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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chu Pie Sep 14. 2020

나의 자신감에게 쓰는 편지

정신 차려 이 친구야

나는 털털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것이 당시의 여자 친구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33일 이벤트, 100일 이벤트 따위는 자본주의에 물든 샌님이나 하는 것들.  노동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털털한 대학생은 그딴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가끔 시간이 나 데이트를 하게 돼도 근사한 스테이크 레스토랑 대신 허름한 동네 식당엘 갔고, 예쁜 카페 대신 순환 좌석 버스에 앉아 인생에 대한 고민 이야기를 했다.  다이아몬드 보기를 돌 같이 했으니, 둘 사이에 장신구 따위가 존재했을 리 만무하다.  한 번쯤 사줄 법한 흔한 큐빅 반지마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즐거워하는 여친을 보며, 훗 역시 나에게 푹 빠져있군, 이라고 생각했다.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그런 나의 털털한 면이 바로 정확히 헤어진 이유였다는 걸 안 건 차인 후 무려 약 10년이 지나서이다.  나는 털털함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여자 친구에게 무례하고 무심했던 것이다.  마음은 그게 아닌데.  그렇게 차인 날부터 3일간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살았고, 술 먹고 불x친구 집 화장실에서 뻗는 바람에 그 집 식구들 모두 주택단지 화단에 가서 몰래 볼 일을 봐야 했을 정도로 이곳저곳에 민폐를 끼쳤다.  그러고 보면 털털한 남자랑은 참 거리가 있었다.  그냥 연애젬병이거나 아니면 재수 없는데 돈도 없는 놈이었을 뿐이거나.  둘 다이거나. 

 

가장 위험한 순간이 바로 자신감이 넘치는 순간이다.  자신감이 넘치기 때문에 시야가 좁아지고 귀도 닫히며 내가 하고 싶은 말만 가장 중요한 말이 된다.  넘치는 자신감은 헨젤과 그레텔을 살찌울 과자집과 같은 것.  별 생각이 없이 먹을수록 오만의 살이 쪄 결국 잡아 먹히게 될 것이다.  


이보다 더 확실할 순 없다

Zuora.org는 기업용 소프트웨어 업체인 Zuora가 만든 사회적 펀드인데 (Google.org와 비슷하다), 여기에서 COVID-19에 관련한 보조금 (Grant) 신청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미 이건 따놓은 당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기술 기업이 운영하는 보조금인 만큼 우리와 같은 기술 NPO을 밀어줄 것이 뻔했고, 규모가 그렇게 큰 보조금 프로그램은 아니라서 지원금의 가성비가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부금을 받아 레스토랑에 전달하고 그들이 다시 음식을 의료진에 제공하는 우리의 모델은, 한 번의 기부가 여러 사람을 돕는다는 측면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가성비 최고의 모델이었다.  게다가 생긴 지 얼마 안 된 보조금이라 아직 체계가 안 잡혀, 제안서를 그럴듯하게 멋들어지게 쓰는 단체가 보조금을 받게 될 확률이 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측면에서 동네 NPO 보다는 IT 기업에서 수도 없이 제안서를 갈고닦아 왔던 우리에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 제안서 양식을 보니 스타텁의 하버드라고 불리는 YCombinator 지원서 느낌이 났다.  보조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부터 어떤 면이 우리의 강점인지, 리스크는 없는지 등등 상당히 상세하게 쓰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제안서란 한석봉 어머니에게 있어 가래떡과 같은 것.  이미 수백 번은 이리저리 '썰어'보고 고민했던 주제들이었고, 어떤 식으로 써야 할지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그려졌다.  


우리는 그냥 NPO가 아니라 기술 NPO인 만큼, 우리에게 투자해서 기술을 완성시키면 일어날 수 있는 멋진 일들을 휘황찬란하게 묘사하는 데에서 시작했다.  같은 보조금으로 어떻게 훨씬 더 많은 임팩트를 낼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했고, 레스토랑과의 계약 및 사기꾼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 마련까지 보여줬다.  완성되어 가는 제안서를 보면 볼수록, 이건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다는 생각에 흐뭇해졌다.


보조금이 정말 필요한 곳

그러나물론 이미 이 글이 흘러가는 분위기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결과는 충격의 탈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zuora.org 측에서, 우리가 원할 경우에 한 해 최종 탈락 원인에 대한 피드백을 줄 수 있다고 연락이 왔다.  망설일 것 없이 당장 약속을 잡고 co-founder 중 한 명과 함께 만났다.  정말 너무 궁금했다.  왜 떨어졌는지, 우릴 제치고 영광의 보조금을 쟁취한 다른 NPO들은 얼마나 훌륭한지.


