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때 1년 동안 같이 다니던 친구 두 명이 있었다. 나 대학교 때는 학부로 입학해서 1학년 때는 전공이 갈리지 않고 대신 임의로 반을 나눠서 그 학부에 포함되는 학과에서 A반, B반, C반.. 이런 식으로 신입생들을 챙기고 학교 행사를 같이 하다가 2학년 때부터 전공으로 갈렸다. 이 두 명의 친구는 1학년 때는 나랑 같은 반이 아니다가 2학년 때 전공이 같아지면서 친해졌다가 3학년 때부터는 교직 이수, 복수전공, 부전공 등으로 같은 수업이 많이 없어지면서 뿔뿔이 흩어져 실질적으로는 2학년 때 1년 동안만 붙어 다녔다.
그 둘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진희는 우리 과뿐만 아니라 단과대 전체에서 유명할 정도로 예뻤고 내레이터 모델-모터쇼 모델을 거쳐 현재 광고도 찍고 영화나 드라마에도 단역으로 출연하는 배우가 됐다. 미영이는 진희 옆에 서면 보이지도 않을 작은 키에 어디서 야매로 했는지 실패한 쌍꺼풀 수술 자국이 선명한 얼굴, 화장기 하나도 없는 얼굴에 엄마 옷 빌려입고 나온 것 같은 패션, 멀리서도 알아볼 정도의 지독한 팔자걸음을 걷는 아이였다. 아무래도 자신감 부족 때문이었을, 친하지 않은 사람과의 인사나 대화를 어려워하다 보니 되려 차갑고 화난 얼굴로 다녀 첫인상도 좋지 않았다. 항상 생글생글 웃으며 다니는 진희와는 비교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평생을 예쁘다 예쁘다 소리만 들으며 자란 사람에게는 세상이 얼마나 만만하고 핑크빛일까? 진희는 지금 생각해 보면 자기가 어떻게 해도 결국엔 용서받는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진희는 자기 호위병처럼 미영이를 데리고 다녔다, 고등학교 때부터. 키 차이가 나다 보니 그들이 서 있을 때 항상 진희는 미영이에게 어깨를 두르고 미영이 머리에 몸을 기댄 모양이 됐다.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항상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래도 데리고 다닐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렇게 늘 같이 다녔던 그들과 2학년 초 전공필수 수업의 과제를 같이 하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내가 가끔씩 끼게 된 것이다. 나는 학회 활동으로, 진희는 동아리 활동으로 바빴기 때문에 레포트 쓰러 도서관 같이 다니고 시간 맞으면 학교 식당에서 점심 같이 먹고 하는 정도의 우정일 뿐이었지만.
진희는 분방한 성격이어서 남자도 잘 사귀었는데 양다리도 종종 했고 가끔은 자기 마음 속에서 혼자서만 헤어진 후 이내 다른 남자의 고백을 덥썩 받아주기도 했다. 마치 온존재를 다해 '주변에서 날 가만두지 않는 걸 어떡해'라고 말하는 듯이. 진희는 아무리 짧게 사귀어도 그 남자에게 미영이를 소개해 줬는데 그럼 상대 남자들은 진희'급'의 예쁜 친구를 기대했다가 실망했지만 대신 진희가 미영이랑 뭘 한다, 어디 간다고 하면 안심하고 노터치였던 것이다. 진희의 이야기 속에서 미영이는 우울하고 외로운 사람이라 '친구'의 관심과 손길이 필요했고 진희에게로 향하는 뭇남성들의 시선을 의도치 않게 어느 정도 막아 주는 존재였다. 생각해 보면 유치하고 잔인하지만 내가 곁에서 본 바로는 그렇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에 교회나 성당, 학원, 혹은 엄마 친구 딸/아들 이런 관계를 통해서 이성과 자연스럽게 친교를 쌓아왔던 사람이 아니라면 처음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이성과 어느 정도 선까지 친구로서 친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선부터는 연인의 영역인지 헷갈릴 수 있다. 갑자기 부여된 자유와 낭만, 성인이라는 신분 변신, 겨우 한두 살 차이일 뿐이지만 선배 혹은 후배라는 이유로 친근하고 격의 없이 훅 들어오는 관계들 속에 사람들은 착각하기 쉬운 것이다. 학과 내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을 때 가장 손쉽고도 안전한 방법은 이성으로서의 관심을 숨긴 채 선후배 혹은 동기로서 친해지는 것이다. 우리 한 학번 아래에 인물 좋고 재미있고 잘 놀고 자기들끼리 친한 여덟명의 남자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진희와 친했고 각자 다들 진희와의 썸띵을 꿈꿨다. 여름방학, 그들은 4박5일간의 물놀이 여행을 계획했고 진희에게 몸만 오라고 했다. 진희는 남친에게 미영이와 놀러 간다고 말하고 미영이도 데려갔다.
