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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chu Pie Apr 25. 2019

모든 삽질은 필요한 순간이 있다

깔때기 전문가라서 다행일 줄이야

이베이에 다니던 시절, 야심 차게 시작했던 일본 시장 진출이 무참히 깨진 바 있다.  


약 6개월에 걸쳐 모든 것을 걸고 준비하던 일은, 부사장이 프로젝트 예산을 다시 가져가 버린 단 하룻만에 박살이 났다.  러시아발 환율 폭탄이 문제였다.  수출팀이었던 관계로, 당시 제1 우선순위 국가인 러시아에서 터진 환율 폭탄은 전체 팀을 존폐 위기에까지 몰아세웠다.  즉, 나의 입장에서는 불가항력의 일이었고 어떻게 보면 쿨하게 훌훌 털어내도 되는 일이었다.


근데 그게 안됐다!


차라리 내가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일이 틀어졌다면 고치기라도 할 텐데, 환율이라는 외부 요소에 의해 공든 탑이 무너지니 오히려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었다.  원래 같았으면 정 반대로 반응했을 텐데.  이 흔하지 않은 '근사한' 실패를, 프로페셔널한 나의 슬픈 도시남적 섹시함을 돋보이게 하는 술자리 안주로 썼을 텐데.  그것 참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초창기 시절 별 굵직한 일 없이 지낸 암흑기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뭔가 일다운 일을 해보려 했는데, 그것이 틀어지고 나니 예전처럼 시다바리 같은 일만 떠맡게 될까 무의식적으로 불안해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잠시 방황했다.


무엇인가 다시 열중할 대상을 찾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에게 버림받고, 그 충격이 비뚤어진 성적 욕구로 발현되어 포르노에 중독된 변태처럼 (어디까지나 이를테면, 입니다).  시뻘건 눈으로 열중할 새로운 일을 찾았다.  "초이의 일이다"라고 누구나 인정할 그런 일.  개나 소나 하는 그런 일은 안된다고 중얼거리면서 실상은 개처럼 혀를 껄떡이며 일을 찾았다.   


그러던 와중 구글에서 이직한 지 얼마 안 된 한 디렉터가 우리 팀에는 왜 깔때기 분석이 없냐고 물었다.  깔때기라니 아니 이 자식이 디렉터나 되어서 너무 인생 쉽게 살려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은 잠시.  듣고 보니 너무 필요할 것 같은데 아무도 신경을 안 쓰고 있었던 분야였다.  '대어'의 냄새가 풍겼다.  


그러나 마지막 똥 자존심이 전부였던 나는, "아 그거 이제 막 시작하고 있어"라고 귀를 후비적거리며 얼버무려 버렸다.  "오 그래? 어디 나도 좀 보면 안 될까!"라는 말을 뒤통수로 받고는, 발 빠르게 이 일을 도와줄 팀원을 조용히 수소문했다.  그렇게 지역 전문가와 데이터 전문가, 리써쳐 등을 모았다.


홈페이지에 들어오자마자부터 시작해서 결제 페이지 등으로 이어지는 깔때기 모양의 흐름을 분석해서 어떤 단계에 집중할지 어디를 개선할지 등을 분석하는 일이다.


그렇게 약 한 달 반 남짓만에 우리 팀은 꽤 그럴싸한 깔때기 분석 (Buying Funnel Analysis)을 내놓았다.  당연히 일본 진출 계획을 무산시킨 우리 팀의 제1 우선순위 러시아 바이어들의 행동 패턴을 제일 먼저 분석했다.  장장 60장에 이르는 매우 자세한 분석이었다.  우수한 데이터 분석가를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  


처음 얘기를 꺼냈던 구글에서 온 디렉터는 '아니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건데 이렇게 까지'라고 놀라는 눈치 (물론 내 생각엔)였고, 곧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프로덕트 매니저에게 전달되면서 그들의 프로덕트 본능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사이트 디자인 개선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에 디자이너들이 군침을 흘렸다.


할 일이 엄청 많아졌고 합리적인 이유와 우선순위가 생겼다.  


당시 첫 Buying Funnel 분석 보고서의 표지와 내용 예.  약 60장에 이르는 양이었다.


