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전 Jan 29. 2020

졸작을 쓸 당당한 권리에 대하여

살아온 이력도, 경력도, 나이도 제각각인 학우들과 작년 하반기 4개월 여 동안 글쓰기 수업을 했다. 책을 가까이서 접하고 관심이 많긴 해도 ‘글쓰기’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학우들이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글쓰기’와 친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즐거웠다. 그들과의 즐거운 동행은 소박한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학우들과 함께 펴낸 책 < 다시 날다>

나는 ‘글쓰기’ 첫 수업시간에 항상 ‘졸작을 쓸 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 근사한 작품을 쓰려는 욕심을 버리고 ‘졸작’이라도 써 보겠다는 마음으로 일단 첫 문장을 쓰는 게 중요해요.”    

수업이 끝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 말이 글쓰기를 시작하는 그들에게 큰 힘이 됐다고 했다. 물론 이것은 나의 말은 아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볼품없는 쓰레기 같은 글을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하라
-나탈리 골드버그 <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전 세계에 글쓰기 붐을 일으킨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이다. 실제 글쓰기를 시작하려고 하면 필요한 것은 '명작'을 쓰겠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졸작’이라도 쓰겠다는 용기로 일단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명작도 아닌 졸작을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라는 질문도 있을 수 있다. 이 질문에 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글쓰기 책에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답한다. ‘글쓰기’는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능력까지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오고 그로 인해 <치유 글쓰기>는 아예 글쓰기의 한 장으로 자리 잡았다.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도 자신의 글쓰기는 오직 자신의 삶을 치유하기까지의 과정이었다고 고백했다.     

내 작품의 중심 주제는 내 가족이 장애아이와 함께 살아온 방식이었다.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성숙했다.
-오에 겐자부로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라는 명언도 있지만 대부분은 속도에 휩쓸려 살기 쉽다. 어디로 가는 지도 알 수 없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걸음을 멈출 수도 없어 계속 걸어간다. 그런데 글쓰기를 하려고 작정하면 잠시 속도를 멈추어야 한다. 어느 순간 나를 스쳐갔으나 잃어버린 수많은 시간의 흔적들을 새겨 나만의 무늬를 만드는 일이 글쓰기다. 글쓰기의 가장 놀라운 능력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생각’을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형체도 없고 실체도 없는 것 같은 생각이 고심 끝에 탄생한 내 글 속에서는 꽤 구체적인 모습을 띄고 드러나 있다. 글은 영혼의 자화상이다.


물론 당장 영혼의 우물에서 맑고 깨끗한 물을 길어 올리는 것은 쉽지 않다. 처음에는 거의 말라버린 내면의 우물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런데 자꾸 들여다보고 우물을 찾아 두레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쉽지 않은 훈련을 계속하다 보면 가장 내밀한 친구를 얻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다.    


2차 대전의 광풍을 온몸으로 마주했던 13살 어린 소녀 안네 프랑크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숨어 있던 지하실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좋은 친구를 만난다. 바로 13살 생일에 받은 일기장, 안네는 아예 일기장에 ‘키티’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털어놓는다. 안네가 일기장을 친구로 선택한 이유는 이것이었다.     


종이는 인간보다 잘 참고 견딘다.
-안네 프랑크 < 안네의 일기 > 중

    

살아가다 보면 부딪히는 수많은 억울한 순간, 스스로 비겁해지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는 고통의 순간들, 차마 친한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상황들에 ‘인간보다 잘 참고 견디는’ 종이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털어놓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 정리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비단 안네뿐 아니라 지금은 대작가가 된 많은 이들도 힘겨운 삶의 시간들을 글쓰기의 힘으로 견뎠다고 고백하는데, 한걸음 더 나아가면 글쓰기는 ‘삶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자신이 겪은 많은 삶의 경험들을 소설로 썼던 박완서는 이런 고백을 하기도 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도 지킬 수 없는 궁지에 몰렸을 때도 거기서 구원이 됐던 건 내가 언젠가는 저런 인간을 소설로 한번 써야지 하는 학교 다닐 때의 단순한 문학 애호가로서의 그것과는 다른 어떤 생각이었어요. 불행의 밑바닥에서도 그것이 불행감을 조금 덜어주고 뼛속까지 불행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박완서    


살다 보면 수없이 맞닥뜨리는 '총알'을 장전하고 싶은 순간들, 그런 순간들조차 시간이 지나가면 잊히고 말지만 글쓰기 서랍에 차곡차곡 쟁여둔 사람에게 '총알'은 때론 무기가 되기도 한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순간에도 ‘글쓰기’를 무기로 생각했던 박완서는 결국 작가가 되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순간,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은 순간에도 종이와 펜만 있으면 글을 쓸 수 있다.     


글쓰기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며 삶을 구원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고 지옥으로부터 벗어나는 매우 견고한 사다리로서의 역할을 오랫동안 해 왔다.      
- 앨리스 워커 < 컬러 퍼플 > 작가     


새해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더 이상 흉이 되지 않고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요즘, 어떤 일도 ‘작심삼일’ 하지 않고 꾸준히 계속하기는 쉽지 않다. 올해의 결심은 ‘졸작을 쓸 권리’에 기대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 도착할 그곳이 < 명작 > 일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 중요한 것은 꾸준히, 멈추지 않고 그곳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왼손도, 학맥도, 인맥도 없이 모든 것을 이룬 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