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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베네치아: 지도를 펼쳐본 지 너무 오래됐다

Recharge 11일 차: 피렌체 > 베네치아 > 피렌체

by Chuchu Pie

11일 차 하이라이트

생각해보니 지난 18년 간 가장 오래 쉬어 본 것은 2주일이 아니라 열흘(10일)이었다. 2014년 5월 16일에 이베이를 그만두고 5월 27일에 페이스북으로 첫 출근했으니 정확히 10일 쉰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Recharge 11일 차 되는 날이니, 지난 18년 중 가장 오래 쉬게 되는 첫날인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여행을 하다 보니, 당연한 얘기지만 여행이 일상이 되었다. 보통 하는 일주일 정도의 짧은 여행은 아무래도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 여행 중간중간 간혹 이메일을 체크하기도 하고, 일 생각도 한다. 그러나 열흘이나 쉬지 않고 여행에만 몰두하다 보니 (그리고 아직 반도 안 했다), 이제야 마음을 놓고 슬슬 여행에 완전히 빠져든 느낌이 든다. 마치 처음 30분을 어떻게든 뛰어내고 나면, 관성에 기대어 계속 달릴 수 있게 되는 것처럼. 페이스북도 인터넷 뉴스도 거의 보지 않고, 오로지 오늘 돌아다닐 곳과 볼 것과 할 것 그리고 먹을 것에만 집중하는 거다.


그러다 보니, 너무 클리셰하고 오그라드는 이야기지만, 여행이 인생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마치 커리어를 쌓듯, 하루하루 설레는 마음으로 일어나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사는 일이 그렇듯, 여행 계획도 항상 변수가 생겨 틀어지고 수정되기를 반복한다. 인생이 그렇듯 전반적으로는 축복받고 감사할 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행하는 것도 다리 아프고 힘들다. 항상 즐거울 것만 같지만, 아이들이 엄마에게 혼나기도 하고 아옹다옹 다투다가 화해하기를 반복한다.


참 비슷하구나, 라는 생각에 이를 때쯤 아차 싶었다. 단 한 가지, 여행과 지금 내 인생이 닮지 않은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더 이상 새로운 지도를 펼치지 않는다는 것.


파리, 벵겐, 융프라우, 뮈렌, 인터라켄, 루체른, 피렌체, 베네치아. 새로운 곳을 갈 때마다 항상 맨 먼저 지도를 활짝 펼치고 오늘은 어떻게 하루를 보낼까 설레는 마음으로 동선을 짠다. 그러나 실제로 가다 보면 여러 변수가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그럴 때마다 다시 지도를 펼치고, 어떻게 할까 이 길로 돌아가면 되려나, 열심히 궁리해가는 맛이 있다.


그러나, 내 인생의 지도는 언제 마지막으로 펼쳐봤는지 가물가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아마 MBA에 처음 들어갔을 때쯤이려나. 그 후 지난 10년 간, 새로운 지도를 펼치는 일 없이 그저 하루하루 관성대로 살아왔다는 생각에 뒤통수를 맞은 듯 잠시 멍해졌다. 하루하루 닥친 일에, 그것이 마치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양 매달리지만, 그래 봤자 그날의 가장 중요한 일일 뿐. 나만의 지도를 펼치고 무궁무진한 가능성 속에 내 멋대로 길을 그려본 일이 너무 오래됐다. 쳇바퀴에서 완전히 나와보고 나서야 그게 쳇바퀴라는 걸 진심으로 알게 되었다.


새로운 목적지. 가보지 않은 길. 그리고 "한 번 가 볼까"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는 도전. 지금 내 여행에는 있지만 여행이 끝나고 돌아갈 내 인생의 여행에는 빠져 있는 것들이다.


한 편으로는 이번 긴 여행을 통해 비로소 내 인생 지도를 펼쳐본 지 오래됐다는 사실을 깨달아 다행스럽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그 지도에 쌓여있을 먼지의 양에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다.




