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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의 미학

by 추세경

22년 11월 2일에 발행했던 <청소의 미학>을 퇴고하여 재 발행하는 글입니다.



어렸을 때 내 방은 지저분했다. 청소를 거의 하지 않았고 정리정돈도 마찬가지였다. 많이 어질러 이제는 치워야겠다 싶으면 그때 한 번씩 정리를 했다. 청소를 하지 않으면 바닥에는 머리카락이 쌓인다. 그게 봄날의 민들레 씨앗처럼 많다는 것을 대학생이 되고서야 알았고, 그걸 알았을 때가 스무 살이 넘은 나이였다는 게 스스로도 충격이었다. 그만큼 청소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 방이 정말 그렇게 더러웠냐면, 그건 또 아니다. 나는 게을렀지만 엄마가 내 방을 정리해 주셨기 때문이다.


엄마는 회사에 다니면서도 집안일을 거의 모두 혼자 하셨다. 네가 먹은 건 네가 치워라, 네 방은 네가 청소해라,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가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나 일주일에 한 번 분리수거를 하는 걸 도와달라고 한 적은 있지만 그건 그냥 '가끔' 하는 부탁에 불과했다. 평소에는 모든 집안일을 거의 엄마 혼자서 하셨다. 왜 그랬는지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 이유를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어린 자식들에게 힘든 일을 시키기 싫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집안일 말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는 조용한 지원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내가 아는 엄마는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반드시' 자기가 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시키거나 요령을 피우는 분이 아니었다. 엄마는 자신의 의무 안에 '집안일'이라는 항목을 넣어두고 그 역시 본인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그게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도 든다. 조금 더 편하게, 조금 더 게으른 엄마로 살았으면 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그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라는 이름이 가진 힘, '모성애'에 대해 미화된 이미지가 세상에는 많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모성애'를 가진 따뜻하고 아름다운 엄마들도 세상에는 많지만 그렇지 않은 엄마들도 세상에는 많다. 신문의 뉴스면을 조금만 찾아보면 엄마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들도 세상에는 많다. 갓난아이를 버린다든지 세탁실에 아이를 가두고 폭력을 휘두른다든지 하는 '엄마의 폭력'도 세상에는 많다는 말이다. 부지런한 엄마가 있으면 게으른 엄마도 있고 자상하고 따뜻한 엄마가 있으면 냉정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엄마도 존재한다.


근데 생각해 보면 어려서 내가 자란 할머니네는 항상 깨끗했다. 바닥에는 먼지 하나 없었고 물건들은 늘 제자리에 있었다. 할머니는 지저분한 걸 참지 못하는 분이었다. 바닥에 뭔가가 있으면 바로 허리를 숙여 그걸 정리했다. 어려서는 ‘할머니네 집은 깨끗하다’라는 걸 단순한 하나의 '사실'로만 생각했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집을 그렇게 유지할 수 있는 건 할머니의 '능력'이었다. 부지런하고 성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할머니는 자식 넷에 손주 셋을 업어 키웠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런 천성은 타고난 인품이고 만약 그녀가 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 능력을 어떻게 발휘했을까, 싶은 마음도 있다. 요즘 사람들처럼 그 성실함을 무기로 조금 더 자기만의 가치를 실현해 가며 살았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만큼 할머니의 집은 깨끗했고 그만큼 그녀는 부지런했다.


청소와 정리 정돈을 제대로 배운 건 군생활을 하면서부터다.


군대에서는 전시를 대비해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어야 한다. 관물대에는 방탄과 군장, 요대와 전투복 등이 모두 자기만의 자리를 가지고 있다. 전기 기사의 연장 벨트에는 도구마다의 자리가 따로 있듯이 생활관에서 쓰는 관물대에도 장구류 하나하나의 자리가 정해져 있다. 속옷도 마찬가지였는데 보관하는 위치뿐 아니라 그걸 개는 방법도 모두 정해져 있었다. 훈련소에 입소해서는 정리 정돈으로 혼날 때가 많았다. 물건의 모양새가 흐트러져 있거나 생활관 바닥이 지저분하면 얼차려를 받았다. 내가 잘못해서 혼나기도 했지만 같은 방의 동기가 잘못해서 혼날 때도 있었다. 그렇게 20대가 넘어 고함과 얼차려를 통해 청소를 배웠다.


군대에서 배운 정리 정돈과 청소의 습관은 자취를 하며 능력을 발휘했다. 자취를 시작하고 처음에는 이틀에 한 번씩 청소를 했다. 퇴근 후에 마땅히 할 일이 없었고 그렇게 남는 에너지를 청소에 썼다. 바닥에는 머리카락 하나 없었고 침대에 앉아 깨끗해진 집을 바라보면 기분이 좋았다.(청소도 에너지를 쓰는 일이라 글쓰기를 시작하고는 집이 엉망이 된 적도 많다) 그러던 어느 날 무릎을 꿇고 걸레질을 하는데 문득 피는 못 속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항상 깨끗이 치우던 할머니와 회사를 다니면서도 집안일을 혼자 하던 엄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과 내 모습이 겹쳐 보였고 내 안에는 두 분의 피가 흐른다는 걸 실감했다.


요새 느끼는 건데 청소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잘 버리는 일'이다. 불필요한 물건들에는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 '버림'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들이 생각보다 많다. 서랍에는 핸드폰을 살 때마다 모아둔 핸드폰 부속품이 가득하다. 쇼핑백은 왜 이렇게 많고 쓰지도 않는 노트는 왜 자꾸 느는지, 순간순간에는 그게 새 거니까, 쓸 데가 있어 보이니까 남겨 두지만 결국에는 버려야 할 짐이 된다. 그런 물건들은 침대 밑에 먼지가 쌓이듯 알게 모르게 늘어난다. 그러다 보면 청소는 더 어려워지고, 집은 더 무거워진다. 무거워진 집에서는 왠지, 몸도 무거운 느낌이다. 필요 없는 물건들을 버리지 못했던 마음, 그 순간순간의 욕심은 부질없는 것이라는 걸 –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건 물건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욕망하는 모든 것들에도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나 모든 걸 잘하고 싶은 욕심, 언제나 행복하고 싶은 욕망은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늘' 행복하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 살면서 필요한 건 ‘몇 안 되는’ 것들이다. 몇 안 되는 소중한 가족과 몇 안 되는 친한 친구, 몇 안 되는 절실한 목표, 그런 게 중요하다. 모든 걸 가질 수는 없고 모든 걸 잘할 수도 없다. 유한한 삶에서 주어진 시간과 타고난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나에게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들에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한 첫 번째는 불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무소유를 주장하고 싶은 건 아니다. 나는 욕심이 별로 없어, 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와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런 말은 대개가 거짓이고 나 역시 욕심이 꽤나 많은 사람이다. 다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조금 더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하는 지혜, 그런 현명함을 가지고 싶다는 말이다.


걸레질을 하며 바닥에 묻은 먼지와 검게 붙은 머리카락을 닦는다. 잘 닦이지 않는 부분은 검지 손가락에 힘을 주고 문지른다. 늘 항상 부지런했던 할머니를 생각한다. 집안일을 모두 혼자 했던 엄마를 생각한다. 그리고 내 삶의 무게를 생각한다. 나에게 중요한 건 뭘까. 내가 버려야 할 것은 어떤 것일까.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조금 더 가벼운 몸으로 뛰고 싶다. 조금 더 가뿐히 뛰고 싶다. 불필요한 살은 걷어내고, 조금 더 가볍게, 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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