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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세경 Mar 25. 2020

차라리 모기를 물리겠어요

풍선을 불어본 게 언제였지.


초등학교 때는 풍선을 자주 불었다. 특히 피아노 학원을 다닐 때였다. 풍선 봉지를 뜯을 때 나는 고무 냄새는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뽀하고 싶은 매력이 있었고 쫀득한 주둥이를 물 때면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나는 풍선을 불 때  . 다 불었다 싶을 때면 침 냄새 고무 냄새 가릴 정도였다. 터질 듯 말듯할 때까지 불어야 재미가 있었 그런 놈을 매듭짓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수로 주둥이를 놓치면 풍선은 허공을 날았다. 바닥에 떨어진 풍선은 침에 절어있었고 축축한 촉감에 다시물고 싶지 않았다.


29살의 마지막, 그러니까 18년도 12월, 벌써 1년도 더 지난 그해 겨울, 내 다리는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어올랐다.






친구들이랑 낚시를 가서 벌레를 물린 게 문제였다. 날파리처럼 생긴 녀석들이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20여 방을 물었다. 기 물린 도라 로 신경 쓰지 않았고 다행히 빨개졌던 부위는 조금씩 가라앉았다. 근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그 이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쌀톨 반만 한 크기로  손톱으로 찌르면 찡하니 가려웠술을 마시면 대화 중에도 긁 만큼 가려웠다.


여름에 물렸는데 을이 지나도 낫지 않았다. 술을 많이 마신 11월 회식 다음날었다. 물렸던 부분들이 가려웠다. 낮에도 가려운 적은 처음이라 피부과찾아갔다. 의선생님은 여자분이었는데 짙은 쌍꺼풀에 이마가 동그랬고 주먹으로 어깨를 잘 칠 것 같은 쿨함이 있어 보였다. 상황을 설명하고 처방을 받았다. 생님 말대로 2주 동안 약을 먹 연고를 랐더니 물린 자국이 깨끗이 사라졌다. 환부가 2주 만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병원 가길 귀찮아하던 스스로가 멋쩍었다.


근데 일주일 후에 물렸던 이 다시 솟다. 죽었던 모기 자국이 살아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없었다. 그 장면이 신기했고 신기함에 걱정을 섞어 병원을 찾았다. 쿨해 보였던 선생님은 쿨함을 잊은 표정으로 다시 약을 먹자고 했다. 술은 마시지 말고 바디로션 바르라고 했다.


2주가 지나니 환부 다시 사라졌다. 생님은 이제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지루한 수업이 끝났다는 듯 '고생하셨습니다~'를 외쳤다.


그 목소리가 잊히기도 전에 환부는 피부를 뚫고 올라왔다. 두더지 게임을 하자는 건가.  나타난 녀석이 나는 미웠다. 그리고 문제가 한 가지 더 생겼다. 그 녀석이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멀쩡했던 오른쪽 종아리 뒤에 손바닥 반만 병변들이 올라왔다.

 

아토피를 심하게 겪었던 친구에게 스테로이드 부작용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피부과 약에는 스테로이드 성분이 있고 그걸 과다하게 복용하면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이다. 스테로이드는 면역 기능을 대체해주기 때문에 속 먹으면 자체 면역 기능이 떨어 약을 끊으면 면역 체계가 작동을 못한다는 리다.


종아리에 생긴 붉은 병변은 그 불안에 기름을 부었다. 선생님은 복용 기간 동안 약을 줄여가며 처방했고 기간 한 달 밖에 안되기 때문에 부작용 리가 없다고 했다. 다시 찾아간 지 5분도 안돼 대학 병원 소견서를 밀었다. 더 이상 진료가 어렵다는 것이다.


......


'그래, 기분 나쁠 수도 있지'


......


'아니 근데...'


처방불안해하는 내가 미워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환자였 치료 이후에 상태가 나빠진 것 사실이었다. 을 표현했을 뿐 무례하게 말하지도 않았다. 의사라면 환자의 불안까지 안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증상은 어떠냐고 한 번은 더 물어봤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나 논리적이기 전에, 대학병원 소견서를 내밀기 전에, 한 번은 더 그랬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지 않았던 그분의 마음을 나는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올일 없겠구나 하며 병원을 나왔다.


