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 그 해 여름
나이 들어 대학 생활을 한번 더 했지만 고교 졸업 후 처음 한 대학의 학부 시절이 내 인생 최고 낭만의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 시대의 낭만이 있었거든. 여전히 김광석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가득하던 시절이었지. 몇 년 갔어 그거. 나는 국어국문학과 출신이야. 우리 과에는 학회가 5개 있었어. 내가 속한 학회는 학부생이 연구/발표하고 석사생이 지도하는 구조의 스터디 모임이 매주 있었고 여름 논문대회도 했어. 석, 박사를 하거나 졸업했지만 학회에 애정을 가진 선배들이 기획하고 대부분의 비용을 충당해서 여름마다 했지. 말이 좋아 논문대회지 MT였지 뭐. 그해 5박6일 논문대회 중 일어난 일이야.
대학생들 노는 걸로 보였겠지만 학부 때부터 논문을 써 보는 연습을 하라는 취지여서 학부생은 참가비 없고 발표자 전원에게 10만원을 지급했어. 재학생, 졸업생, 교수님도 몇분 오셨었어. 장소 섭외하고 며칠간 모두가 일용할 양식과 술, 대절버스, 발표자 격려금 등 50여명이 참가했던 걸 고려하면 적은 돈이 아니었을 텐데 그걸 가능케 한 졸업생 선배가 있었지. 이미 유자녀 기혼자였고 학회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던 그분. 그 선배는 학부생 시절에 결혼했어. 뭐가 그리 급해서? 라고 물으면 코가 꿰여서 라고 답하며 하하 웃던 선배. 원래도 집이 잘 살았던 데다 결혼한 상대도 상당한 부잣집이었대. 결혼 후 카페, 식당 등 장사를 했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자유로웠고 조직생활을 안 하다보니 졸업한 지 꽤 됐지만 여전히 대학교를 주무대로 인간관계를 영위하고 있던 선배랄까. 학회 행사의 가장 큰 물주는 언제나 이 조기결혼자 선배.
물주가 이 분이었다면 정신적 지주는 따로 있었지. 정신적 지주 선배는 우리 과에서 시간 강사로 일하면서 이제나 저제나 교수 임용을 기다리고 있었어. 1,2학년 개론 수업을 가르쳤기 때문에 학과의 모두가 다 아는, 말빨과 잡학다식의 표본. 재밌고 술 좋아하고 80년대 학번이라 캠퍼스, 운동권의 낭만을 몸소 관통해 온 산증인이었지. 이분 한 마디면 밤늦게라도 모일 추종자가 많았어. 이 둘은 한 해 선후배 사이였고 친했고 그 누구도 이들의 관계를 돈독한 선후배 관계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지. 학회의 많은 부분이 이 둘을 중심으로 굴러갔어. 여름방학, 텅빈 시골 초등학교에서의 6일. 교실의 책상들을 한곳으로 밀어놓고 바닥에 침낭을 깔아 잤어. 교실 두 개를 남자, 여자 취침실로 하나씩 썼고 다른 교실 하나는 책상을 그대로 놓은 채 논문 발표할 때 사용했지. 조리실이 있어 취사도 가능해서 괜찮았는데 샤워가 제일 문제였어.
학교 본관을 나가면 당직실이 있는 별관이 있었고 거기에 샤워 시설이 있었어. 밤이 되면 그야말로 별빛밖에 없는 깜깜한 깡시골이다 보니 본관의 긴 복도를 지나 등나무가 우거진 운동장가의 쉼터를 지나 그 별관 건물까지 가기가 좀 무섭기도 해서 다들 해 지기 전에 샤워했지만 알다시피 여름엔 밤이 늦어도 덥잖아. 선풍기를 틀어 놔도 덥더라. 첫날밤, 일정이 끝나고 누웠지만 저녁 먹으면서 흘린 땀 때문에 찝찝해서 잠을 못 이루고 있다가 아무래도 샤워를 또 해야겠다 싶어서 한밤중에 별관 건물로 향했어. 겁도 없이 혼자. 모기 물릴까 봐 랜턴도 안 켜고 그 깜깜한 곳을 걸었어. 심심하진 않더라. 풀벌레가 어찌나 울어대는지. 그리고 내가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개구린지 맹꽁인지 두꺼빈지 모를 작은 생명체가 내 발목 높이까지 팔딱 팔딱 점프를 해대더라구. 핸드폰에 카메라 기능 탑재가 혁신적이라 여겨지던 시절의 얘기야.
별관으로 향하는 길, 운동장 비품같은 걸 모아둔 듯한 둔덕 모양의 창고가 있고 그 뒤로 나무 몇 그루가 있어서 유독 더 캄캄한 곳에 차들이 세워져 있었어. 선배나 교수 중 자차로 따로 온 사람들도 있었거든. 하얀 차 안에 사람의 움직임이 보이더라. 얼굴의 실루엣을 얼핏 보곤 나는 곧 몸을 숨겼어. 물주와 지주더라. 세상에 그렇게나 절박한 사랑의 행위가 있을 수 있을까? 난 그때 성경험이 별로 없어서 사실 뭘 하고 있는지 첫눈에 알아보진 못했어. 다 벗고 싸우나 싶기도 했으니까. 과격한 듯 하면서도 얼핏 우는 것 같기도 하고. 다음 날부터 곰곰이 봤지. 그저 순진하게 학회 사랑이라고 치부하고 넘겼었는데 그들은 그렇게라도 만날 명분을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 세월이 지나 물주의 막내딸까지 대학을 졸업한 후, 물주는 비로소 이혼을 하고 지주와 함께 살기 시작했어. 오래 기다린 만큼 더는 숨기지 않고. 두 남자는 이제 행복해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