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꽤 오래된 고등학교를 다녔다.
신관, 구관, 강당이자 체육관 건물이 있었고 후문 옆에 당직실이 있는 작은 건물 하나, 매점과 무용실과 음악실이 있는 건물 하나, 숙직실 건물 하나, 문방구 건물 하나가 있었다. 신관, 구관이라고 따로 불렀으나 신관 건물조차 어찌나 오래됐던지 한 층에 10개의 교실이 있는 가로로 넓은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건물 안에 화장실이 하나도 없었다.
화장실은 학교 전체를 마주봤을 때 가장 왼쪽과 가장 오른쪽에 동굴 모양으로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진짜 말 그대로, 굴다리 아래를 메워 만든 동굴같은 화장실이었다. 대낮에도 컴컴했고 작은 소리 하나에도 메아리가 울렸고 시멘트가 발라져 있던 바닥은 언제나 축축했으며 밤 12시에 보게 되면 지나간 역사 중 이 학교 학생이었다가 학생 신분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어떠한 연유로 죽은 원혼들이 똑바로 마주본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군데군데 때가 묻은 황량한 모양새의 거울이 있었다. 학교 바로 뒤에는 산이 있었다.
동굴 속 같은 그 화장실은 대낮에도 음산한 기운을 풍겨서 우리들은 기다려야 되더라도 입구 쪽 몇 개의 화장실 칸만 사용했을 뿐 안쪽 칸은 잘 사용하지 않았다. 교사용 화장실은 숙직실 건물 안에 있었기 때문에 교사들이 동굴 화장실로 오는 일은 없었다.
언젠가 누군가 여자들은 왜 화장실 갈 때 친구랑 같이 가냐고 묻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나의 고등학교에서는 그게 그냥 여자들끼리의 어떤 우정에 대한 한 예가 아니라 안전과 관련된 인간으로서의 기본 배려에 대한 문제였다. 대낮에도 혼자라면 께름칙한 그곳.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동안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면 둘씩 셋씩 무조건 무리지어 가는 게 룰이었다. 짝꿍이랑 싸웠더라도 화장실 좀 같이 가 달라는 요청에는 웬만하면 아랫입술 지그시 깨물더라도 일어나 같이 가 주는 게 보이지 않는 룰이었던 곳.
그 화장실은 컴컴해서 항상 불이 켜져 있었는데 전기도 자주 나가 가끔은 야자 시간에 껌껌한 그곳을 더듬더듬 들어가야 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다.
고2때 내 교실은 신관 건물 안에 있었는데 신관에서는 오른쪽 동굴 화장실이 더 가까웠다. 신관을 나와 매점과 무용실과 음악실이 있는 건물을 지나 방송실이 있던 강당 건물을 지나면 비로소 화장실에 닿을 수 있었다. 밤에는 매점 건물과 강당의 불이 다 꺼져서 화장실에 가는 길도 무서웠는데 그나마 내 고2 1학기 중간고사 즈음에 그 길에 자동판매기가 하나 생겨서 그 자판기가 뿜어내는 희끄무레한 빛이 의지가 됐다. 100원을 넣으면 밀크커피, 블랙커피, 코코아, 율무차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학교 바로 뒤에 있던 산을 넘어가면 남자 고등학교가 있었다. 그 남학교는 기독교 미션스쿨이라서 아침마다 예배 방송을 했는데 어떤 날은 그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기도 했다. 완만한 산의 능선은 우리 학교의 오른쪽 동굴 화장실 쪽으로 내려와 화장실의 지붕과 맞닿아 있었다. 그 남학교의 학생들이 산을 타고 넘어와 산 능선에서 우리 학교 아이들을 구경하거나 흡연 등 금지된 짓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시절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과 저녁 시간에 우리들은 자판기 근처나 매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목 재래시장처럼 활기가 넘치던 학교는 야자가 시작되어 매점이 문을 닫으면 일순 물 속처럼 고요해졌다. 야자 감독을 맡은 선생님들을 제외하곤 선생님들도 다 퇴근하고 예체능을 하거나 아픈 아이들도 다 집에 가고 낮에 비해 적은 수의 아이들만 남았다. 음악실의 불은 저녁 7시쯤 꺼졌는데 음악 선생님이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퇴근하고 나면 야자하던 아이들은 둘씩 셋씩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나와 깜깜한 교정의 곳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들으며 잡담을 하곤 했다. 음악 선생님은 지금은 작고한 연극배우 윤석화 님과 학교 때 친구였다는 게 인생 최대 업적인 분이었는데 미혼이었고 아름다웠고 깐깐했고 히스테릭했다.
