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때 학교 앞에 보세 옷가게가 있었는데 거기 주인 언니랑 친했다. 10미터 밖에서 보여도 바로 눈을 내리깔만한 포스를 풍기는 언니였다. 가수 춘자랑 비슷한 스타일에 화장은 항상 빡센 스모키. 그리고 왼팔에 어깨부터 손목까지 컬러풀한 넝쿨장미 문신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내가 사는 바운더리 안에서 문신이란 조폭 아니면 뱃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고 여겨졌다. 근데 옷은 여리여리하면서 심플한 걸 갖다놔서 자주 갔다. 단골이 되다 보니 언니가 내가 좋아할만한 옷 들어오면 연락도 해 주고 그랬다. 그러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그 동네 갈 일이 없어 발길을 끊었는데 어느 날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번화가에 술집을 열었다며 한번 놀러오라고 했다. 그래서 회사 동료들 10명을 데리고 갔다. '소주단란'이라고 불리는 형태의 술집이었는데 룸이 쫙 있고 각 룸마다 안에 노래방 기계 있고 술 시켜 노는 데였다. 호빠는 아니었는데 서빙하는 사람들이 다 잘생긴 남자들이었다. (사실 호빠 안 가봐서 모른다)
사장 언니가 와 줘서 고맙다며 서비스도 많이 주고 그저 립서비스였는지는 몰라도 '에이스' 웨이터 둘을 우리 룸에 자주 보내 필요한 거 없는지 물어봐 주고 그들이 노래도 한 곡조씩 오며가며 뽑아주고 그랬다. 하하하.
다들 술이 거나하게 됐는데 우리 일행 중에 어떤 언니가 특히 많이 취했다. 그 언니로 말할 거 같으면 미스코리아 지역 예선 입선 경력이 있고 JMS 정명석 '영업부장'(?)들이 영입하려고 눈독 들인 적도 있는, 그래서 한동안 007작전 모양으로 피해다닌 적도 있는 한미모하는 언니였다. 근데 오래 연애했던 남자가 실은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을 결혼식 이틀 전에 알게 되고 깽판난 후 제대로 흑화한 언니였다. 뭐 작은 거 하나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언니.
그 언니가 취해서 화장실엘 간다고 룸을 나섰는데 우리 룸 서빙해 주던 잘생긴 웨이터 하나가 따라붙었다. 딴 뜻은 없었던 거 같고 취해서 비틀거리니까 화장실까지 잘 데려다 주려고. 나도 마침 화장실에 가려고 따라나섰는데 미코 언니가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그 웨이터는 화장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손 씻고 말리고 있었는데 언니는 화장실에 있는 동안 정신이 좀 차려졌는지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거울을 보며 눈밑에 번진 아이라인 정리하고 있었다. 근데 미코 언니 옆에 어떤 여자가 서더니 내가 봐도 노골적으로 손 씻으면서 언니 쪽으로 물을 일부러 탁탁 튕기는 게 아닌가? 뒤이어 화장실 칸 세 군데에서 거의 동시에 여자들이 나왔는데 보아하니 물 튕기는 여자랑 일행인 것 같았다. 하나같이 어디서 한 때까리하게 생긴 포스였다.
이 무슨 원치 않은 일촉즉발의 상황이..!! 나는 속으로 미코 언니가 그냥 무시하고 빨리 그곳을 나오기를 바랐다. 근데 말했듯이 미코 언니는 시한폭탄의 아이콘이었다. 사기꾼 거짓말쟁이 전남친으로 인해 분노와 울분이 많았지만 그나마 젊고 예쁜 데다 아직 생에 대한 끈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겨우 누르고 앞날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얼음판에 발을 딛는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미코 언니는 참지 않지!
