억들을 떠올리죠”
아마 세월에 흐려지지 않는 ‘마음의 눈’에 의지해 그림을 그린 덕분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들 백세시대를 외치며 남은 인생 시간표를 어떻게 짜야할지 걱정하는 요즘, 모지스 할머니의 책은 인생의 시간표를 한결 여유 있게 그려보게 하면서 아직 우리에게 무언인가를 시도할 날이 많이 남았음을 토닥여주는 책이다.
"이제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나의 경우에 일흔 살이 넘어 선택한 새로운 삶이 그 후 30년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줬습니다"
모지스 할머니는 100번째 생일을 보내고 난 이듬해, 남아있는 자신의 작품들이 팔리면 그 돈을 농촌 기술 지원금과 가난한 이웃들, 불치병과 싸우는 환자들을 위해 써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101세에 그린 할머니의 마지막 그림 제목이 < 무지개 > 어쩌면 이때쯤 할머니는 이미 무지개 너머 다음 세상을 받아들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 그림 역시 여전히 유쾌하고 따뜻하고 정겨워서 더 좋다. 그래서 그녀가 남긴 인생 총평이 마음에 더 와 닿는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마치 좋은 하루였던 것 같아요, 이제 끝나고 나는 내 삶에 만족합니다. 저는 누구보다 행복했고 만족스러웠습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나는 삶의 역경을 만날 때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요, 삶은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에요,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역경이 없어서가 아니라 역경의 순간마다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 없는 삶이었다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모지스 할머니가 얼마나 부러운지, 역경 없는 인생은 없다는 것을 아는, 인생 좀 살아본 사람들은 공감하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유쾌한 마지막 인사를 남길 수 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은 , 만만찮은 꿈을 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