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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 이유

by 추세경

22년 10월 19일에 발행했던 <어른이 된 이유>을 퇴고하여 재 발행하는 글입니다.



라면을 끓일 때 물 조절을 자꾸 실패했던 기억이 있다. 물을 적게 넣으면 조금 짜도 먹을만했지만 물을 많이 넣으면 그건 도저히 먹기가 힘들었다. 국물도 맹맹하고 면에서는 고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할머니는 라면이 맵다고 라면 국물에 보리물을 섞어주곤 했다. 그건 그래도 그 나름의 맛이 있었는데 물을 많이 넣고 끓인 라면은 정말 맛이 없었다. 면발은 하얀 색도 아니고 노란 색도 아닌 고무장갑을 뒤집어 놓은 색이었다. 다음에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을 해도 냄비의 크기가 달라지면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초등학생 시절의 이야기다.


라면을 자주 끓였던 이유는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나는 혼자서 밥을 챙겨 먹어야 했다. 그런 나에게 라면은 쉽고 간편한, 어떤 것보다도 맛있는 음식이었다. 어린 내가 혼자 점심을 챙겨 먹는 게 안쓰러웠던 엄마는 분식집을 하는 친구 엄마에게 정산을 해줄 테니 내가 가면 밥을 좀 해달라고 했다. 근데 분식집에 가서도 자꾸 라면을 시키는 나에게 아주머니는 자꾸 왜 라면만 시키냐고, 그러면 엄마한테 혼난다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점심을 먹었으니 그전까지는 그런 생활이 이어졌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닐 때였다. 종합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2학년 때였나, 학원에서 영어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어본 사람은 어른이야"


라는 말이었다.


얼굴이 하얗고 구레나룻가 턱까지 내려오던 분이었다. 구레나룻 아래에는 거뭇한 면도자국이 남아있었고 머리숱은 많은데 유광 왁스를 잔뜩 발라서 진한 검정으로 머리카락이 빛나던 분이었다. 그 포마드 머리가 그의 새하얀 얼굴과 유난히 대조되어 보였다. 그는 수업을 하다가 갑자기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어 본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몇 명이 손을 들자 그는, 이 사람들은 어른이라고,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어봤으면 어른이라고 했다. 순간 나는 으쓱하는 마음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분식집에서 혼자 밥을 먹었기에,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그랬으니 대단한 사람인 건가?" 라며 우쭐해졌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수많은 혼밥을 했다. 중학교 때는 혼자 학원 앞의 포장마차에서 즉석 짜장면을 먹었고, 고등학교 때는 학원 앞의 분식집에서 자주 혼자 밥을 먹었다. 도서관에서 재수할 때는 기사 식당에서 점심과 저녁을 모두 혼자 먹었는데, 특히 점심 때는 매일 같은 식당을 다녔다. 혼자 온 손님들로 가득한 식당이었고 여섯 명짜리 테이블이든 네 명짜리 테이블이든 따로 온 손님들이 섞여 앉았다. 한 사람이 한 자리만 앉았고 옆에 누가 오나 앞에 누가 앉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개 고개를 숙이고 밥만 먹거나 아니면 식당의 티브이를 보며 밥을 먹었다. 도서관에서 흘러나온 고시생과 재수생, 오후의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기사, 하루를 보내야 하는 걸음이 느린 노인들은 같은 테이블에 섞여 밥을 먹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누군가는 회사에서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스스로를 어른이라 느낀다.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다. 누군가는 부모님 대신 동생을 키워야 했을 때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고, 누군가는 여드름 불긋하던 사춘기에 벌써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다. 아니면 나처럼 그런 순간이 없었던 사람도 있다. 아직 어른이 아닌 건지, 아니면 딱히 그런 순간이 없었던 건지, 아직 나 같은 사람은 '나 진짜 어른이야'라고 느껴본 경험이 없다. 그러고 보면 그 구레나룻 선생님은 혼자 밥을 먹다가 문득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외로워서 그랬을 것 같은데, 그 외로움에 담긴 사정이야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이유는 몰라도 그에게 어른이란 '외로움을 아는 것'이 아니었을까. 외로움이 그에게는 어른의 '무게'였을 거라고 말이다. 정답이야 뭐, 알 수 없지만.


엄마나 할머니와 통화를 하면 그녀들은 항상 밥은 잘 먹었냐고 묻는다. 끼니를 챙기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먹고사는 일은 참 고단한 일이다. 힘들게 돈을 버는 이유도 먹고살기 위함이고 그렇게 바쁜 와중에 세끼를 꼬박 챙겨 먹는 것도 그 자체로 고단한 일이다. 누군가의 아들이나 누군가의 손자였을 때는 그들이 차려준 밥상을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됐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그럴 수가 없다. 돈도 직접 벌어야 하고, 밥도 직접 챙겨 먹어야 하고, 그런 여러 가지 일들이 모두 스스로의 몫이 돼버린 것이다. 엄마랑 할머니가 자꾸 나의 식사를 걱정하는 건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을 이미 그들은 뼛속 깊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나는 아직 밥을 챙겨주고 싶은 어린애인데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가 없으니 자꾸 걱정만 앞서는 것이다.


혼자 밥을 먹어 본 경험이 있으면 어른이다,라는 말은 맞는 말일 수도 있고 틀린 말일 수도 있다. 자신의 경험만이 옳다고 믿는 한 인간의 상상력 없는 결론일 수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일반적인 정서일 수도 있다. 구레나룻 선생님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걸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20년 전에 이야기한 하나의 문장 덕에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조금 달라졌다.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과 어른이 된다는 것, 그 사이의 미묘한 울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혼자라는 외로움과 어른의 무게, 생계의 고단함과 따뜻한 집밥에 대해서 한번 더 곱씹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식당에서 혼자 순댓국을 먹다가 문득 사는 게 고단하다는 생각이 들면, '이제 정말 어른인 건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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