잠깐 동안이었지만 내 간절한 기도가 무색하게 미코 언니의 눈빛이 돌변하는 게 공기 중에서도 느껴졌다. 술에 취해 약간 멍텅해졌던 눈빛에는 순식간에 팽팽한 살기가..!! 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래도 참으려 했던 것 같다. 눈을 지그시 감는 것을 내가 봤다. 근데 그 여자가 쐐기를 박듯이 손 닦은 페이퍼타월을 '분명히 일부러' 미코 언니 쪽으로 휙 내.던.졌.다. 젖어서 뭉쳐진 페이퍼타월은 언니가 서 있던 곳 앞에 있던 세면대 안쪽에 날아갔다. 마치 거기가 쓰레기통인 듯이.
하.. 난 평화주의자지만 여기서는 나도 눈이 홱 돌았다. 그치만.. 우리가 쪽수에서 밀리는데 어떡하지. 나 패싸움은 해본 적 없는데. 드라마에서 보던 대로 머리채부터 잡으면 되는 건가? 언니랑 같이 싸워야 되나? 아님 우리 룸에 후다닥 뛰어가서 일행들 데리고 와야 하나? 우리 룸에 건장한 언니들 많은데. 손톱 긴 게 유리하려나? 아쒸 어제 네일했는데. 한순간 오만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이 쉽알년이...!!"
시옷을 된소리가 아닌 [sh] 거센소리 발음으로 한 단말마의 외침이 타일 벽, 타일 바닥, 타일 천장의 큰 화장실에 동굴 속 곰의 울부짖음처럼 울려퍼지고 그 외침의 메아리가 채 다 사라지기도 전에 미코 언니는 그 여자의 아이보리빛 쉬폰 블라우스의 멱살을 잡았다. 미코 언니는 미코의 품격을 잠시 내려놓았다. 미코의 품격은 옘병.. 이건 인간의 존엄성 문제다!!! 우다다다!!!!! 어이없게도 그 순간 난, 미코 언니가 머리채를 잡은 게 아닌 멱살을 잡은 게 좀 멋있다고 생각됐다. 역시.. 반전이 있는 언니야, 생각했다. 피식. 미코 언니는 버건디빛 얇은 골지 펜슬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스커트 위로 드러난 허벅지의 윤곽으로 흡사 말의 뒷다리처럼 힘이 들어가 근육이 잘게 쪼개지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자, 이제 너 죽고 나 죽자다. 그렇게 시비를 걸어대다니 내가 상대해 주지. 언니의 크게 쌍꺼풀진 아름다운 눈이 앙칼진 세모 모양이 되면서 레이저빔이 쏘아져 나왔다.
물 튕긴 여자는 거의 무조건반사적으로 순식간에 미코 언니의 긴 생머리를 홱 낚아채서 뒤로 꺾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니었던지 머리끝을 손으로 한 번 휘감아 손 안에서 풀리지 않게 한 뒤 목이 거의 뒤로 다 꺾이게 하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라...? 근데 잠깐만. 이 년아, 저 년아 오고가는 안 바르고 안 고운 말들 속에서 나는 한 가지를 캐치할 수 있었다. 그들은 초면이 아니었다!!! "아니라니까 자꾸 왜 이 지랄인데!!"라는 미코 언니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내가 니 년 때문에..." 쒸익씩. 미코 언니의 분노와 독함에 맞서 힘과 싸움 기술로는 압도적 우위를 보이던 물 튕긴 여자는 싸움에 이기고 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거의 울고 있는 듯했다. 화장실 칸에서 나온 물 튕긴 여자의 일행들은 사정을 다 알고 있는지 싸움에 참전하지도, 말리지도 않은 채 그저 잠자코 있기만 했다. 에휴..얘를 어쩌지 하는 느낌으로.