나는 그 때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내 남자친구가 그 여덟 명 중 일부와 친해서 우린 그 여행을 같이 가진 않고 4박5일 중 하루 가서 당일 같이 놀고 돌아왔었다. 그들은 바다가 바로 코 앞인 어느 민박집에서 머물렀는데 마당을 들어서면 주인집 건물과 별채 건물이 있었고 방이 두 개인 그 별채 건물을 빌려서 머물고 있었다. 그 여덟 명은 각자의 욕망과 자신감 속에서 머릿속으로 진희와의 로맨스를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아름다우나 고귀하다기보다는 헤퍼 보이는 그녀를. 어차피 모두가 군입대를 앞두고 있었고 진지한 연애를 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이 남자, 저 남자 다 사귀고 다니는 진희를 보며 나도 안될 것 없지,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내가 남친과 당일치기로 합류했던 그들의 사흘째 날을 기해, 놀랍게도 진희는 모두에게 여지를 주었던가 보았다. 오고가는 술잔 속에 스쳐가는 손길이나 눈길로, 또는 물놀이하며 수영복 끈 묶는 걸 도와달라는 식으로.
모두의 가슴 속에 불지펴진 희망은 그날 밤 저녁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절정에 다다랐다. 요즘 대학생들은 술자리에서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 때는 '진실게임'을 많이 했다. 진실게임도 여러 형태가 있는데 그때 내가 술자리를 가졌던 무리에서는 자주, 둥글게 둘러앉아 순서대로, 자기 순서가 되면 나머지 사람들이 질문을 한다. 질문은 내밀하고 사사롭고 어이없는 것일수록 환영받는다. 그럼 질문을 받은 사람은 '진실'을 말해야 하고 만약 진실 말하기를 거부하고 싶으면 원샷을 해야 되는 것이다. 아마도 취지는, '진실' 말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술 취하게 만들어서 결국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취중진담을 하게 만들자는 거였던 것 같다. 이 룰이랄 것도 없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게임은 자주, 술자리 멤버 중 누구에게 '진실'을 듣고 싶을 때 가장 진실이 궁금하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게임은 재밌게도 심각한 맹점이 있었는데, 바로 진실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자가 '흑기사' 혹은 '흑장미'를 외칠 수 있다는 거였다.
흑장미는 흑기사의 여자 버전이다. 진실을 강요 당하는 자와 반대의 성별을 가진 자만이 흑기사나 흑장미가 될 수 있다. 누군가의 흑기사가 되기를 자처하면 그 사람 몫과 자기 몫, 두 잔의 술을 원샷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실'에 대해 질문 받았던 당사자는 진실 밝히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호기롭게 위기의 순간에서 자신을 구해 준 흑기사의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줘야 했다. 예를 들어, 가벼운 키스같은. 또한, 진실은 밝히지 않아도 되게 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희생'해서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막았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진실 거부자와 흑기사는 그들 사이에 뭐가 있나 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많은 경우 흑기사는 그런 의혹의 눈길을 좋아했다. 어느 정도 야만적이고 모순이 가득한 이 게임은 술자리에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을 때 주로 행해졌다. 반주로 시작한 술에 모두가 어느 정도 취하게 됐고 그들은 당연한 수순처럼 진실게임을 시작했다.