내로라하는 대학 병원들에 전화를 돌렸지만 가장 빠른 곳도 2달 후에나 진료가 가능했다. 일단 두 달을 참아보기로 했다.






왜 나는 아픈 것도 꾸준한지 병변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갔다. 붉은 녀석은 종아리에서 허벅지로 올라왔고 발목으로도 흘러 다리 전체로 퍼졌다. 비슷한 녀석이 팔꿈치에 생기더니 팔 전체를 덮 시작했다. 다음 차례는 허리였고 다음은 등이었다. 손톱 밑에는 수포가 생겨 터트리면 진물이 흘렀다. 발등은 붉은 반점들이 수놓았다. 손등과 손바닥, 얼굴, 가슴을 제외한 온몸이 망가졌다.


부위별로 증상이 달랐다. 팔다리는 붉고 건조한 병변들이 덮었다. 손톱 밑에는 수포가 생겼고 에는 노란 고름 찬 알갱이들 솟았다. 사춘기 여드름은 얼굴에만 났었는데 이 놈들이 왜 등으로 왔는지 오춘기가 이렇게 시작되나 싶었다. 톡 터트리면 시원한 여드름과 달리 그놈들은 아팠고 한의원에 가서 물어보니 여드름이 아니라 모낭염이라고 했다. 얼굴과 손등은 멀쩡해서 회사는 별일 없는 듯 다닐 수 있었다. 바퀴도 부어올랐지만 귓바퀴 상태까지 알아만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회사에 없었다.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서니 온몸이 빨갰다. 피부과 벽에 붙어 있는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무섭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다만 잠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생각멎었다고 해야 할까. 이 순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싶도 했다. 몸의 구석구석을 훑어며 열심히 머리에 담았다.


나는 건강했다. 편도선이 커서 환절기마다 편도염에 걸렸지만 이십 대 초반이 지나서는 괜찮아졌다. 피부질환도 위장병도 없었고 매일을 축구해도 골절 한번 당한 적 없었다. 장교가 되기 위해 30도가 넘는 폭염에도 군장을 매고 산을 오르내렸고 보할 때면 뒤쳐지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으쌰 으쌰 하던 나였다.


거울 앞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뭐가 잘못됐을까. 나를 물었던 파리를 원망하기엔 시간이 너무 흘렀다. 그리던 장난감을 쥐었는데 깨어보니 꿈이었을 때의 상실감, 그걸 깨달았을 때의 적막함, 건강했던 시절은 꿈이었고 이제는 꿈에서 깬 건지 싶었다. 물리자마자 병원에 가지 않았던 나태함에 대한 벌일까. 선생님의 진료를 의심했던 죗값일까. 그렇게 받아들이기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억울했다.






몸이 가렵기 시작했다. 모낭염이 난 등을 빼고는 다 가려웠다. 대학병원을 기다리지 못하고 찾아간 한의원에서는 절대 긁으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절대 으면 안 된다는 말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이나 언제나 사랑하라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참을 수 있을 때도 있었지만 도저히 안될 때도 있었다. 한번 긁기 시작하면 가려운 부위는 점점 커져 몸 전체를 긁곤 했다. 뼛속까지 춥다고들 하는데 나는 뼛속까지 가웠다.


모기 물린 가려움과는 달랐다. 몸속 깊은 곳에서 가려움이 올라왔다. 긁을 때는 쾌락마저 느껴졌다. 내가 아는 쾌감은 화장실에서의 쾌감이나 야한 일을 할 때의 쾌감이나 드리블로 수비수를 제치는 쾌감 정도였는데 뼛속 깊은 가려움을 긁어대는 쾌감은 그 무엇보다 컸다. 긁기 시작하면 자제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옆에서 손 잡고 말리는데 기 어려웠다.


문제는 긁어도 긁어도 가렵다는 것이었다. 보면 상처가 생 피가 나와 따갑기 시작했다. 가움에 정신이 들화장실에 들어가 찬물을 뿌곤 했는데 처 난 부위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도 뜨거웠다. 참으려고 노력했던 시간날아갔고 상태  다. 그 순간을 참지 못한 자괴감 부모님에게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죄책감이 따라왔다.


