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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세경 Mar 20. 2023

<더 글로리> 영광도 없지만 용서도 없는 이야기

드라마를 좋아하지만 자주 보지는 못한다. 영화와 달리 시작하면 10시간 이상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진행 중인 드라마를 매주 한 편씩 기다리는 건 싫고 완결 난 드라마를 하루 만에 정주행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워낙 좋아해서 일 년에 두세 편 정도는 꼬박 챙겨 보는데 올해는 그 시작이 넷플릭스의 <더 글로리>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봤고 결론부터 말하면 정말 재미있었다. 원래도 인기 드라마만 찾아보지만 이렇게 여운이 남는 드라마는 오랜만이다. 드라마를 다 보고도 유튜브나 인스타에 올라오는 관련 영상들을 자꾸 찾아본다. 니트에 붙은 민들레 씨앗처럼 <더 글로리>라는 세계가 마음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영상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드라마에 몰입한 건 나만이 아닌 것 같다. 현실이 아닌 걸 알아도 사람들은 드라마 인물들의 앞날을 궁금해하고 후속작은 없냐고 기대하는 사람도 많다. 넷플릭스에서 1위를 하고 있으니 세계적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더 글로리>가 재미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주연 조연할 것 없이 완벽했던 배우들의 연기, 장면 장면 등장하는 은유와 복선, 지루하지 않은 빠른 전개, 마약, 섹스, 살인, 폭력과 같은 자극적인 소재, 책이었다면 밑줄을 그었을 문학적인 대사 등, 많은 것이 좋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었던 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복수라는 서사이다. 드라마에서 피해자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범죄를 당했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 그들에게 양심을 바라는 건 겨울산 정상에서 모기를 찾는 것보다 어렵다. 피해자들의 연대와 가해자들의 대립에서 드라마는 결국 피해자들의 손을 들었다.


드라마를 보는 초반부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주인공이자 학교 폭력(이라고 부르기에도 어려운 무거운 범죄)을 당한 '문동은'을 응원하는 게 옳으냐는 것이다. 그녀를 응원하는 건 그녀의 복수를 지지하는 건데 과연 그게 그녀를 위한 일이냐는 것이다. 정말로 문동은을 위한다면 그녀를 말려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복수는 피해 입는 사람이 또 다른 가해자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해라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도 피해를 준다. 현실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복수는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해야 가능한 일이고 그렇게 행동이 된 원망은 또 다른 원망을 낳을 수 있다. '글로리'는 영광을 의미하지만 복수의 끝에는 영광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건 이성적인 생각이지 감정적으로는 문동은의 복수를 응원했다.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녀가 복수를 위해 하는 일들을 처음부터 응원했다. 혹시 그게 나쁜 일이라도 가해자들을 벌주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여겼다. 문동은은 '억울한' 피해자였다. 여기서의 핵심은 '억울한'인데 '억울하다'는 것은 '아무런 잘못이 없이 벌을 받아 분하다'라는 의미다. 문동은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단지 같은 학교의 동급생으로 가해자들을 만났을 뿐이다. 그런 이유 하나만으로 가해자들은 지속적인 폭행을 가했고 심지어는 뜨겁게 달군 고대기로 그녀의 피부를 지졌다. 성희롱을 하고 성폭행도 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월세방 원룸에 찾아가 동전을 살뜰히 모은 돼지저금통을 깨부수고 같잖은 돈이라며 멸시했다. 집에서도 폭행을 했고 또다시 고대기로 가학 행위를 했다. 가해자들이 문동은을 괴롭힌 이유는 단지 그녀가 약자였고 그런 괴롭힘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보며 복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억울한' 피해자들에게도 복수는 옳지 않은 일일까. 아무 잘못도 없이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힌 피해자도 복수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일까.  피해자는 정말로 가해자들에게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에 대해 말이다. 사실은 어렸을 때부터 종종, 혼자만의 상상이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나 혹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흉악한 범죄를 당하면 나는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상상이었다. 강도나 폭행, 아니면 보다 심한 일을 당하면 나는 그 가해자들을 단죄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생각이었다. 마음은 이미 정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싶다'라는 것이었다. 그걸 행동으로 옮길 수 있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지만 결국 그러고 싶냐 아니냐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였다. 받은 대로 되갚는 것. 아니 어쩌면 받은 것보다 더 갚는 것. 그게 내 마음이었다. 복수가 나쁘다는 건 교육으로 훈련된 이성의 판단이지 감정적으로는 받은 만큼 되갚고 당한 만큼 돌려주는 게 마땅한 결론이었다.