패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을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자리를 뜨지도 못한 채 거기 그냥 어정쩡하게 관전하고 있었는데 여자화장실 바로 바깥쪽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안쪽의 소란을 들은 웨이터가 자기가 들어와서 말릴 수는 없으니 사장 언니를 불러왔던가 보았다. 이윽고 사장 언니가 그 특유의 포스를 풍기면서 "아니, 아니, 여기서 왜들 이래?" 이러면서 소매를 걷어부치고 들어왔다. 미코 언니와 물 튕긴 여자는 서로 뒤엉켜서 씨발년아, 씨발년아 하고 있었다. 젊고 예쁜 아가씨 둘이 그렇게 상스럽고 험악하게 싸우고 있는데 사장 언니는 이런 꼴 많이 봤다는 듯이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내가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잊지 못하고 있는 명문장 하나를 말했다.
"자자.. 잘 들어. 술 취하면 너도 씨발년, 나도 씨발년, 우리 모두 씨발년! 따라해 봐. 우리는 모두 뭐다? 씨발년!!"
이러더니 그 둘을 떼어놓고 양손에 한 명씩 붙잡은 채 화장실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비어 있던 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그 안에서 셋이서 얘기하더니 급기야 술까지 시켜서 자리잡고 앉아 본격적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거였다.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 보니 사장 언니를 뺀 나머지 두 여자는 훌쩍훌쩍 울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오잉? 나 사장 언니 리더십에 완전 탄복했잖아.
나중에야 들었는데 이야기인즉슨, 미코 언니랑 물 튕긴 여자는 대학 동기 사이인데 물 튕긴 여자가 대학 시절 동안 짝사랑한 남자가 있었다. 물 튕긴 여자는 대학 내내 내레이터모델 일을 하면서 마트 같은 데 오픈행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불러주는 데는 다 쫓아다니며 죽어라 춤을 춰서 적금을 차곡차곡 넣어 꽤 많은 돈을 모았었고 4학년 여름방학 때 그 적금을 깨 방송 아카데미에 가는 것을 시작으로 아나운서가 되는 꿈을 향한 준비를 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미코 언니는 대학교 3학년 때 미코 지역 예선에 입선을 해서 재학 시절에 이미 교내에서 유명했다. 안타깝게도 물 튕긴 여자의 짝사랑남은 미코 언니에게로 마음이 향했던가 보았다. 아, 어긋난 사랑.
끓어오르는 젊은 피에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마음이 향하는 쪽으로 되든 안되든 사랑 한번 해보는 것 가지고 누가 뭐라 하랴마는 그 남자는 자기 좋다는 여자한테 애매한 스탠스를 유지했던가 보았다. 뿐만 아니라 이용하기까지. 뭔 헛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니느라 그랬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 새끼는 물 튕긴 여자한테 돈을 빌렸다고 한다. 마침 여자는 적금 만기가 되어 예금으로 돌리려고 알아보고 있었는데 딱 한 달만 쓰고 돌려주겠다 했다고 한다. 많이 망설였지만 아직 대학교에 같이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설마 뭔일이야 있겠나 생각했다고 한다. 돈을 빌려주고 받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물론 그 와중에도 그 남자를 계속 짝사랑 중이었다) 어느 날 그 남자의 싸이월드를 염탐하다가 그 남자가 미코 언니랑 데이트를 하기 위해 어디에 가는 중이라는 걸 거의 실시간으로 알게 된 거다.