어느 날부턴가 나는 우리 반의 한 아이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마다 율무차를 마시는 아이. 언젠가부터, 왜 저러지 싶을 정도로 많은 율무차를, 즐기는 게 아니라 어떤 의무감 같은 것에 휩싸인 듯이, 약을 먹듯이 마시는 아이.
그 때의 나는 꿈에도 몰랐다. 그 아이는 유산을 바라는 마음에 집요하리만치 율무차를 마셔댔다는 것을. 그 아이에겐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한참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커피를 못 마시던 그때의 내게는 우리 학교의 자판기 메뉴 중에서 코코아 아니면 율무차밖에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추운 날이면 나도 가끔 율무차를 마시기도 했다. 율무차가 임신 초기에 자궁 수축 등을 일으켜서 유산, 조산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열일곱 살의 내가 알아야 하는 정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아이는 어떻게 알았을까? 절박했던 거겠지. 조용하고 수수해서 눈에 잘 띄지도 않던 그 아이에게 그런 사정이 있다는 걸 사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앉은 순서대로 한 문단씩 읽게 하시던 국어 선생님의 수업 스타일이 아니었으면 그 아이의 목소리도 잘 몰랐다. 도시락도 항상 혼자 먹던 그 아이. 야자 시간에도 혼자서 화장실에 가곤 해서 그 점 때문에 오히려, 비로소 눈에 띄었던 그 아이.
어느 날 그 아이는 야자가 시작되어서 조용해진 교정을 홀로 거닐고 있었다, 율무차를 한 잔 들고서. 동굴 화장실 쪽으로 가고 있었으나 그저 교실을 떠나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스름이 지고 있었다. 산 바로 아래 있던 학교는 해가 빨리 졌고 자판기만이 쓸쓸히 휘황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 선생님이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음악 선생님이 곁에 다가와 어깨를 툭 칠 때까지.
왜 하필 음악 선생님이 그 아이를 보게 됐던 걸까. 하필이면 그 순간에.
우리 학교의 체육복은 흰 티셔츠에 밝은 민트색 바지였는데 그 아이는 교복 윗도리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게 문제가 됐던 건 아니다, 야자 시간에는 편하게 있고 싶어 많이들 그렇게 했으니까. 그렇지만, 그 아이가 그냥 교복 치마를 입고 있었으면 음악 선생님은 그저 야자시간에 돌아다니지 말고 얼른 교실로 돌아가라는 한 마디 훈계만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학교 교복 치마는 어두운 갈색이었기 때문에 그 아이가 만약에 그때 교복 치마를 입고 있었다면 그렇게 표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는 다리 사이에서 피가 배여 나와 밝은 민트색 체육복 바지의 가랑이를 다 적시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깐깐하고 히스테릭한 음악선생님은 그저 한숨 한번 쉬고 무시한 후 퇴근을 재촉했어도 됐다. 가르치는 학생들한테 그다지 따뜻한 선생님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 아이는 자신이 특별하게 주시하는 아이도 아니었으니까. 그날은 왜 그랬을까. 같은 여자로서 그래도 말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겠지. 그게 품위니까.
음악선생님은 그 아이를 불러세워 아랫도리 상황을 설명해 줬다. 칠칠치 못한 학생 하나, 생리 관리도 잘 못하는 학생 하나한테 그저 한 마디 해 주고 가던 길 가려던 음악선생님은 그 아이가 갑자기 몹시 당황하여 울먹거리자 뭔가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음악선생님은 잠갔던 음악실의 문을 열어 그 아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 아이는 그렇게 음악실에 한참 있다가 나왔다. 곧 음악 선생님도 퇴근했다. 또각또각.. 물 속 같이 고요한 교정에 황량하고 단호한 하이힐 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그 아이는 교실로 돌아와 야자 시간 내내 엎드려 있다가 하교했다.
다음 날, 그 아이는 교무실로 담임한테 불려갔고 며칠 후부터 조금씩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임신했었는데 유산했다고.