11일 차 여행 일지

아침

이탈리아로 가족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회사의 한 직원이 극구 말리기를, 베네치아는 더럽고 비싸기만 하니 절대 묵으면 안 된단다. 확신에 가득 찬 그 직원의 눈빛에 깊은 영향을 받아 결국 막판에 베네치아 일정을 당일 코스로 바꿨다. 피렌체에서 기차로 약 두 시간이면 간다고 하니 그렇게 하기로 했다.


전체 일정 중에서 첫 당일 코스이다 보니, 아무래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데에 소홀하게 됐다. 고작 몇 시간인데 가서 보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란 생각이었다. 그렇게 막판까지 계획을 미루다 기차에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베네치아에 대해 이것저것 들춰보기 시작했다. 열흘 정도 여행했다고 프로 여행러 행세를 한 것이다.


그 얕은 거만함은 (당연히) 두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켰다. 원래 내려야 하는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이 아닌 그 전 Mestre 역에서 내려 버린 것이다. Venice Mestre라고 되어 있어 뭐 대충 Master 아니면 Main 역이겠거니 하고 내렸는데, 티브이를 통해 봤던 바다나 강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대신 무섭도록 평범한 작은 도시가 '거봐라, 너 잘 걸렸다'하고 내 앞에 나타났다.


당황한 모습을 숨기고 얼른 지도를 펼쳤다. 그제야 한 정거장 더 가야 (바다를 건너야) 우리가 알던 그 베네치아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한 정거장 어치 기차표를 끊고, 돌아오는 기차 출발역도 산타 루치아 발로 바꾸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도착하고 역을 나올 때 우리는 이미 "우와 너무 멋있어"하고 함성을 지를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었지만, 곧 바포레토 (Vaporetto: 수상 버스. 관광객을 짐짝처럼 실어 나른다.)라는 난관이 하나 더 남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목적지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인 산 마르코 광장. 그러나 페로비아(Ferrovia) 선착장의 산 마르코 광장 행 줄이 너무 길어, 그 반대편으로 가는 배를 타버렸다. 어차피 순환한다니까 어떻게든 괜찮겠지 싶었는데, 원래 방향 바포레토보다 20분은 더 걸린 것 같다.


점심

이윽고 도착해 산 마르코 광장과 성당 등등을 돌아보고 싶었지만 이미 아이들이 지쳤다. 박물관과 성당, 광장 이런 것에는 특히 너무 지쳐있는 상태라 간단하게 사진만 찍고 곤돌라로 향했다. 현금이 없어 산 마르코 광장 내 환전소에서 돈을 바꿨는데 수수료를 20%나 떼어갔다! 이런 게 바로 벌건 대낮에 코 베이는 거다.

곤돌라의 첫 코스, 탄식의 다리.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감옥이었는데, 죄수들이 햇빛 없는 감옥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숨을 내뱉으며 건너던 다리였단다.


곤돌라를 타고 골목 곳곳을 누비는데, 물가에 조그만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노부부가 밖에 놓여 있는 단 두 개의 테이블에 앉아 있고, 회색 머리가 희끗한 이탈리아 아저씨가 시원한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생맥주를 들고 가고 있다. 너무 평화로운 모습에 배에서 당장 뛰어내려 마시고 싶었지만 당연히 그럴 수는 없어 일단 구글 맵에 위치를 표시만 해두었다.

머리가 희끗한 이탈리아 아저씨가 생맥주를 들고 나오기 직전의 모습이다


곤돌라에서 내려 아까 표시해뒀던 카페로 향했다. 이름은 Wine Bar 5000. 막상 들어와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기자기하고 아름답다. 곤돌라가 지나가는 수로 바로 옆에 있어, 마치 카페가 수로에 발을 담그고 걸터앉아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창가에 좁은 난간 같은 곳에 의자를 당겨 자리를 만들어 앉았다. 지나가는 곤돌라도 구경하고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아기자기한 음식과 와인이 하나같이 훌륭했다. 결국 이 자리에 거의 3시간이나 앉아 빈둥댔다. 베네치아 방문 총 7시간의 거의 반을 이 카페에서 보내게 될 줄이야!