여자는 절망에 빠져 친구랑 술을 퍼마시고 다음 날 학교에서 창피를 주더라도 기필코 돈을 받아내리라 다짐했는데 그 밤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다급하면서도 체념한 듯한 한 동기의 전화를 받은 것은. 울먹거리는 떨리는 목소리 저변에 이런 극적인 상황을 가까운 지인의 일로 겪는 것에 대한 묘한 흥분이 옅게 깔려 있는 그 목소리. 인간이라는 것은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말로 단정하기엔 극도로 복잡다단한 존재다. 가까운 이의 비극을 보면서도 100%의 순수한 슬픔은 없는 것이다. 물론 감정의 대부분은 슬픔이겠지만 저 비극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란 것에 대한 안도, 비극의 당사자가 혹여라도 전에 서운한 행동을 했던 게 있었다면 그딴 식으로 살더니 결국 끝이 안 좋구나 하는 조소, 비극적인 일을 겪은 이의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뭔가 드라마 속 등장 인물이 된 듯한 자기연민과 일종의 비뚤어진 우월감까지. 그런 복잡한 심경이 담긴 목소리는 짝사랑남의 갑작스런 사고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음주운전자가 일으킨 교통사고였다. 물 튕긴 여자는 그 길로 짝사랑남이 옮겨져 있다는 병원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짝사랑남은 병원에서 열흘을 버티다 죽었다. 창창한 아들의, 형의, 오빠의, 친구의, 동기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물 튕긴 여자는 감히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다. 그 돈. 그 피같은 돈. 20대 초반의 많은 주말을 갈아넣어 만든 그 돈. 그 상황에서 받을 돈 생각을 하다니 세상 나쁜 년이라고 욕하려나. 아니, 욕 먹는 게 두려웠던 건 아니다. 그저 한 인간으로서 양심에 찔려서였다. 자신한테 떳떳하지 않아서였다. 짝사랑했기 때문에 많이 슬프기도 했다. 하.지.만. 그 돈. 몇 번이나 말이라도 해보려고 짝사랑남의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가 아직도 울고 있었던 것만 같은 힘 없는 그의 어머니나 동생의 잠긴 목소리가 수화기 저 너머에서 들려올 때면 조용히 전화를 끊기를 여러 번.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증빙같은 걸 마련해 놓지도 않았던 거다. 같이 은행에 가서 찾아서 건네줬던 거다. 어리석게도. 갑갑하고 후회되고 슬프다가 결국엔 화가 났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그 화는 엉뚱하게도 미코 언니에게로 향했다. 미코 언니를 만나러 가다가 사고가 났으니까.
어떠한 울분은 그게 바른 방향이 아니란 걸 알아도, 그게 뭘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걸 알아도 그저 화풀이 대상이 필요하기도 하다. 여자는 멘탈이 잡히지 않으니 열정과 붙임성과 밝음도 점차 사그라들었고 그러다 보니 꾸준히 들어오던 내레이터모델 일도 뜸해졌다. 그리 한순간에 잃으니 의욕도 사라졌다. 많은 것들이 하나씩 꼬이고 꼬여 바라 마지않던 방송 아카데미도 결국 못 갔다. 여자는 미코 언니를 오래 원망했다. 차후 동기들에게 전해들어 짝사랑남이 미코 언니랑 데이트하러 가는 길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음에도 그 미움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저 원망하고 미워할 대상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마음 깊이 미코 언니를 질투하고 있었는지도. 짝사랑남은 동기 여러 명과 조 과제 준비를 하러 가는 길이었고 그 조에 미코 언니가 포함되어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저 혼자 들떠 싸이월드에다 부풀려 허풍을 친 거였다.
물 튕긴 여자의 한은 죽은 자에게나 아니면 고통스러울만치 순진했던, 또한 알량한 양심 때문에 유족들에게 싫은 소리할지언정 눈물을 머금더라도 스스로 손해를 입고야 마는 자기 자신에게 향했어야 했다. 그 둘은 오해와 앙금을 털어내지 못한 채 졸업했고 우연히 그날 그 주점의 화장실에서 재회를 한 거였다.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듯이. 특히 아직 미숙한 나이에는 그리 되기 쉬운 거여서, 여자는 막연하나마 어릴 때부터 품었던 꿈인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지역 방송사에 지원했으나 번번이 떨어질 때마다 그리하여 당장 벌기 위해 작은 회사에 들어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그 돈을 잃지 않았더라면 하고 생각하곤 했다. 모든 불행이 그리로 수렴됐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술에 취했던 그날, 역시 술에 취한 미코 언니를 마주친 거였다. 그 둘은 사장 언니 앞에서 그렇게 털어냈다.
