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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이름으로

by 추세경

21년 8월 31일에 발행했던 <여름의 이름으로>를 퇴고하여 재 발행하는 글입니다.



올해 여름은 많이 더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어컨을 켜고 살았는데 이제 입추가 지나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기운이 돈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밤공기, 적당하고 편안한, 그런 밤공기다. 창문을 열면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아파트 뒷산의 풀벌레들은 한 호흡에 서너 번씩 둥근 울림을 반복한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별빛 가득한 시골의 밤하늘을 떠오른다. 선선한 공기와 풀벌레 소리, 은은한 스탠드 불빛과 작게 들리는 재즈, 노트북 타자 소리, 글을 쓰는 나, 행복한 밤이다.


살면서 가장 더웠던 여름은 2013년의 여름이었다. 장교 후보생으로 하계 군사 훈련을 받았던 대학교 3학년의 여름이었다. 그 해 여름은 매일이 폭염이었지만 덥다는 이유로 훈련에 빠질 수는 없었다. 짧은 머리를 한번 더 바짝 자르고 훈련소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4주간의 훈련이 시작됐다.


훈련은 대부분이 야외 교육이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정이 있었고 아침이면 각 제대 별로 교과목에 맞는 훈련을 받았다. 교육 장소로 가려면 작은 산을 넘어야 했는데 럭비공을 세워둔 듯 경사가 가파른 곳이었다. 군장을 등에 매고는 서있기도 힘들었다. 걸을 때는 고개를 들기가 어려워 앞사람의 뒤꿈치만 바라보며 걸었다. 아침 햇볕에 방탄은 뜨거웠고 이마에는 금세 땀방울이 흘렀다. 한걸음 한걸음 힘들었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앞사람도 가고 뒷사람도 가는 데 혼자만 멈출 수는 없었다. 언덕의 끝에는 '내가 메고 있는 군장의 무게는 아버지의 어깨보다 가볍다'라는 문구가 커다란 글씨로 적혀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반복되는 교장이동, 그게 가장 힘들었다.


당시에는 매일 30도가 넘었다. 안전상의 이유로 일정 온도가 넘으면 훈련을 멈춰야 했다. 훈련이 중단되면 좋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이 아깝기도 했다. 남들은 방학이면 해외여행을 가거나 인턴을 하며 스펙을 쌓는데, 나는 충청도의 어느 산기슭에서 흙먼지를 먹으며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젊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탄알을 발사한 소총처럼 뜨거운 한 여름의 햇볕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건물이 만든 그늘에 앉아 그늘과 햇볕 사이의 경계를 바라봤다. 그 선명한 대조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방탄을 벗을 수도 없었고 소총을 놓을 수도 없었다. 흙바닥의 파란 잡초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여름을 맞은 매미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가장 더웠던 여름, 2013년의 여름이었다.


남들 다 하는 건데 뭐가 그렇게 힘들었냐,라고 묻는다면 그다지 할 말은 없다. 요즘의 군생활이야(벌써 10년 전이긴 하지만) 예전보다는 편하지 않냐, 훈련의 강도도 약하고 생활하는 여건도 좋지 않냐,라고 하면 별로 틀린 말은 아니다. 더 힘든 훈련을 받은 사람도 많고 더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한 분들도 많다. 육체적으로 힘든 게 정신적으로 힘든 것보다는 정직한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 정도는 참아야 하지 않냐고 말이다. 그런 생각들에 대해서 '아니야, 그건 절대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고통은 개별적이다. 내가 남의 아픔을 완전히 알 수 없듯이 누군가도 나의 고통을 쉽게 여겨서는 안 된다. 나보다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도 많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때가 꽤나 힘든 시간이었다. 세상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기억도 있는데, 그때가 나에게는 그런 순간이었다. 새벽마다 완전 군장을 메고 급경사의 언덕을 오르던 기억,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멍하니 앉아 시간을 죽이던 기억,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가 종종 생각난다.


장교였던 게 잘한 일일까. 장교가 되기 위해선 대학교 3,4 학년 동안 군사학 수업을 들어야 했고 12주의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는 28개월의 군생활을 해야 했다. 21개월(10년 전 기준)을 군대에서 보낸 남들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군생활에 투자한 것이다. 그렇게 투자한 시간이 현실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장교 출신이라 돈을 더 버는 것도 아니고 더 좋은 직업을 구한 것도 아니었다. 취업 시장에서의 우대도 옛날 얘기고 회사에서도 내가 장교였다는 것에 대해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그 시간에 전문직 시험을 공부했거나 구직에 유리한 스펙을 쌓았으면 지금보다 여건이 나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교였기 때문에 배울 수 있던 것들도 있다. 2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병사 삼십여 명을 통솔하고 그들을 조직의 목표에 맞게 이끌었던 경험. 나에게는 아부하지만 후임병은 괴롭히던 잔꾀 부리는 병사들을 식별하는 방법. 뭘 시켜도 잘하는 병사와 뭘 시켜도 못하는 병사에게 한정된 포상(휴가)을 분배하고 모두에게 불만이 없이 부대를 운영하는 노하우. 조직을 관리하는 나만의 기준과 나름의 철학에 대해 생각해 본 경험. 밑에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고 그걸 믿고 기다려 보는 연습. 그와는 반대로 시킨 일에 대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방법. 그런 것들을 배웠다. 삼십 대 중반이 된 지금도 회사에서는 한두 명의 후배와만 일을 하고 있고, 그걸 보면 장교로서의 경험은 정말 어디에서도 쉽게 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하루는 학군단 동기와 저녁을 먹은 적이 있다. 2살 동생인데 얼마 전에 자취방의 앞 건물에서 불이 났다고 했다. 지하에서 불이 났는데 그걸 알고 녀석은 소화기를 들고 골목까지 나왔다고 했다. 다행히 소방차가 와서 소화기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어떻게 그랬냐고 물었더니 녀석은 웃으면서 '장교였잖아'라고 했다. 진짜 그런 마음이었는지 아니면 대답을 위한 대답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무엇이든 그 모습이 멋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나도 장교였지'라는 자부심이 들었다. 잊고 있던 장교로서의 자부심이 그 순간에 샘솟았다.


사실 이거 하나는 분명하다. 장교가 되기 위해 겪었던 시간, 힘든 훈련을 참고 인내했던 그 시간은 내 안에 무언가를 남겼다는 것이다. 한 걸음도 떼기 어려웠던 언덕길을 오르고 내리쬐는 햇볕 아래 훈련을 받았던 사람이라는 것, 그런 시간들을 견뎌낸 사람이라는 것, 그런 시간들을 이겨낸 사람이라는 것, 그런 자부심이 나에게 있다. 너무 힘들어도 그냥 참고 견디다 보면 어느새 훈련은 끝나있었고 그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힘든 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나간다는 '실감'을 체득할 수 있었다. 요새도 힘든 일이 생기면 10년 전의 그때를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한다. 그때도 견뎠는데 이것도 못 견디겠어,라고 말이다.


살다 보면 눈부시게 빛나는 순간도 있고 어둠에 그늘져 시들어가는 시간도 있다. 의미와 무의미를 구분하기 어려운 시간도 있다. 2013년의 여름, 무더웠던 훈련장의 잡초들은 햇빛이 강할수록 더 푸르게 빛을 냈다. 가장 젊었던 20대의 시간, 그 뜨거운 햇볕 아래 나는 견디는 힘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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