임신했다는 것도 놀라웠고 유산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있는 듯 없는 듯 했던 그 아이는 이제 어디를 가나 수군거림의 대상이 됐다. 조용하던 아이가 더 조용해졌다. 상황이 그러하면 결석을 할 법도 한데 그 아이는 매일 학교에는 나왔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 저녁 시간이면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수군거림을 피해 동굴 화장실의 안쪽 가장 깊숙한 칸에 들어가 있다가 다음 수업 시작 종이 울리면 비로소 나와 교실로 향하곤 했다. 대낮에도 깜깜하고 오래된 이끼 냄새가 나는 그곳이 한동안 그 아이에겐 안식처가 됐다.
그 아이가 어릴 때 술주정뱅이였던 그 아이의 아버지는 취한 채 도로변에서 잠들어 객사했다. 지적장애와 언어장애가 약간 있던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이사를 자주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중3때 어느 단독주택집에 셋방을 구해 꽤 오랫동안 정착할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사는 동안 그 아이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당시 아주머니들이 부업으로 많이 하던 밤 깎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손이 야무지고 빨라 일감이 날마다 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밤 껍질 등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일이기도 했고, 깎은 밤의 표면이 마르지 않도록 큰 양동이에 물을 가득 받아 담아놔야 했고, 몇 킬로당 얼마 이랬기 때문에 다 깎은 밤을 바로바로 치울 수도 없어서 셋방은 언제나 얼마간은 지저분했고 드나드는 사람도 많았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그러한 이유 때문에 셋방에서 쫓겨날까 봐 늘 노심초사였는데 다행히 주인집 아주머니는 넓은 아량을 가진 분이었다.
그러나, 주인집 아들은 그렇지 못했다.
산 너머의 남학교에 다니던 주인집 아들은 그 아이를 가끔 산으로 불러냈다. 그럼 그 아이는 야자시간에 몰래 교실을 빠져나와 동굴 화장실의 맨안쪽까지 걸어들어가 그 안쪽 끝에 있던 시멘트가 허물어진 작은 구멍을 통해 산과 학교를 구분짓고 있던 철제 울타리까지 가 닿았고 오래돼 곳곳이 부식된 채 끊어져 있던 짙은 녹색 철제 울타리를 통과해 산에 올라갔다.
주인집 아들은 그 아이에게 카세트테이프나 열쇠가 달린 수첩같은 걸 선물했다. 그 아이가 좋아하던 가수가 커버모델로 나온 연예잡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가난했던 그 아이에겐 과분한 선물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쭉 가난하게 살아왔던 사람에겐 경제적 풍요라는 것이 대체 불가능한 열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 경제적 풍요라는 걸로 본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이 기껏해야 7,8천원짜리 선물이라고 할지라도. 그 아이는 주인집 아들이 부모의 자가용을 타고 등교하는 걸 멀거니 바라보기도 했고 은은히 풍겨오는 통닭이나 갈비찜 냄새를 셋방에 앉아 맡기도 했다.
주인집 아들이 다정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은연중에, 어쩔 땐 직설적으로, 내 마음에 안 들면 우리 집에서 쫓겨날 줄 알라는 메시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쩔쩔맨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셋방의 출입구는 따로 있었지만 대문은 하나였던 것이다. 대문을 넘어 자그마한 마당을 가로질러 주인집으로 가는 현관이 있었고 그 옆으로 돌아가면 셋방으로 가는 출입구가 있었다. 몇 킬로씩 정량에 맞게 그물 봉지에 묶여 물이 든 양동이에 담긴, 꽤 무거운 밤을 가지러 업자들이 수시로 대문을 드나들었고 아이의 어머니는 그걸로 주인집 눈치를 많이 보고 있었다. 어눌한 발음이지만 힘주어 아이에게 항상 주의를 줬다.
"주인집 눈 밖에 날 일은 하지 마라. 이만한 주인 또 찾기 어렵다."
이미 아주 어린 나이부터 가난과 그로 인한 원치 않은 이사를 겪어왔던 아이에게 그 말이 주는 압박은 각별했다.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주인집 아들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할 정도로.