우리 인간은 가끔, 늘 곁에 있는 사람한테 못했던 말들을 처음 본 사람에게 털어놓기도 한다.
미스코리아 지역 예선에 입선했을 때 드높이 반짝였던 미코 언니의 삶도 이후 평탄치는 않았다. 본선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고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만큼 실망도 컸다. 내심 연예계 진출을 노렸었으나 녹록치 않았고 다분히 보수적이었던 언니의 아버지는 이도 저도 아니게 나이만 먹느니 아직 미코 예선 입선이라는 후광이 남아있을 때 얼른 결혼하라고 성화였다. 그렇게 만난 나름 번듯해 보였던 남자는 언니를 철저히 속인 유부남이었다. 결혼 파투나고 얼마간의 대인기피 증세까지 생겼다. 물 튕긴 여자는 완전히 감정 이입해서, 미코 언니에게 그 새끼 지금 어디 있느냐고 했다. 그걸 그냥 넘어갔냐고. 미코 언니는 괜히 시끄럽게 만들었다가 되려 그 남자의 아내에게서 상간녀 딱지라도 붙을까 봐 전전긍긍했을 뿐이다. 이미 결혼 준비도 다 마친 상태였던 터라 금전적 피해도 컸고 결단코 미코 언니는 남자가 유부남이란 걸 몰랐지만 그런 일의 특성상 한국 사회에서는 피해자여도 휘말렸다는 자체로 낙인이 찍히기도 하니까.
그날 밤 그 우연의 회동 이후 미코 언니랑 아나운서가 꿈이었던 여자는 서로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사이가 됐다. 얼마 후 아나운서가 꿈이었던 여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아하고 세련된 아나운서 스타일로 한껏 꾸미고서 미코 언니가 결혼할 뻔했던 그 유부남의 직장에 찾아가 회사 로비 데스크에다 그 남자를 찾아왔다고 말했다. 남자는 의아하고 약간은 우쭐한 기분으로 상기된 얼굴을 한 채 엘레베이터에서 내렸고 점심시간 약간 전이라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그 로비에서 여자는 유부남이 총각 행세하며 여자 기만하고 다니는 짓 그만두라고 쏘아붙였다. 남자는 얼떨떨해져서 그저 서 있을 뿐이었고 티는 안 내도 이 무슨 재미난 상황이..! 하며 일동정지해 복화술과 눈짓으로 어머 어머 하고 있는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이 남자가 내 친구한테 혼인빙자간음한 놈이에요!!" 소리지르고 유유히 사라졌다. 으레 그렇듯이 소문은 돌고 돌아 여자가 실제 내뱉은 말보다 훨씬 더 부풀려졌고 결국 남자의 아내 귀에까지 들어갔다.
미코 언니는 미코 준비하면서 배운 자세, 발음, 교양, 면접 노하우 등을 아낌없이 나눠주어 아나운서 언니가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해 줬다. 코치와 인맥 등도 나눠줬다. 먹고는 살아야 되니 직장 생활을 하면서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녹록치 않았지만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던 언니는 열심히 노력했다. 처음엔 쇼핑몰의 장내방송 아나운서가 됐다. 미아 찾을 때나 폐장 시간 안내 등이 주된 업무였지만 기쁜 마음으로 일했고, 경력을 쌓고 쌓아 몇 년 후 지역 방송국에 입사해 라디오 교통방송을 하게 됐다. 그러다 전국구 방송이었던 한 노래경연대회의 지역 예선 사회를 맡을 기회를 얻었고 거기서 우연히 공영방송의 한 관계자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연애 후 결혼했다. 미코 언니는 집안의 반대가 있었지만 고집을 피워 이탈리아에 가죽공예를 배우러 갔고 그곳에 있는 동안 유럽 여행을 하다가 영화 비포선라이즈처럼 기차 안에서 미국 남자를 만나 대륙을 오가는 연애를 하다가 지금은 이탈리아에서 행복하게 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