이 카페에 앉아 지도 생각을 했다.


특히 아까 생맥주를 나르던 회색 머리 이탈리아 아저씨는 가까이서 보니 엄청난 훈남이다. 특히 눈빛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투명하고 선했다. 같이 사진을 못 찍어서 아쉽지만 대신 그 아저씨의 인스타그램을 알게 됐다. 창밖을 보며 빈둥거리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와 고양이 좋아하냐면서 자기 인스타에 있는 사진 몇 개를 보여주더니, 아예 자기 폰을 우리에게 주고는 옆 가게로 사라져 버렸다. (Wine Bar 5000 옆에 있는 Luna sentada라는 레스토랑도 같이 서빙을 한다.) 인스타에는 고양이 사진이 가득하다.


30분이 지나도 아저씨가 나타날 생각을 안 하자, 아예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소매치기 많은 이탈리아에서 아저씨,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살짝 걱정이 된다. 아무튼 그 자리에서 인스타는 팔로우!

아저씨가 주고 간 폰과 그것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


카페 및 레스토랑 직원들이 지나가는 곤돌라 사공에게 맥주를 건네주기도 한다. 미리 계산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사공의 환한 표정을 보면 서비스 맥주일 것 같다. 어쨌든 훈훈한 장면이었다.

이 회색 머리 아저씨는 그 회색 머리 아저씨가 아니다


늦은 오후

드디어 무거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목적지는 유명한 리알토(Rialto) 다리였지만, 거기까지 어떻게 갈지는 정하지 않고 그냥 걸었다. 걸어 다녀 보니, 역시 아름다운 도시. 왜 전 세계 곳곳에서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곳이 나오면 리틀 베네치아 리틀 베네치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이건 겉모습일 뿐 이 구석을 돌면 우리 회사 직원이 말한 대로 엄청 더러울 거야, 란 생각은 구석을 돌 때마다 감탄사에 얻어 맞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소나기가 내려 한 카페에서 잠시 비를 피했다. 그 때 (고마워서) 산 에스프레소. 이탈리아 커피는 한 번에 들이켠다. 농축 카페인을 들이켜는 느낌이 마치 박카스를 들이켜는 느낌이다
둘 째가 만년필을 고르는 모습


샘플 인심이 정말 후한 초콜릿 집에서 공짜 초콜릿을 일인 당 다섯 개나 먹었지만, 정작 그 옆에 있는 사탕 가게에서 사탕과 젤리를 한 아름 샀다. 많이 미안했지만, 우리 애들이 사탕과 젤리를 너무 좋아하서 어쩔 수 없었던 걸로...


막상 리알토 다리에 도착해 보니 생각보다는 별거 없었다. 아마 당일치기하듯 준비해 사전 지식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 옆의 백화점에 들어가 봤는데, 의미를 알 수 없는 팔뚝이 주렁주렁 그로테스크하게 널려 있었다. 뭐, 이건 예술적 소양이 부족해 이해하지 못한 걸로.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인가 하는 백화점인데 전망대에서도 리알토 다리를 볼 수 있다. 다만 사람이 많아서 예약을 하는 게 좋다. (우린 시간이 없어서 스킵)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잠시 카드게임을 하다가, 골목길에서 구입한 만년필을 개봉 박두했다. 카드 게임에서 계속 졌지만, 테스트 겸 아빠에게 써 준 편지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저녁

저녁은 호텔 바로 앞에서 발견한 중국 음식점인 Impressione Chongqing. 좁고 덥고 북적대는 게 20세기 초 상해의 한 골목식당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가장 화려하게 나왔던 오징어 볶음은 조금 짰지만, 매운 생선 수프와 반찬으로 나온 시금치는 한 번 입을 대면 절대로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밥을 두 그릇이나 뚝딱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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