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chnology NPO
우리가 하는 일이 그리 특별한 건 아니다.
기부금 100%를 로컬 레스토랑에 전달하고, 레스토랑은 그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취약계층에게 배달하는 이 모델. 사실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 실제로 많은 비영리법인뿐 아니라 시/주정부, 심지어는 페이스북 같은 영리법인에서도 진행하고 있는 모델이다. 우리도 다른 단체로부터 영감을 얻어 시작했다.
다만 수작업으로 진행되는 이 모든 것들을 자동화하려는 점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식당을 찾고 메뉴, 가격, 수량을 정하고, 계약서에 사인하고, 배달 확인하고, 입금까지. 이 모든 일은 수많은 이메일과 전화 혹은 문자 메시지를 필요로 하는 번거로운 작업이자 동시에, 사실 모두 자동화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렇다. '자동화'가 우리의 무기이다. 이 모든 일들을 자동화해서 모두에게 제공하는 것. 그래서 밀포워드 (Meal Forward)가 추구하는 이상향은 기술 중심의 비영리법인 즉, Technology NPO가 되는 것이다. 굳이 전기차 업계와 비교하자면 테슬라와 같다고 할 수 있으려나. 느리고 요상하게 생겼다는 전기차에 대한 고정관념을 테슬라가 확 깨버린 것처럼 우리는, 느리고 비효율적이다는 비영리법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술을 활용해 부셔버릴 것이다. 직원들에게 월급도 많이 줘서 배고픈 직업이라는 고정관념도 날려버릴 것이다...
... 여기까지 쓰고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밀포워드를 소개하기 위한 브로셔를 제작 중이었는데, 직접 썼지만 신나는 이 한 구절이—우리는 비영리법인계의 테슬라다—은근히 마음에 들어 슬쩍 자랑하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부엌에 당도해보니 고등학교 입학을 코 앞에 두고 있는 틴에이저 딸과 그 어머님께서 테이블에 앉은 채 서로를 심각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주춤한 나는 급 방향을 틀어 괜히 냉장고만 열었다. 물컵에 쪼르르 물 떨어지는 소리가 부엌에 울려 퍼졌다.
방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문제가 있었다. Technology NPO가 되기 위해서는 엔지니어와 프로덕트 매니저, 디자이너 등의 기술 인력이 많이 필요한데, 공교롭게도 이들은 이 동네에서 가장 비싼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역시 냉수를 먹었더니 정신이 드나 보다. 시작도 하기 전에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On Deck이라는 파트타임 액셀러레이터가 있다. 스타텁을 준비하거나 아주 초기 단계의 스타텁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는 10주 코스이다. 뭔가 인생에 변화를 주고 싶지만 아직 아이디어나 용기가 없는 회사원들이 주로 모여있다. 나 같은 경우, 우울증을 겪으며 만들어낸 우울증 관련 사업계획으로 지원했었는데, 심사 도중 갑자기 사업을 접고 밀포워드를 시작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합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천 오백 불을 내고 참가해야 해서, '합격했다'라고 하기엔 뻘쭘한 구석이 좀 있었다.)
이 On Deck을 시작하는 첫날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ODF4: On Deck Fellowship #4>였는데—굳이 번역하자면 "온덱 4기" 정도일 것 같다—같은 기수 280명에 그 전 기수까지 다해서 약 700명이 전 세계에서 Zoom으로 모였다. 미국 전역은 물론 인도, 터키, 영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지역도 다양했다. 그렇게 장장 세 시간에 걸쳐 서로 만나 자기 소개하고, 온덱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배우고, 관심 분야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하는 글로벌 오리엔테이션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원래는 각지에 퍼져있는 합격자를 온덱 직원들이 자가용으로 픽업해 한 곳으로 모은 뒤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하는 방식이었는데, 자택격리로 불가능하게 되자 그 경험 자체를 온라인으로 옮겨왔다. 700명이 모여있는 Zoom 콜에서 자, 시작! 하면 무작위로 대여섯 명과 매칭 되어 breakout room으로 옮겨졌고, 거기에는 이미 온덱의 직원이 유튜브로 자동차 운전하는 영상을 틀어놓고, Spotify로는 드라이브용 배경음악을 깔아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버추얼 카풀 (virtual carpool)을 하면서 자기소개를 하다가 시간이 되면 다른 차로 옮겨 다니는 거다. 카풀이 끝나고 잠시 오리엔테이션을 거친 뒤에는, 가상의 복도를 지나가면서 인사를 하기도 하고 관심분야가 정해진 여러 가상의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처음엔 이렇게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오로지 온라인 서비스만을 통해 마치 오프라인에서 만나듯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따라가기가 벅차기 시작했다. 20대, 30대 초반의 에너지 넘치는 친구들을 따라가지 못한 것도 있지만, 새롭게 배워야 하는 소프트웨어도 많았고 생전 처음 듣는 약어도 난무해 정신적인 체력이 금세 고갈되어 버렸다. 게다가 영어 아닌가. 흥분상태가 너무 길어지다 보니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약 한 시간 반 만에 빠져나왔다. 야 이제 정말 나이를 먹는구나라는 생각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평생 아무것도 못할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렇게 온덱에서의 아찔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수백 명의 예비 창업자들이 열정적으로 서로 소개하고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모습. 그리고 그 모습에서 (나는 비록 나가떨어졌지만) 힌트를 얻었다. 사실, 비영리법인을 운영하면 좋은 인재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길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은 있었다. 그 희망이 망설이던 비영리법인 설립을 최종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줬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없었는데, 온덱에서의 당황스럽지만 인상 깊었던 경험이 생각나면서 머리에 스파크가 튀듯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우리도 사람들을 한 데 모아놓고 fellowship이라고 부르는 거다!
