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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집 풍경

by 추세경

22년 9월 4일에 발행했던 <이삿집 풍경>을 퇴고하여 재 발행하는 글입니다.



지금 집에서 4년을 살았다. 서울 주택도시공사에서 빌려주는 임대 아파트인데 9평 원룸이지만 베란다도 있어 혼자 살기에는 충분했다. 아침저녁으로는 천왕산의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곳이다. 아파트 앞에는 서울 최초의 수목원이라는 '푸른 수목원'이 있는 숲세권의 아파트다. 출퇴근이 한 시간씩 걸리긴 했지만 도심에서 떨어진 이곳의 정서가 좋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사를 가게 되었다. 결혼을 앞두고 신혼집을 구했기 때문이다.


사회에 나오니 내가 사는 동네로 나를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는 곳의 집값을 가지고 나의 인생을 재단하는 것이다. '압구정'이나 '잠실'에 산다고 했으면 눈을 동그랗게 떴을 그런 사람들은 내가 '구로'의 끝자락에 산다고 하면 이내 입을 닫는다. 중고등학교 때는 시험 성적이 인생의 서열이었고 대학생 때는 학교의 서열이 인생의 성적이었다. 근데 이제는 사는 곳의 집값이 인생의 성적이 되었다. 따질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은 피곤한 세상이다.


하지만 그런 시선은 감기처럼 옮는다. 그런 시선을 몇 번 느끼다 보니 언제가부터는 나 또한 누군가를 그런 식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만 한번 생긴 편견의 시선은 사라지지 않는다. 외모나 인상, 출신 대학이나 입는 옷의 메이커로 누군가에게 선입견을 가지듯, 이제는 사는 위치도 그런 기준 중에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런 정보들 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는 게 내가 가진 이성의 노력이지만 편견과 선입견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래도 지금 사는 이 집을 좋아했다. 임대료와 관리비를 합쳐서 20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았고 신축 아파트에 처음 입주해서 그런지 내 집 같은 마음이 있었다. 새집이라 시설도 깔끔했고 집을 둘러싼 자연환경도 퇴근 후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기에 좋았다. 서울 치고는 공기가 맑았고 도시 특유의 매캐한 냄새도 없었다. 집 앞의 수목원에서 달리기를 하면 호수에 비치는 하얀 달빛에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임대주택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걸 기뻐하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손자 자취하는 데 돈 한 푼 못해준다고 미안해하던 할머니. 그런 할머니에게, 할머니 덕에 잘 컸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합정역 횡단보도 앞에서 그런 통화를 했었다. 글쓰기를 처음 시작한 집이기도 하다. 직접 조립한 나무 책상에 앉아 무턱대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처음 쓴 글이 너무 별로여서 놀랐던 기억도 있다. '귀가 작아 슬픈 동물'이라는 글이었는데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최악의 글이었다. 언젠가 하루는 싱크대를 붙잡고 바닥에 눈물이 고이도록 울었던 적도 있다. 2019년이었나, 사는 게 많이 고단했던 해였다. 첫 책의 출간 계약을 한 것도 이 집에 살 때였고, 여자친구를 처음 만났것도 이 집에 살 때였다. 서른에서 서른셋까지, 사 년 간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집이다.


임대주택의 특성상 계약이 끝나면 집을 모두 비워야 했다. 개인 간의 거래였으면 에어컨이나 세탁기 등을 다음 세입자에게 양도할 수도 있을 텐데 이 집은 주택도시공사와의 계약이라 집에 있는 모든 걸 비워야 했다. '당근 마켓'이라는 어플을 깔아 필요 없는 물건들을 정리했다. 냉장고와 세탁기를 팔았고, 전자레인지도 팔았다. 안 쓰던 시계도 팔았고, 턱걸이용 운동기구도 팔았다. 안 팔리는 물건은 공짜로 내놓기도 했다. '나눔'이라는 건데 공짜로 받겠다고 하면서도 약속을 어기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이 나기도 했다. 무료로 받으니 약속을 더 쉽게 여기는 아이러니를 겪은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사람이지,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하루는 티브이 선반을 2만 원에 내놨는데 사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아파트 아래로 내려갔는데 그을린 피부에 깡마르고 입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속으로, 2만 원짜리 티브이 선반을 살만하게 생겼네,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은 환하게 웃으며 이런 걸 어떻게 2만 원에 사냐고 5천 원을 더 주고 가셨다. 외모만 보고 사람을 업신 여긴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행색은 몰라도 마음은 내가 더 가난했던 것이다.


그렇게 물건들을 정리하고 휑해진 집을 보니 마음이 이상했다. 물건들의 빈자리에서 왠지 모를 여운이 느껴졌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라 던데 그런 걸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나는 제자리에 서 있는데 시간과 공간이 주위를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마음을 준 것들도 언젠가는 떠나가는구나 싶었다. 사라진 것들의 여운을 느꼈다.


내 삶은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 나이는 어느새 삼십 대 중반이 되었고 결혼을 곧 앞두고 있다. 실수가 많아도 괜찮았던 이십 대는 지나갔고 이제는 어깨가 더 무거워진 나이가 되었다. 결혼을 하고 신혼을 보내면 아이를 낳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또 포기해야 할 것들이 생길 것이다. 글 쓰는 시간도 줄이고, 친구들 만나는 시간도 줄이고, 운동하는 시간도 줄이고, 어쩌면 혼자만의 시간이 이제는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제는 회사에서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참아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이사는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내 삶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순간일 수도 있다. 청년에서 어른으로, 자유에서 책임으로, 혼자에서 부부로, 그런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 변화 속에 나는 더 행복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미래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두 가지 맛이 섞인 막대 사탕처럼 희망과 불안으로 뒤엉켜 있다, 이번에도 그렇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중요한' 시기라는 것이다. 인생에 중요한 순간이 '따로' 있다면 지금이 그 중요한 순간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뭐든 언제나 과거에 대한 마무리를 잘해야 새로운 시작도 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 살던 이 집을 잘 보내야 또 새로 맞을 집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잘살았다 집아. 서운한 것도 있겠지만 그럭저럭 잘 지냈던 것 같다. 고마웠던 집아, 이제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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