예상할 수 있듯이 진희가 주요 타겟이었다. "제대 후 복학생이 됐을 때 같이 다닐 친구가 있어야 하니까" 비슷한 시기에 휴학 후 군입대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던 이 여덟 명의 남자들은 저마다의 기대감과 욕망을 안고 진희에게 '진실'을 물어봤다. 술자리가 깨지고 우정이 금 가는 건 또 원치 않기 때문에 나름의 선을 지키고 은유를 섞어가며. 그렇지만 고삐 풀린 스무 살 남자의 사랑과 성에 대한 갈구는 숨기지도 못한 채. 애초에 진희에게 진실이란 게 존재하기나 했을까? 나는 의문이다. 진희는 맞다라고 하지 않았지만 아니라고도 절대 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어떤 여지를 주어야 했던 것이다. 진희의 끊임없는 흑기사! 외침과 연거푸 원샷하느라 벌겋게 취해 가는 여덟 명, 흑기사 노릇에 대한 보상으로 진희로부터 하사되는 키스나 가벼운 스킨십 속에 미영이는 홀로 고요했다. 이런 일 이골이 났다는 듯이. 그렇게 한참을 조용히 앉아 상황을 관망하던 미영이는 마침내 어떤 한계에 다다랐던 것일까.
사람들은 종종 당황스러울 정도로 어리석은 결심을 하기도 한다. 미숙함이거나 경험의 부족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는 더 그랬던 것 같다. 미영이는 그 술자리에서, 모두에게, 어쩌면 일평생 잊혀지지 않을 선언을 했다. 미영이는 자기가 숫처녀인데, 이제 그만 이 멍에같은 타이틀을 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혹자는 진짜 어른이 되는 느낌이었다고 말하는 그것을, 누군가에게는 애진작에 던져 버리듯이 치러 버려 까마득한 그것을, 누군에게는 부끄러운 기억이고 누군가에게는 안타까운 기억이고 누군가에게는 따뜻하고 애처로운 기억인 그것을. 누군가에게는 아직 미지의 세계였을 그것을. 나 빼고 다들 아는 것 같아 내 눈 앞에서 모두가 귓속말하는 걸 속수무책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소외감을 느낀다고. 그리고 미영이는 분연히 일어나 뒷방으로 자러 갔다. 모두가 벙쪄서 상황 파악을 하느라 애썼다. 온몸으로 유혹해 대지만 관심만 즐기다 말게 뻔한 예쁜 여자가 있고 저기에, 경험해 보고 싶다고 자청하는 여자가 있다. 대상을 지정하지도 않았고 어떠한 가식이나 신파도 없이 그저 그 행위에의 순수한 동경을 이다지 솔직하게 표현하는 여자가. 정현이가 일어나서 뒷방에 뒤따라 들어갔다. 무리 중 한두 명은 장난 섞인 환호와 응원을 보냈다. 진희는 일견 서운해 보였다. 모두에게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이라 모두가 어느 정도는 충격을 받았고 그런 분위기 속에 진실게임이고 술자리고 거기서 흐지부지하게 끝났던 것이다. 어쩌면 단 한 번 있었던, 초점이 진희에서 미영이에게로 옮겨갔던 순간이었을까. 방에 남은 일곱 명의 남자와 진희는 방을 대충 치우고 각자 구석을 찾아 하나 둘 자리에 눕기 시작했으나 호기심과 상상으로 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다. 뒷방에 따라 들어온 정현에게 미영은 와 줘서 고맙다고 했다. 아무도 안 왔으면 무안할 뻔했다고. 평소에 여덟 명 중에서 네가 제일 잘생겼다고 생각했었는데 네가 와 줘서 너무 기쁘다고.
