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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세경 Jun 20. 2020

새우 껍질 잘 까야만 밥 잘 먹나요

집밥이 그리운 세 가지 이유

'집밥은 언제나 그립다'


혼자 살다 보니 집밥이 그립다는 말, 엄마 밥이 그립다는 말 이해게 되었다. 회에서 1인분에 몇만  하는 소고기를 도, 구들과 주도 맛집 찾아다녀도, 지 모르게 채울 수 없는 허기가 있다. 깥 음식으로는 지지 않는 묘한 , 집밥이 그리운 이유는 거기서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들~ 뭐 먹고 싶어?"


부모님과 떨어져 산지 6년이 되었다. 스물여섯에 입대, 스물여덟에 전역, 스물아홉에 혼자 살기 시작해 어느새 서른한 살이 되었다. 전역하고  부모님과 살기도 했지만, 취직하고 얼마   나는 자취를 시작했다. 그런 내가 본가에 갈 기회가 있으면, 엄마는 칠 전부터 '먹고 싶은 게 있냐' 물어보신다. 그럴 때마다 대답은 한결같다.


"새우탕이요"

"새우탕 해주세요"

"새우탕 ㅎㅎ"

"삼겹살..... 아니 새우탕이요"


조금 과장하면 매번, 현실적으로 말하면 십중팔구, 새우탕이 먹싶다고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 한식, 본가에 갈 때마다 노래를 부르는 음식, 그건 바로 대하를 넣고 끓엄마의 새우탕(대하탕)이다.




'뜨거워 조심해~' 하며 엄마 펄펄 끓 냄비를 식탁에 가져오신다. 나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냄비를 바라본다. 새우탕의 묘미는 냄비를 여는데부터 시작는데, 팔팔 끓인 냄비 뚜껑을 열면 새하얀 김이 천장에 닿을 듯 올라다. 그 아래 보이는 새우는  실해 껍질이 터질 것 같다. 마디마 빨고춧가루끼어 있고, 썰려 있는 청양 고추는 얼큰한 국물 맛을 기대하게 한다. 주의할 게 있다면 각자의 앞접시 담아낼 때, 싱싱 바지락 골고루 분배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물 한 숟갈을 입에  ' 뜨뜨!' 하지만, 뜨거움도 잠시, 새우와 바지락의 바다향이 코끝 퍼지고 고추의 알싸함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아 뜨뜨!...... 크하~'


뭐니 뭐니 해도 주인공은 새우다. 새우는 아무리 뜨거워도 손으로 집어야 한다. 머리를 때 꼬리를 집어 대로 입에 넣는다. 데기를  발라 먹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기지 않고 먹는 게 취향이다. 한입 씹으면  껍 사이 국물이 쪽 하고 , 껍데기의 바삭한 고소우살의 감과 어우러진다. 바지락 살 담긴 국물에 밥을 말아먹으면, 서울에서 공주까지 200km를 달려온 피로가 라진다. 이래서 내가 새우탕 새우탕 하나보다.




'식시오관(食時五觀)'이란 19세기 초 양반가 안주인인 빙허각 이 씨에 의해 쓰인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 식사할 때 가져야 할 다섯 가지 마음가짐을 일컫는 말이다. 그중 첫 번째는 음식이 만들어지기 까지의 공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힘들음, 공부(工夫)의 다소를 헤아리고, 저것이 어디서 왔는가 생각해보라. 갈고 심고 거두고 찧고 까불고 지져 공이 많이 든 음식이다. 하물며 산짐승을 잡아 살을 베어 내어 맛있게 하려니, 한 사람이 먹는 것은 열 사람이 애쓴 결과이다.

- <규합총서> -

식재료부터 음식이 만들어때까지의 정성 느껴야 한다는 말인데, 우리가 집밥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내가 집에 가기 전부터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다. 메뉴가 정해지면 두 손 무겁게 장을 내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요리 시작하신다. 도착하기 30분 전에는 밥도 새로 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요리, 가족만을 위한 , 그게 바로 엄마의 밥상고 나의 집밥이다. 에서 먹는 음식이 무리 맛있어도, 왠지 모르게 허한 느낌이 드는 건, '마의 성', 그것이 거기엔 없기 때문이다. 이게 가 집밥을 그리워하는 첫 번째 이유다.




생각해보면 내가 새우탕을 좋아하는 만치로 엄마에게도 새우탕은 중요한 음식인 것 같다. 무슨 말이냐면 엄마 요리의 필살기랄까(아니라면 죄송합니다), 엄마에게는 새우탕이 그런 음식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중요한 순간마다 엄마는 새우탕을 끓이시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 때,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신 적이 있다. 70이 넘은 연세에도 부여에서 서울까지 먼길을 운전셨고  가마니 쌀  지고 오셨다. 그날도 우리는 새우탕을 먹었다. 그날을 기억는 이유는 할아버지에게 처음으로 꾸지람을 들은 날이기 때문이다. 내 앞접시에만 새우를 가득 담자 할아버지는 '하나씩 먹어라'라고 하셨다. 지만 강한 억양이셨고, 그렇게 10년 인생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쓴소리를 들었다. 그 날, 먼길을 달려오신 시아버지를 위해 내놓 엄마의 필살 요리가 바로 새우탕다.