일상이 어려워졌다. 가려워서 잠을 자지 못했다. 가려운 부위 밤새 얼음질을 했그래도 안되면 화장실에 들어가 찬물로 샤워를 했다. 회사에 출하면 오후 3시만 돼도 피곤했다. 하루는 회의를 하고 있는데 종아리가 부어올랐다. 넉넉하바지가 꽉 끼었고 가렵기 시작했다. 너무 가려우면 따가움이 되고 통증이 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회의 내용은 하나도 리지 않았다. 결국 화장실로 달려 바지를  변기에 다리를 올린 채 생수통에 찬물을 담아 뿌렸다. 그렇게 네 번, 다섯 번을 했더니 조금 나아졌. 밑에 흩어진 물기를 닦고 변기에 앉아 개를 숙인 채 욱신거리는 다리를, 붉게 물들어 열을 뿜어대는 피부를 바라봤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은 모르겠지만 내 종아리는 바지 가락만 스쳐도 가려웠다.


상태가 가장 안 좋았던 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다리가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어올랐다. 고등학교 때 다리가 굵은 친구에게 다리 괴물이라고 놀렸었는데 내가 다리 괴물이 되어있었다. 불을 끄고 누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부모님은 고향으로 내려갔고 서울에는 나 혼자였다. 친구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창문의 블라인더 사이로 달이 비쳤다. 어둠 속에 비치는 달과 빨갛게 부어오른 다리, 이십 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이브, 크게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라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 그게 그저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던, 그런 밤이었다.






다행인 건 이후로 몸이 조금씩 좋아졌다는 것이다. 빨갛던 환부는 각질이 되 시작했다.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스테로이드는 죽어도 쓰기 싫었고 잘 먹고 잘 자는 방법으로 면역력을 높이고자 했다. 대학 병원 진료는 여전히 한 달이나 기다려야 했다. 스테로이드 부작용을 극복한 환자들의 후기를 보니 피부는 오르 내림을 반복하며 낫는다고 했다. 좋지 않을 때와 좋을 때가 반복되며 나아진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 몸도 그랬다. 좋고 나쁨을 오가며 회복하고 있었다. 좋아하던 밀가루와 튀김을 끊고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면역에 좋다는 버섯과 푸른 채소들을 찾아 먹었다. 퇴근하고는 여덟 시부터 자려고 노력했다. 잠 못 들 때가 많았지만 자는 시간도 서서히 늘다.


대학 병원에 갈 때쯤엔 처음 물렸던 환부 말고는 많이 좋아졌다. 두 달을 기다려 만난 대학 교수님도 내가 왜 아팠는지는 명확하게 말해주지 못했다. 찍어간 사진을 보고도 증상에 대한 처방주셨다. 스테로이드가 두렵다고 했더니 몸 전체가 아닌 환부에만 주사를 맞으라고 하셨다. 그렇게 환부 별로 스무 방의 주사를 맞았다. 한번 맞으니 반 정도가 사라졌고 한 달 뒤에 반 정도 그리고 한 달 뒤에는 거의 다 사라졌다. 다시 솟아오르는 부위들 있었지만 대학 병원 더 이상 가지 않았고 동네 피부과에 가서 같은 방법의 치료를 부탁했다. 그렇게 몇 번을 가니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지리했던 두더지 게임 끝난 건 9개월이 지난 19년 7월이었다.


정신과 치료로 시작한 스물아홉, 그걸 극복하게 해 준 여자 친구와의 만남, 그녀와의 갑작스러운 이별, 혼자 겪은 교통사고 그리고 피부병, 일이 있었다. 돌아보면 이별과 교통사고로 인한 스트레스가 피부병의 원인이었다. 면역이 낮아진 상태에서 내 몸은 스테로이드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래서 아팠 것이다.


왜 이렇게 힘든 한 해였을까. 못된 것은 내 탓으로 돌리는 성격이라 내가 도대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짚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막을 수 없는 운명'을 말하는 문학 작품처럼 내 스물아홉도 그냥 그런 거지 싶었다. 살다 보면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시간들, 이때다 싶어 몰려 순간들, 런 때가 는 거지 싶었다.


불다 놓친 풍선은 허공을 날 바닥에 떨어졌고 축축해진  한동안 곳에 남져야 했. 그게 내가 될 수 있음을 배웠고 그렇게 나는 삼십 대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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