그렇게 그들은 일을 치렀다.
미영이는 훗날 딱 한번, 당시 상황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많이 부끄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별로 부끄럽지 않았고, 별로 아프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많이 아팠다고. 빳빳한 새 책을 넘기다 종이날에 손끝이 베이듯 적은 양의 피가 나왔으며 너무 아파한 탓에 금방 끝났으며 끝나고서 몸을 가릴 것을 찾아 일어나고 싶었는데 온몸이 후들거려 일어날 수 없었고, 그래서 걸레질을 하는 폼으로 바닥을 기어서 움직였다고. 가슴이 작은데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으니 더 납작해 보이는 것 같아 아픔 속에서도 그게 신경이 쓰였으며 겨드랑이나 다리 사이에서 안 좋은 냄새가 날까 봐 내내 걱정했다고. 정현이가 미안해하거나 저쪽 방에 있는 친구들이 신경쓰여 중간에 그만둘까 봐, 만약에 그러면 정말 다시는 얼굴을 못 볼 것 같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고 했다. 뭔가 기괴하고 비애가 가득한 행위라고 느껴졌고 같은 농도로 같은 시기에 서로를 사랑할 때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해졌다고.
여름이 끝났고 2학기가 됐다. 미영과 정현은 그 해 9월부터 12월이 될 때까지 연인인 듯 연인이 아닌 듯 모호한 관계를 유지했고 2학기가 끝난 후 정현은 곧 입대했다. 정현은 미영에게 잘 지내라고 했고 미영도 정현에게 몸 건강히 잘 지내라고 했다. 정현은 마음은 없었는데 한 여자의 첫 성경험 상대가 됐다는 이유로 본인 기준에 맞게 어떤 예의를 갖췄던 것일까, 사귀는 것처럼 몇 달을 지냄으로써? 그게 끝이다. 휴가를 나와도 미영에겐 연락하지 않았고 미영도 답장도 하지 않는 정현에게서 그저 조용히 멀어져 갔다. 첫경험을 하게 해 줘서 고마운 존재라고 했다. 3학년이 되면서 나는 미영이나 진희와 같이 듣는 수업이 적어졌고 4학년 때는 더더욱 그랬고 졸업 후 곧 한국을 떠나면서 그들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그러다 1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지나 몇 년 전에 우연히 진희를 에스엔에스에서 발견했다. 배우가 돼 있었다. 가족 방문차 한국에 갔을 때 한번 만났다. 미영이 안부를 물으니 미영이는...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미영은 대학교 졸업 후 그저 두문불출하며 지낸다고 했다. 한번도 직장을 가져 본 적이 없이. 졸업 후 1,2년 안에 취직을 못하더니 안 그래도 낮은 자신감이 점점 더 없어지는 게 보이더라고. 정현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성경험을 해 보고 싶어서 먼저 제의해서 했으나 결국 그 끝에 사랑하게 돼 버렸던 것일까. 나는 가끔씩 방문해서 2~3주 머물다 가는 한국에서 누군가의 불행이나 무기력을 마주할 준비가 안돼 있었고 끝내 미영에게 직접 연락을 해 보지는 않았다. 진희의 SNS를 타고 들어가본 미영의 5년 정도 된 SNS 계정에는 서너 개의 게시물이 있을 뿐이었고 그 중에는 그 해 여름, 그 날의 거사를 치르고 난 그 다음다음 날, 피서가 끝나고 귀가하는 길에 둘이서 찍은 스티커 사진이 있었다. 당시의 스티커 사진 화소에다가 세월과 함께 빛이 바래 내가 그들을 알기 때문에 겨우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던 사진 속에서 미영이는 웃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성경험이라는 건 뭘 의미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