이름하여 <MFF1: Meal Forward Fellowship #1> 즉, 밀포워드 1기. 2개월이면 2개월, 시간을 정해놓고 단 한 가지의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는 fellowship program이다. 예를 들어 MFF1 (밀포워드 1기, 밀포 1기)의 목표는 자동화 플랫폼의 MVP를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을 여러 개의 작은 프로젝트로 나누어 각각 엔지니어, 프로덕트 매니저, 디자이너 등의 기술 인력을 배치한다. 각 프로젝트가 완료됐을 때 MVP가 세상에 나오게 되고, 밀포 1기는 해산하거나 계속하거나 잠시 쉬었다가 돌아오거나 하면 된다. 그렇게 1기, 2기, 더 나아가 몇 백기까지 기수가 쌓이게 되면 사회에서는 "어? 저 밀포 259기인데요" "어머나! 차렷! 반가워요! 전 158기예요!" 대략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거다.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무엇보다도 충분히 피차 수지타산이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커뮤니티를 돕는다는 의미 있는 스토리와 함께 다양한 사람들과 모여 같이 일해볼 수 있는 기회를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사람들은 재능을 기부해 우리의 플랫폼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공동 창업자들이 처음에는 '과연 그게 될까' 하고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내 동의하고 시도해보기로 했다.
일단 공동창업자들과 함께 동시에, LinkedIn과 Facebook에 밀포워드를 설립했다는 포스팅을 했다. 설립 후 무려 한 달이 지나서였다. 바로 지인 몇 명으로부터 '뭐 도와줄 것 없냐'라고 연락이 왔다. 거기서 조금 자신감을 얻고 이번에는 지난 팀들 (Social Impact, Business Integrity) 및 지난 회사 (eBay)에서 몇몇 일 잘하던 친구들에게 직접 연락을 했다. 표면상으로는 안부 차 1:1 면담이었지만, 사실은 리쿠르팅이었다. 몇몇은 사정이 있어서 어렵다고 했고, 몇몇은 2기 혹은 3기 때부터 도와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흔쾌히 같이 하기로 했다. (나중에는 같이 하기로 한 친구들이 또 자기 형제, 여자 친구, 남편들을 끌어들였다.)
그렇게 약 몇 주 만에 서른 명 넘게 모였다. 배경들도 다양했다. 페이스북, 구글, 아마존, 트위터 등 글로벌 기업부터 스타텁, 그리고 대학생까지 23개의 다른 회사 혹은 기관에서 모였다. 연령은 안 물어봤지만 20대 초반부터 50대까지 스펙트럼이 넓었고, 58%가 여성이었으며, 6개의 지역 및 4개의 시간대에 걸쳐 있었다. 북동 아시아인, 백인, 인도인 실로 다양한 사람의 그룹이 모였다.
대부분이 전 직장 아니면 전 팀들 사람이었지만 감동적이었다. 물론 나를 위해 모인 것은 아니지만, 나 때문에 불참하지는 않지 않았는가! 온덱에서 배운 대로 첫날은 서로를 알아가는 social 시간을 가졌다. 아무도 안 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지만 특별한 사정이 생긴 몇몇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왔다. 재미없으면 폭망인데, 하고 염려가 됐지만 이것도 기우였다. 각자 간단한 자기소개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초면에도 서로 질문하고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모두들 즐거워하고 들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비영리법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인재를 월급 걱정 없이 더 많이 데려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규모가 커지면 월급을 주고 직원을 고용해야겠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자원봉사자는 얼마든지 끌어들여 함께 일할 수 있다. 좋은 의미를 유지하고 운영만 잘한다면, 비영리법인이라는 정체성이 오히려 인재 수급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역발상이었다. 우수한 인재들이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비영리법인으로 만들면 될 일이었다.
비영리법인계의 테슬라.
초기 인건비 걱정 없이 훌륭한 인재들이 함께할 수 있는 그림만 잘 그린다면, 충분히 기술 기반의 비영리법인이 될 수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제 본격적인 Technology NPO로서의 첫 발을 내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흥분됐다.
아, 이거 쫌 짱인 듯.
첫 소셜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상기된 얼굴로 부엌에 와서 (이번엔) 당당하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