그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에게 그런 주의를 줄 때, 그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그저 인사나 잘하고 집에서 큰소리 내지 말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주인집 아들이 딸을 유린할지도 모르고 자기가 한 바로 그 말 때문에 딸이 폭력 앞에서도 무력해질지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저런 부잣집 아들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 애를, 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만성화된 패배자의 삶. 그럴 리가 없다, 라고 덮어놓고 생각해 버리는 삶. 그게 술주정뱅이에 무능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했던 남편으로부터 기를 쓰고 지켜냈던 하나뿐인 딸일지라도. 말간 얼굴로,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책가방을 메고, 빳빳하게 다림질된 교복을 입고 자가용으로 등교하는 주인집 아들이, 공부도 잘한다는 주인집 아들이 제때 제대로 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왜소하고 언제나 얼마간은 우울해 보이는 추레한 자신의 딸을 어떻게 해볼 흑심을 품는다는 것 자체에 대해 그 아이의 어머니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는 처음엔 주인집 아들의 관심이 신기했다. 아버지나 남자 형제가 없이, 어머니랑 단칸방에서 살아왔던 아이에게 '남자'라는 것은, 더구나 선물을 건네는 남자라는 것은 생소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남자애들도 있던 초등학교에 다니는 6년 동안에도 초라했기 때문에 동정의 눈길을 간혹 받았을지언정 다정하고 자연스러운 관계는 없었던 것이다. 언제나 우악스럽게 이름이 호명되어 무료 우유 급식을 받는 아이였기 때문에.
주인집 아들은 등굣길 대문을 나서면서 뒤에서 셋방 문을 열고 나오는 그 아이를 힐끗 보고는 "여덟 시"라는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아버지 차에 홀랑 올라탔고 이내 차는 휘익하고 출발했다. 차가 일으킨 먼지 속에 잠깐 서 있던 아이는 대문을 닫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같은 방향인데 한번쯤은 태워줄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서 문득 야속하기도 했다. 터덜터덜 걸으면서 굴욕적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래도 나를 좋아하는 거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에 그 아이가, 그때 혹시라도 내게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한 번이라도 물어봐 줬다면 나는 가지 말라고 말해줬을 것 같다, 온힘을 다해서. 나도 세상을 잘 모르는 미성년자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 정도는 알았을 것 같다.
너를 좋아하면, 너랑 영화관에 가지 않겠냐고.
너를 좋아하면, 너랑 떡볶이를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너를 좋아한다면, 너랑 스티커 사진을 찍지 않겠냐고.
너를 진짜로 좋아하는 게 맞다면, 주말에 밝은 데서 만나 산책하지 않겠냐고.
꽃이나 구름이나 바다나 혹은 하다 못해 예쁜 문구류를 보러 팬시점 같은 데 가지 않겠냐고.
그렇게 깜깜해져서야, 위험을 무릅쓰고 산에 오르게 해, 도둑이나 간첩같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떳떳치 못한 짓이라도 저지르는 것처럼, 그렇게 만나 같이 있다가, 야자 시간 때우다가, 야자 시간이 끝나기 전에 시치미 뚝 떼고 교실로 돌아가 각자 하교하고, 집 근처에서 혹시 다시 만나면 모르는 사람 대하듯 데면데면하지는 않을 거라고.