작년 추석에도 엄마는 새우탕을 끓이셨다. 외가 식구들이 모 날었는데, 새우탕을 먹다가 혼나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외삼촌이 둘째 셋째 딸에게 새우를 일일이 까주자 큰 이모가


'그러다 애들 버릇 나빠져'


라고 한마디 하셨다. 초등 고학년과 중학생이 된 딸들에게 새우를 하나하나 벗겨주는 삼촌이 못마땅하셨나 보다.


 삼촌네 세 자매의 큰 딸, 그러니까 새우를 받아먹기만 한 동생들의 맏언니였던 , 고등학교 1학년밖에 안된 그 아이는 새우를 까서 할머니 밥그릇에 올려 드리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는 새우를 까서 나에게 주고 계셨고, 나는 처가에서도 주방 나오지 않는 엄마를 위해 새우를 까고 있었다. 17살 소녀부터 88세 할머니까지, 새우를 서로가 서로에게 나누던  날, 동화 같기도 하고 드라마 같기도 했던 그 장면 나에게는 참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가족을 다른 말로 식구(食口)라고 한다. 같은 집에 살며 끼니를 함께 한다는 말이다. 집밥에는 가족과 함께 하는 온정이 있다. 서로에게 새우를 까주는 따뜻함이 있다. 새우를 쌓아놓는 나를 언짢아하셨던 할아버지의 마음도 '내가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명절날이면 삼강오륜을 지키며 살야 한다고, 나에게 한서(漢書)를 보여주시던 할아버지. 내가 '내 것만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 '새우 하나라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던 할아버지의 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모의 말마따나 오냐오냐 새우를 받아먹기만 하면 촌동생들의 버릇이 깐은 나빠질  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새우를 까주는 밥상 문화에서 자란 그 아이들이 삐뚤어진 어른로 커나갈 일은 별로 없지 않을까. 머니 새우를 까주던 맏언니처럼, 이제는 엄마 입에 새우를 넣어줄 수 있는 나처럼, 둘째와 막내도 시간이 흐르면 삼촌의 밥그릇에 한 마리 새우를 올려줄 수 있지 않을까. 집밥에는 가족이 있고 정이 있다. 그 따스이 함께한다. 이게 바로 집밥이 그리운 두 번째 이유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하기만 할 수는 없다. 매일의 일상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항상 따뜻하고, 늘 기만 할 수는 없 것이다. 갈등을 참으며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을 때도 있고, 터져버린 갈등으로 큰소리 내며 싸울 때도 있다. 때로는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쾅하고 문 닫으며 방 들어기도 한다.


가족이란, 그 모든 기억을 함께 눠온 우리의 울타리다. 쁘고 행복해도, 화가 나도, 우리는 매일의 끼니를 늘 함께 쌓아왔다.  등의 시간과 감정의 무게를 견뎌내고, 여전히 생일에는 케이크의 촛불을 불고, 설과 추석에는 서로의 안녕을 기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 마주하며 하하호호 웃을 수 있는 우리, 그게 바로 식구인 것이다.


살면서 점점 느끼는 건 나라는 사람, 나라는  개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 사는 게 아니라는 이다. 때로는 지치고 누구에게도 위로받 못 순간 있다. 그때 우리는


'인생은 혼자야'라고 한다.


하지만 내 안에는 명히 탁에 앉아 밝게 웃는 아빠가 . 화를 내는 아빠 슬퍼하는 아빠, 삶에 지친 아빠도 있다. 그걸 보며 같이 웃고,  우는 엄마도 있다. 그 모든 시간을 바라보는 나도 있다. 지고 볶아도 결국은 식탁에 모여 밥을 같이 먹는 우리. 나는 그렇게 커왔고 그 모든 감정이 어우러져 지금의 내가 되었다.


작년 겨울 떠난 제주도 여행, 아늑한 숙소 울 햇살, 좋아하는 친구들맛있었던 흑돼지, 더할 나위 없는 이었다. 행복에 겨워 숙소 소파에 누워는데 불현듯


'나만 너무 행복한 게 아닌가'


라며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노년을 앞둔 엄마 아빠, 그들의 행복은 무엇인지, 내가 이렇게 행복한 시간에 두 분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나 너무 좋은 곳에서 혼자서만 맛있는 걸 먹고 있지는 않은지 죄송했다. 바쁘다 핑계로 부모님께  안 하고 집에 가는 일도 뜸했던 . 런 나에 대한 자괴감 들었다. 하지만 죄송함과 자괴감 보다 크게 느낀 건 그리이었다. 모님 그리웠다. 들이 보고 싶었다. 엄마 아빠가, 리웠다.


식구는 각자일 수 없다. 서로의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며 살아왔다. 시간의 무견뎌낸 가족이라는 울타리, 마음속 깊은 곳 서로가 이어져있다는 , 아무리 맛있고 아무리 비싼 걸 먹어도, 식구이자 가족인 우리는 함께여야 완전할 수 있다. 집밥이 그리운 세 번째 이유는 기에 있다.


집밥은 그립다.

가족을 위한 정성기 때문이다.

집밥 따뜻다.

가족 함께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집밥은 우리 삶, 인생이다.

우리의 희로애락 켜켜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에게 '아들~ 뭐 먹고 싶어?'라고 물을 것이다. 그때마다 대답은 똑같지 않을까,


'엄마, 아빠, 누나랑 먹는 새우탕이요 ㅎㅎ'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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