법으로는 개인이 개인에게 복수하는 걸 금지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피해를 입으면 경찰에 신고를 하고 법적 절차를 기다린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가해자들은 돈의 뒤에 숨거나 법의 뒤에 숨는다. 법이라는 것은 증거를 바탕으로 법리에 맞는 처벌을 내리는 것인데 돈이 많은 사람들은 변호사를 고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받아낸다. 그게 아니어도 법 자체의 한계가 존재하기도 한다. 법으로는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모두 해소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2014년에 발생한 윤일병 사망사건에서 구타와 가혹행위로 후임을 죽인 이찬희 병장은 국군교도소에 수감되서도 같은 방에 있는 재소자들을 또다시 괴롭혔고 윤일병을 입에 올리며 고인을 모욕하기도 했다. 그걸 알게 된 윤일병의 어머니는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지만 그 마음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고인이 된 윤일병의 억울함과 그 어머니의 절망을 법이 온전히 어루만질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걸 위해 노력하는 게 법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숙제겠지만 근본적으로 그런 억울함을 모두 풀어주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법치주의를 부정하고 싶은 건 아니다. 누군가의 억울함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걸 개인이 개인에게 되갚을 수 있는 사회는 지금보다 더 혼란스러운 사회일 것이다. 오히려 힘의 논리가 강해져 억울한 사람들이 더 많이 생길 수도 있다. 법이 모든 사람들의 억울함을 살피지는 못해도 다수의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는 최소한의 울타리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마저도 지키지 못하는 사건 사고가 세상에는 수 없이 많지만 그래도 최악보다는 나은, 차악인 제도가 법치주의라고 생각한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결국 우리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에서 복수를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걸 알고 있다.


문동은을 괴롭혔던 주범인 '박연진'은 이렇게 말한다.

"왜 없는 것들은 세상에 인과응보나 권선징악만 있다고 믿는 거지?"

문동은의 복수가 성공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이었다.


화가 나도 이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아서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가 될 수는 없다. 나쁜 짓을 하면서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은 그걸 알면서도 일말의 희망으로 인과응보의 힘과 권선징악의 결말을 믿는다. 아니, 믿고 싶어 한다. 그래야 억울한 마음이 조금은 나아지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그런 억울함을, 그런 답답함을,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작은 바람을 이해해 주는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복수의 끝에 영광은 없을지라도 도저히 가해자들이 용서가 안 되는 피해자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복수는 가해자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몰락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됐고 복수가 옳은 것이냐에 대한 의구심을 가진 시청자들도 결국은 문동은의 선택을 지지할 수 있었던 나이스한 마무리였다. 가해자였던 박연진은 인과응보의 힘으로 몰락했고 그녀의 추락을 통해 시청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살다 보면 때때로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그 크기가 작든 크든 사람들은 그렇게 얽혀 살아간다. 그래서 누구든지 크고 작은 억울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억울함의 그림자인 복수심도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 있고 입으로 말하긴 어려워도 그런 앙금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직장상사에게 분풀이를 당하는 회사원이나 손님의 갑질로 기분을 망치는 편의점 종사자, 승객의 폭언에 상처받는 버스 기사 등, 법이라는 제도와 사회생활이라는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풀기 어려운 여러 가지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더 글로리>는 그런 마음에 손길을 내미는 드라마였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밤을 새우며 봐버렸다는 것이다. 맑은 정신으로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너무 재미있어서 중간에 멈출 수가 없었다. 드라마가 끝났음에도 아직 '주여정'의 복수와 '강연천'의 파멸을 기대하고 있다. 문동은의 평안과 '하도영 부녀'의 행복을 응원하고 있다. 한동안은 이 드라마의 여운이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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