안타깝게도 그 아이에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없었던 것 같다. 조언을 구할 선배나 어른도 없었던 것 같다. 지적장애와 언어장애를 타고나, 스스로 약자가 되기를 선택해 왔던 그 아이의 어머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쥐죽은 듯 살고 싶어했다. 누구한테라도 하루빨리 책임을 떠넘기고 싶어했던 부모에 의해 팔려가듯 어린 나이에 결혼해 술주정뱅이 남편으로부터 맞으면서도 아이만큼은 지켜냈지만, 그 자신이 그런 걸 보고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에게 자존감을 높여 준다거나 세상에 대한 바른 잣대를 세워 준다거나 좋고 싶음을 분명히 밝히는 강인함을 심어 준다거나 그런 건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곳에서 끼니 거르지 않고 학교에 보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엔 그마저도 하지 않는 부모도 많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가 아는만큼 세상을 볼 수 있고 자기도 접해보지 않아 아예 모르는 세계에 대해서 왜 모르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인집 아들은 그 아이를 산으로 불러내 사춘기 소년이 갖고 있던 호기심을 드러냈다. 주말의 명화나 불온하다며 금지돼 있던 일본 만화책 따위로부터 틈틈이 몰래몰래 보고 배운 행위들. 그런 것들은 자주 시청자나 독자의 상상에 어느 정도 기대고 있어 오히려 더 선정적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그것이 거짓일지언정 달콤한 말로, 또 때로는 무시와 협박을 바닥에 깐 강압적인 말로, 주인집 아들은 그 아이의 교복 셔츠 단추를 풀고 치마 아래로 손을 넣었다. 정작 그런 후에는 자신도 그 다음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 끝은 떨리고 망설이고 같은 자리를 맴돌며 까딱까딱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날, "여덟 시"라고 선언하듯 내뱉고 총총 사라진 그 날, 주인집 아들은 예습을 빵빵하게 하여 의기양양하게 수업을 기다리는 학생처럼 자신감과 대담함이 충만했다. 주인집 아들에게 그 아이는 그저 담력 테스트를 할 수 있는 장난감에 불과했던 것일까. 나중에 이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가족들이랑 함께 간 유원지에서 해 봤던, 두더지잡기 게임이 생각났다. 한없이 한없이 있는 힘을 다해 사정없이 내려쳐야 했던 그 오락성 기계. 내려쳐도 웃는 얼굴로 다시 얼굴을 들이밀던 그것. 그러다 돈에 따른 할당된 시간이 지나면 이내 모든 고개를 다 기계 속으로 집어넣어 다시는 올라오지 않던 두더지들.
주인집 아들은 그 아이에게 나무를 잡고 서라고 했다. 소나무와 전나무가 많았던 그 산은 흙에 뾰족한 침엽수의 잎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교복 블레이저를 바닥에 깔아도 안감과 섬유 조직을 뚫고 뾰족한 잎이 살을 따갑게 했던 것이다. 어둠이 내린 서늘한 공기 속 그 따가운 감촉. 그 아이는 시키는 대로 순순히 둥치가 큰 나무 하나를 잡고 어정쩡하게 섰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주인집 아들이 치마를 들춰 올리고 팬티를 확 잡아끌어내리자 얼른 든 생각은 팬티가 젖은 흙에 더럽혀지지 않게 황급히 주워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발에 밟히고 진흙이 묻어 더러워진 팬티를 다시 주섬주섬 주워 입기는 싫다는 생각 뿐.
끔찍하게 민망하고 부끄럽고 무엇보다도 아팠다. 무릎이 절로 꺾여 주저앉을 정도로. 키가 작은 그 아이를 선 채로 유린하기에 여의치 않았던 주인집 아들은 '다리를 좀 이렇게 해 봐', '조금 더 이쪽으로' 이런 말들을 하며 낑낑대더니 결국은 그 아이가 엎드려 뻗쳐 자세로 바닥에 무릎을 대고 엎드리게 했다.
헉..헉..헉...
아이는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는데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인집 아들은 자기 흥분에 못 이겨 거친 숨소리를 냈다. 그 시간이 길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피가 조금 나왔고, 아이는 웬일인지 수치스러웠다.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으나, 또래에 비해 생리도 늦게 시작했었고 누구를 사귀어 본 적도 없는 데다 키스도 못해 봤는데 그렇게 첫경험을 해 버렸다는 것이 허무했다. 대단한 걸 바랐던 건 아니다. 그저 막연하게, 따뜻하고 다정하고 숭고한 것이겠거니 했던 것이다. 최소한, 포근한 이불 위에서. 우습게도 그 일을 겪고 나서야 아이는 조금 용기가 생겼다.
그날 이후로 그 아이는 주인집 아들을 최대한 피해 다녔고 혹시 우연히 마주치게 되어 주인집 아들이 어떤 신호같은 걸 보내와도 그냥 무시했다, 텅빈 눈으로. 주인집 아들은 아이 어머니 앞으로 온 고지서같은 것을 우편함에서 꺼내 일부러 셋방에 손수 가져다 주며 아이의 동태를 살폈다. 속도 모르는 아이의 어머니는 훤칠하니 서글서글하게 잘생겼다며 주인집 아들을 칭찬하곤 했다.
한 번도 자기의 감정에 대해 질문을 받아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은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자기의 감정을 자기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그러한 상태는 어느 정도는 신체적인 작용과도 연관이 있어서, 아이는 자주 배가 고프다거나 목이 마르다거나 하는 것도 잘 느끼지 못했다. 언어가 되어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 무수한 감정들은 안으로 안으로 침잠하여 아이를 조금씩 갉아먹었다. 한눈에 보이지 않는 구석이라곤 없는 자그마한 단칸방에서, 아이의 어머니가 손을 빠르게 놀려 밤을 깎는 동안 아이는 외로웠다.