드디어 만남의 시간.  Zoom 영상 반대 편의 사람은 젊은 백인 여성분이었다.  어깨가 떡 벌어진 게 풍채가 좋고 시원하게 잘 생겼다는 인상을 받았다.  목소리도 쩌렁쩌렁했고, 이야기를 할 때 몸의 움직임도 컸다.  말을 할 때마다 긴 머리가 연신 뒤에서 좌우로 찰랑거렸다.  방금 입 친구가 뱉은 말에 대해서 머리카락 친구들이 박수를 치며 호응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 멋진 아이디어예요.

좋은 아이디어였기 때문에, Zuora.org의 입장뿐 아니라 그녀 개인에게도 굉장히 흥미로운 제안서였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거의 심사 막바지 단계까지 올라갔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의례적으로 하는 칭찬이라고 생각했지만, 구체적이고 열정적으로 설명해주는 모습에서 점점 더 사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조금 놀라울 정도로 우리 제안서의 구석구석에 대해 기억하고 알고 있었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준비한 데다가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직접 용기를 북돋워주니 상당히 위로가 됐다.  (아니, 위로가 안 되면 혼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는 편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한껏 용기를 북돋워준 후에서야, 누가 우리를 제치고 영광을 차지했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결승전'까지 갔던 후보들 중 결국 선택된 건 소규모의 지역 Food Bank들(가난한 사람들이 무료 급식을 받아가는 곳)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두 "현장에서 직접 음식을 나눠주는 작고 영세한" NPO들이라고 했다.  


그렇게, 당신들의 돈이 진짜 필요한 곳을 돕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돈이 진짜 필요한 곳이라니...


Food Bank.  대략 이런 분위기이다.


깨달음의 순간

의심의 여지없는 깨달음의 순간이 왔다.  기술 NPO로서 남들보다 돋보일 수 있다는 계획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 NPO 피칭은 스타텁 피칭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NPO 보조금 지원은 스타텁의 투자 피칭(pitching)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보조금을 넣어 놓고 NPO가 잘 되면 그것을 불려서 회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초점은 누가 얼마나 더 절실하고 보조금을 잘 활용할 것인가에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잘 나가는 조직이고 앞으로 얼마나 더 잘 될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약점(?)이 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잘하고 있는데 왜 굳이 도와줘야 하나.  이왕이면 너무 힘든데 조금의 도움만 있으면 살아날 수 있는 작은 NPO를 돕는 편이 나은 것이다.


제대로 헛짚었다.


2. 현장과 맞닿아 있어야.

우리의 기술만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수혜자(beneficiaries)와 직접 맞닿았다기보다는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단체들을 뒤에서 돕는 느낌이 부각되어버렸다.  그에 반해 직접 손에 음식을 들고 불우 이웃에게 나눠주는 지역 Food Bank들은 커뮤니티에 당장 도움이 되는 느낌이 확 살아나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원금을 줬을 때 그 임팩트가 장기적으로 더 커질 수 있을지언정, 당장의 효과는 아무래도 현장으로 지원금을 보내주는 편이 나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 역시 지역 레스토랑을 통해 현장과 맞닿아 있었지만, 기술 NPO라고 너무 으스대다 보니 그런 부분이 묻혀버렸다.  현장에 음식을 수작업으로 배달하는 지금은 원대한 기술을 만들기 위한 시작점에 불과하며, 스타텁으로 치면 시장 검증을 하는 정도라고 너무 폄하해버렸다.


번지수 제대로 잘못짚었다.


3. 역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자신감이 넘칠 때.  

무엇보다도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장 문제였다.  주변에 이런저런 노하우를 알려줄 노련하고 친절한 전문가분들이 많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조언조차 구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눈과 귀가 닫혀 있으니 될 리가 만무했다.


그분들을 찾아간 건 떨어지고 나서였다.  그리고 보조금(Grant)이라는 것이 얼마나 종류가 다양하며 어려운 일인지 배우게 되었다.  기술 NPO를 위한 보조금도 따로 존재한다고 했다.  지금의 보조금 신청서가 정확히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먼저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진행하는 게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겨우 NPO를 시작했으면서, 그것도 할까 말까 그렇게 고민하고 겨우 시작했으면서 너무 아는 체했다.  자그마한 성공들에 눈이 가려 오만했다.


역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자신감이 넘칠 때이다. 




자기가 털털한 남자인 줄로 착각하고 살던 나는, 결국 그래도 그때 나를 차 버린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  약 10년 간의 우여곡절 끝에 일어난 일이다.  그 드라마를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하물며 평생의 동반자도 가능했는데, 보조금 따위 언젠가는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아직도 정신 덜 차린 자신감이 슬쩍 속삭이기 시작했다.  최근부터. 


깨달음의 순간이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서 이 글은 이를테면 그 정신 덜 차린 나의 자신감에게 쓰는 편지라고 할 수 있다.  두고두고 꺼내 항상 읽어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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