소문은 돌고 돌아 마침내 처음 나의 예산을 빼앗아 가버린 부사장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직접 대면한 자리에서 부사장이 크게 마음에 들어했고, 러시아 외 브라질을 포함한 타 지역 분석을 위한 예산 편성을 따로 내주었으며, 이베이 마켓플레이스 사장에게도 따로 서면 보고하게 되었다.  회사 내 직급으로 치면 한참 시다바리였던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베이 마켓플레이스 사장에게 노출되는 기회였다.


이 사건이 <난 또 망한 줄 알았지>에 어울리는 이유는, 오로지 실패로 시작된 불안함을 떨치기 위해 집착하듯 시작했던 이 일이, 훗날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나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첫 깔때기 보고서를 내고 약 반년 간 나는 회사에서 깔때기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원하던 일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일본 진출 좌절에 의한 무기력함은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페이스북 면접을 위해 Menlo Park에 위치한 페이스북 본사의 한 회의실에 앉아 있게 된다.


이미 오전 내내 세 번의 면접을 마친 후 네 번째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 번째 면접은 그 전 세 번의 면접 중에서 상대적으로 약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다른 면접관이 다시 한번 보는 것이다.  합격에 근접했지만 조금 부족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다시 한번 검증하는 것이다.

 

면접시간이 되자 키 큰 백인 친구가 들어왔다.  이십 대 중반쯤 되려나.  '전형적'이라고 하면 그들이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동그란 뿔테 안경에 한쪽으로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팔뚝까지 가볍게 말아 올린 버튼업 셔츠에 깔끔한 베이지색 바지까지.  영락없는 젊은 실리콘밸리 소프트웨어 기업 종사자의 모습이었다.  


가볍게 인사를 한 후, 그 친구가 말을 이었다.


"이번 면접은 아주 어려울 수 있어요."  

"..."

"잘 아시다시피 지난 세 번의 면접 중에서 조금 약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다시 검증하는 거라."

"네."    


그러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화이트보드에 층이 여러 개인 두 개의 역삼감형을 그리고 숫자(%)를 적어 넣었다.  그리고 한쪽엔 "US" 다른 한쪽엔 "Brazil"이라고 적었다.  그렇다.  위에 올린 이미지와 거의 흡사한, 지난 반년 동안 포르노 보듯이 집착했던 깔때기 분석에 대한 질문이었다.  합격의 스멜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옅은 한숨으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의기양양하게 입술을 뗐다.


"음.  재밌는 질문이군요.  일단 앉으세요." 


진짜 "You can sit now"라고 이야기했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건방짐과 자신감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했다.  어안이 벙벙한 뿔테 옆으로 일어나 지난 6개월 간 쌓아온 나만의 포르노를 쏟아냈다.  볼레토가 어쩌고 하며 실은 잘 알지도 못하지만 브라질 관련 깔때기에서 배웠던 단어들을 꺼내 현란하게 휘둘렀다.  "Oh, you speak my language!" (오오 말이 통하는군요!) 이러면서 뿔테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리고 당일 저녁, 합격 전화를 받았다.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 같은 면접을 진행하는 면접관이다.  그리고 인터뷰를 진행할수록, 그 당시의 나는 정확히 깔때기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거의 확실하게 떨어졌을 것을 느낀다.  물론, 당시 면접과 연결이 안 되어 떨어졌다 한들 그것이 또 다른 어떤 미래를 열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깔때기 덕분에 합격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이베이를 관둘 때 직원들이 Farewell Party를 열어줬다.  그리고 기념품을 줬는데 보통처럼 카드에 작별 인사를 쓰는 대신, 이 친구들이 어디선가 커다란 깔때기를 구해다가 거기에 작별 인사를 썼다.  철제 깔때기에 매직으로 억지로 쓴 인사들이라 잘 알아볼 수 없는 말들이 더 많았지만, 나에겐 정말 특별한 선물이 되었다.  


정봉주 의원에게 깔때기가 '모든 화제는 다 자기 자랑으로 귀결된다'는 의미였다면, 

나에게는 깔때기가 '모든 삽질은 다 어떻게든 필요한 순간으로 귀결된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요즘도 가끔 내가 꿈꾸던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해야 할 때 꺼내서 보곤 한다.  


깔때기, 깔때기 하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저도 이 글 곳곳에 깔때기를...  쿨럭.


잡스 형님이 갈매기살 먹으면서 해 준 그 이야기에 대한 좋은 리마인더이다.


Connect the dots.


버릴 일 따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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