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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세경 Jun 06. 2020

숨길 수 없는 존재의 외로움

고독이 체질

'외로움과 가난은 숨길 수 없다'


학교 수업에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수업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교수님 죄송합니다), 교수님이 하셨던 저 한마디는 혀지지 않는다.


당시의 나, 그러니까 20대 초반의 나는, 삶의 어두운 측면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예민함 속에는 외로움과 가난에 대한 감상이 있었고, 그래서인지 10년이 지나서도 저 말씀을 잊지 못하고 있다. 핵심을 관통한달까, 12글자에 인생을 담아낸 것 같은, 그런 마디였다.


단어들을 몸으로 배우곤 . 사랑도 절망 외로움도, 험하고 나서야 그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으로 사랑을 배고, 무기력증을 앓서야 절망을 배웠다.


원래 그런 감정들은 겪고 나서야 알게 되는 건지, 아니면  이해가 느려서 그런 건지,   종류의 감정들을 어만 배운다고 이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랑이 사랑이었다는 걸, 절망이 절망이었다는 걸, 으로 느끼고 나서야 알 되는 것이었다.




"어디를... 더 자르라는 거죠?"


고등학교 입학 전 겨울 방학, 그러니까 중학교 3학년 2학기를 마친 겨울이었다. 2주 연속으로 미용실에 갔다. 1주일 만에 다시 온 나를, 디자이너 의아해했다. 스타일을 바꾸거나  머리 밀어달라고 했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6일 만에 다시 찾, '다듬어 주세요'라는 한마디건넸다. 다듬을 게 없는데 뭐를 다듬으라는 건지, 선생님은 황당해했고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미용실 다시  이유는 기분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 배경 화면을 그냥 검정, 까만 색종이 같은 화면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게 뭔가 기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왠지 별론데 정체를 모르겠는 느낌. 그래도 머리를 다듬으면 새 신발을 신은 이랄까, 분이 환기된다는 걸 알있었고, 그래서 미용실에 다시 찾아간 것이다. 


그렇게 몇 주를 보내다가 우연히 들른 타로 카드 집에서, 파마머리를 한 주인장은 내 카드를 살피고, '동생이 많이 외롭네요'라고 했다. 같이 간 누나에게 동생이 많이 쓸쓸하다고, 내가 외롭다고 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몇 주동안 내려앉았던 기분, 핸드폰 배경을 검정 화면으로 바꾸고 싶고, 머리를 르고도 다시 한번 자르고 싶었던 기분, 그건 바로 외로움이었다. 그렇게 그날 외로움을 배웠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돈을 잘 벌어도 외롭고, 돈을 못 벌어도 외롭다. 나이가 많아도 외롭고, 나이가 어려도 외롭다. 직위가 높아도 낮아도, 특별한 삶이 아니든,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다. 나는 이 좋아 부모님이 두 분 다 건강하신, 평범한 가정에서 자 수 있었고 특별히 모가 난 성격도 아니었다. 그랬던 내가, (배부른 소리지만) 16살 밖에 안된 나이 외로움으로 림쳤던 이유는 '입시' 공부 때문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외고 입시 준비했다. 당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혼자 밥을 먹고, 혼자공부했다. 쉴 때도 혼자였는데, 친구들이 재잘대는 학교에서는 엎드려 잠만 잤다. 그런 매일의 반복이었고, 느새 혼자가 편한, 반대로는 사람들과의 시간이 불사람이 되. 지금 6개월이 별로 길지  시간이지만, 사춘기 나이였던 그때의 반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혼자서만 보낸 반년, 그 시간은 십육 세 소년의 체질을 외로움으로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느새 말 수가 적어졌고, 대화가 불편해졌다.


관계가 두려운 사람은 (별 이유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본인을 좋아해 줄 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는 것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군가와시간을 불편해했다. 이 없는 나를 친구들도 어색해했다. 그리고 그 또래의 남학생들이 흔히 그러듯, 친구들 나를 어색한 사람이라고 놀리기 시작했다. 놀림이 놀림으로 끝나면 좋았겠지만 어색한 사람이라는 은 나를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나는 어색한(재미없는) 사람인가

사람들은 재미없는 사람을 싫어할까

렇다면, 사람들은 나를 싫어할까


관계가 어려워졌다. 말 수도 더 줄었다. 말하는 순간이 조심스러웠가끔은 두렵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매 순간이 그랬다. 스스로 만든 외로움의 체질은 견고해져 갔다. 견고한 외로움, 그 속에 점점 더 갇히게 된 것이다.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을 나누는 기준은 뭘까. 흔히는 에너지를 어디서 얻느냐를 이야기한다. 어디에서 힘을 충전하냐는 것인데, 내향적인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 외향적인 사람들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 힘이 생긴다것이다.


다른 이론도 있다. 몇 년 전에 심리학도인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인, 내향적인 사람은 내적으로 이미 충만한 사람이라 한. 사람이 느끼는 행복이 100이라면 그들은 이미 70의 행복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과의 시간에서 30의 행복만을 얻으면 된다. 그 이상은 필요 없는 것이다. 반면에 외향적인 사람들은 30의 행복만 가지고 있기에 나머지 70을 다른 이들과의 시간에서 얻어야 한다. 그래서 자꾸 사람들을 만나러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정답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외향성과 내향성은 사람의 성격과 성향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외향적인 사람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서은국 박사의 책, <행복의 기원>에는 아래와 같은 말이 나와 있다.