그래도 아이는 살아보려 했던 것 같다. 우리 학교에는 구관 중앙계단 2층 층계참에 상담 편지 우체통이 있었는데 이른 아침 그곳에 편지를 넣는 아이를 본 사람이 몇 있었다. 학교에 상주하는 것은 아닌 상담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 선생님이 한번씩 수거해 가셔서 읽으시곤 따로 답장을 해 주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쩌면 그 아이는 최선을 다해 손을 내밀어 보았을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것은, 나중에야 알았지만 상담 선생님은 그즈음 마침 일신상에 사정이 있어 당분간 우리 학교 방문을 못하셨다.
음악 시간이었다. 연극배우 윤석화 님과 학교 때 친구였다는 게 인생 최대의 업적인 나이든 미혼 음악 선생님은 그날따라 짐짓 근엄한 얼굴로 '정숙한 여자'로서의 처신과 예의범절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다. 오버스러운 서울 사투리로 윤석화 님과 출발선이 같았는데 윤석화 님은 유명세를 얻고 잘나가고, 자기는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자조적으로 농담을 섞어 말하기를 좋아하는 그 선생님은 생전 그런 적이 없다가 그날따라 수업시간 거의 다를 할애해서 정숙한 여성으로서의 품위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하품을 참으며 듣고 있던 반 아이들은 어느 새 그 아이에 대해 수군대기 시작했다.
음악 선생님은 악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당시로서는 평균 한참 위의 교육을 받았으나 삶에서 찾아왔던 몇 번의 기회를 날려 버리고 성에 안 차는 직업을 가지고 홀로 살아가고 있던 그 선생님은 좀더 깊이 생각해 보고 행동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선의를 갖고 있었다 할지라도, 타이밍이 잘못되었다. 혹시라도 그 아이의, 하다 못해 젊음을 질투해 못살게 굴려는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그런 식의 훈계는 하면 안되었다. 누가 봐도 그 아이를 겨냥해서 하는 소리라는 게 명명백백한 그런 식으로는.
아이는 잠자코 앉아 있기만 했다. 시선이나 수군거림 따위 초월한 표정으로. 그리고 그날 저녁, 야자시간에 홀로 교실을 나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이는 그 길로 사라졌고 이튿날 아이의 어머니에 의해 실종신고가 됐다.
실종 신고를 했지만 경찰 측에서는 자발적 가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면 아버지를 찾아갔거나.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가 아버지를 찾아갔을 리는 없다고 말했지만. 경찰 측에서는 담임 선생님에게 연락을 해서 몇 가지 질문을 했고 자발적 가출일 수도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더 기울게 됐던 것 같다. 물론, 경찰 측에서는 그들의 노련한 감각과 경험으로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겠지만 특별히 어떤 '수사'가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휴대폰이나 cctv가 흔히 있던 시대가 아니니 수사라는 것은 목격자나 주변인들의 진술에 많이 의존을 했어야 했는데 그 아이는 삶의 많은 시간을 침묵 속에 지내왔던 것이다, 마음을 터놓는 친구가 하나도 없이.