외향성이 행복 연구에서 그토록 주목받는 이유는, 한마디로 행복과 가장 손을 꼭 쥐고 있는 짝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연구된 그 어떤 다른 특성도 외향성만큼 행복과 관련 깊은 것이 없다. ... 외향성은 일종의 '사회성 위도'다. 이 값이 높을수록 사회적 관계의 양과 질이 높고, 바로 이 점이 행복에 절대적 기여를 한다.

- 서은국, <행복의 기원> 중에서 -


외향적인 사람이 사회적 관계의 양과 질이 높아 행복해질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심리학에 대해 잘 모르고, <행복의 기원>에 대해 비판하는 논조로 이야기하는 글도 읽어 보았지만, 주장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대체로 합당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외향적인 사람이 행복할 확률이 더 높다는데 동의하는 것이다. 외향적인 사람일수록, 사람들과 감정을 주고받는 시간이 많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외로울까.


사람은 하루를 보내며 수많은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걸 표현하고 싶어 한다. 맛있는 걸 먹으면 맛있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짜증난다고 말하고 싶다. 힘들게 일하 퇴근하는 길엔, '수고했다' 말 한마디가 필요한 게 사람이다. 고생했다는 걸 알아달라는 마음이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을 알아줄 사람은 없다. 엄마도 아빠도 안된다. 여자 친구도 와이프도 그럴 수 없다. 때로는 표현하 싶어도, '게 뭐지' 하며 이해되지 않는 감정들도 있다. 또는 '애증'처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이러니(역설)라고 할까, 그런 마음들도 있다. 인간이 외로운 이유는 거기에 있다. 느끼는 감정 대비 표현할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든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 마음을 일이 다 들어줄 귀인 세상에존재하지 않는다.


내향적인 사람들, 그러니까, 혼자가 편한 사람들은 그게 어렵다. 혼자 있는 방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으면 누군가와 소통할 확률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혼자인 게 좋은 게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는 게 불편하니까, 그냥 혼자 있는 게 편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외로움이 체질이었던 나처럼, 누군가와의 시간이 어색하니까,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한다는 말이다.


내향적인 사람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외향성을 예찬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외향적인 사람이든 내향적인 사람이든, 일상의 감정을 알아주는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공감을 주고받는, 마음 깊은 소통이 우리에게는 늘, 언제나 필요하다.


아무리 외향적이어도 겉핥기 식 관계만 하는 사람이라면, 많은 만남 속에서도 외로울 수 있다. 일주일의 대부분을 혼자 보내는 게 편한 사람도, 진실로 마음을 주고받을 소수의 지인만 있다면 외향적인 사람보다 외롭지 않을 수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외로움을 덜어주는 진실된 소통, 그 소통을 주고받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행복하기 위해선 반드시 이야기를 나눠 가며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로움이 체질이 되고, 숨길 수 없는 외로움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가져오는데, 그중 하나가 꼰대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왜 꼰대가 되냐고?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정을 공감받지 못하면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충족이 안되고, 그게 반복되다 보면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① 자기 말만 하는 사람

② 힘(돈, 권력)으로 사람을 곁에 두려는 사람


이 될 수 있다. 소통으로 존재를 이해받지 못하니까, 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 힘으로 존재를 인정받으려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라도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이다.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결과이기도 하고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들 우리에게 꼰대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외로움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사춘기 때 체질이 된 나의 외로움은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되어 내 자존감을 바닥 치게 했다. 나에 대한 미움은 사람들을 미워하는 방향으로 드러났는데, 다행히 이런저런 노력을 통해 그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왜 내 주변에는 밉상밖에 없는 거죠). 하지만 그때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나 분명 마음 한 곳이 베베 꼬인 꼰대, 아니면 꼰대 꿈나무가 되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향적이든 외향적이든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진심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 하며 살아야 한다. 인맥을 넓히라는 말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도 아니다. 인생함께할 수 있는 몇 명의 동반자가 필요하다는 이다. 그게 가족이면 가장 좋고, 친구여 정말 좋다.


먹고사는 게 바쁜 걸 나도 이해는 한다. 시험에도 합격해야 하고, 꿈 자기 계발을 위해 일분일초가 아까운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공부가 바쁘고 아무리 꿈이 절실해도, 외로움이 체질이 되지 않을 최저한의 소통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행복하기 위해 공부하고, 행복하기 위해 꿈을 꾸는 게 아닌가? 바쁜 일상 속에서도 체질이 되는 고독은 막아야 한다. 숨길 수 없는 외로움이 고독한 불행의 늪으로 우리를 끌어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더 잘살기 위한 우리들의 노력, 그 성과를 두 팔 벌려 축하해줄 누군가와 함께 인생, 마음 깊은 소통을 통 조금은 덜 외롭고 조금은 더 행복한 , 그런 인생이 되길 기원해본다.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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