몇 주가 지나가고 그 아이는 학교에서도 그 존재가 지워져 갔다. 한때 존재했었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중간고사나 소풍, 매점에 새로 들어온 신상 과자, 국사 선생님의 결혼 소식 등 사이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러던 중, 나는 주번이 되었는데 마침 가장 친한 친구와 같이 주번이 되었다. 우리는 주번을 핑계로 아침에 아주 일찍 학교에 와서 주번의 의무는 하는둥 마는둥 깔깔거리며 교정 여기저기를 순찰하다시피 돌아다니다가 무슨 연유에선지 동굴 화장실의 가장 깊숙한 칸들을 하나하나 열어보게 됐다.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는 그곳. 화장실은 입구에서부터 두 개의 통로로 나뉘어져 있었고 초입에 양옆으로 때 묻은 거울이 벽에 붙어 있고 세면대가 있었다. 각 통로마다 10개의 칸이 있었다. 입구 쪽에서부터 대여섯 개의 화장실 칸만 사용되었다. 밖에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어둡고 축축하고 냄새나는 그곳. 오래된 청소 도구가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는 안쪽의 칸들을 지나 통로 왼쪽 가장 마지막 칸 앞에 섰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언뜻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밖에서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등교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둘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용기를 내 그 칸을 열어 보았고 그 곳에서 뜻밖에도 그 아이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 학교의 화장실에는 양변기가 아니라 쪼그려 앉아야 하는 좌변기가 있었는데 배수 부분이 고장난 것인지 누렇게 바싹 말라 있는 그 칸의 좌변기 위를 가로질러 등받이가 부러진 걸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걸상 위에는 입구가 가지런히 접힌 자그마한 종이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놓여 있는 모양새로 보아 누가 잊어버리고 간 것이 아닌, 오히려 누군가 찾아주기를 기다리며 일부러 그렇게 놓여있는 듯했다. 종이 봉투 안에는 자물쇠가 달린 다이어리가 있었다. 자물쇠에 열쇠까지 꽂힌 채로. 표지에는 그 아이의 이름이 반듯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나와 친구는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라 그대로 놓고 그곳을 나왔다.
하루 종일 그 다이어리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같이 주번이라 종일 붙어 다녔던 나와 친구는 야자시간 즈음 결정했다. 읽어보기로. 어쩌면 그 아이는 비명을 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선생님께 줘버리면 그대로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읽기로 약속했다. 다 읽고 나서 담임 선생님께 드리기로. 집으로 가지고 가서 읽었다. 그날 밤 나는, 많이 울었다. 다음 날, 이제 네 차례라며 친구에게 다이어리를 건넸는데 친구는 부주의하게도 화학 시간에 교과서와 공책을 책상 서랍에서 꺼내면서 다이어리를 같이 꺼내게 됐고 그 찰나는 화학 선생님의 눈에 띄였다. 하고 많은 선생님들 중에 하필이면 화학 선생님의 눈에 띈 것은 큰 불운이었다. '독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화학 선생님은 이사장의 딸이었고 교장 선생님과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실력이나 자격이 안되는데 이사장의 딸이라는 이유로 교사로 재직 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소문을 의식해서인지 별명에 걸맞게 표독스러웠다, 학생에게도 동료 교사에게도. 화학 선생님은 처음에는 수업 시간에 어디 딴짓거리하려고 다이어리를 꺼내냐 감히 내 시간에, 이런 정도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당시 학교에선 같은 연예인을 좋아하는 아이들끼리 같이 다이어리를 꾸미는 게 유행이었다.
화학 선생님은 다이어리 표지의 이름을 힐끗 보곤 잠시 얼굴이 굳어지더니 "이건 압수"라는 짧은 한 마디를 내뱉고는 이내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이 끝난 후 친구는 교무실로 호출되었다. 다음 수업 시작종이 울렸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친구는 다음 수업이 30분이나 진행되고 나서야 교실로 조용히 돌아왔다. 쉬는 시간에 같이 칠판 지우개를 털며 물어보니 교장실에까지 불려 갔었다고 한다. 지독하게 추궁하더라고. 친구는 정의감에 가득 찬 얼굴로 "그래도 나 네 이름은 안 불었어. 넌 내 덕에 화학년이랑 교장한테 안 불려가는 건줄 알고나 있어"라고 말했다.
응, 그건 고마운데...
다이어리는?
그건 어떻게 되는 거야?
화학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이 적절한 조치를 취해 주신대?
경찰한테 전달해 주시겠지?
아님 그 아이 어머니한테라도?
그 안에 세상 반듯한 글씨로 꾹꾹 눌러 담은 그 모든 사연이 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건 아니겠지......
친구는 해맑게 되물었다.
왜? 무슨 사연이 있었는데?
그 후로 오랫동안, 이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비겁했던 것일까?'
하지만 한편으론 그때의 나를 좀더 너그러이 봐주고 싶기도 하다. 네가 뭘 더 할 수 있었겠니,하고.
다이어리에는, 궁극적으로는 '자발적 가출'임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범죄 연루'냐 '자발적 가출'이냐만이 염려의 요지라면, 자발적 가출이 맞다. 그 아이는 임계점에 도달했던 것이다.
하나만 말하자면, 그 아이는 주인집 아들을 사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