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안믿었던 사랑의 종말론

에로스의 종말-한병철 을 읽고

by 정달샘

왔다네~ 정말로~ 아무도 안 믿었던! 사랑의~ 종말론

이찬혁은 이 책을 읽고 노래를 만든게 분명하다.


서문을 쓴 알랭 바디우는 한병철의 사랑을 극좌주의라고 꼬집으며 "어쩌면 충실한 사랑이란 실제로 진정한 공유를 위한 두 망각 사이의 결합, 애써 힘겹게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둘의 교합일 것이다." 라고 말한다. 알랭 바디우에도 동의하나 다만, 사랑은 자기 파괴적이고 부정성을 가질 수 밖에는 없지 않나. 망각만으로는 타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 망각 이후의 작업으로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역동성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순수한 사랑은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할까?


사랑은 교환관계가 아니지만, 나를 무력화하여 상대에게 내어주어야 하지만, 상대는 내가 할 수 있을 수 없음의 영역이지만, 그렇게 믿지만, 이것은 너무나도 순수한 열망이다. 이 순수한 에로스적 사랑만이 옳다고 말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분명 종말했다. 그러나 내 현실 관계와 마음은 항상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항상 긴장해야만 하고 불확실함을 쫓는 사랑은 나를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반복되는 감정적 소진은 관계에서 거리를 두게 만들기도 한다. 손에 넣을 수도 없이 끊임없이 갈망해야만 하는 타자와 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불안과 소진을 막기 위해 결국 상호적이고, 알맞는 리듬을 가진 사람, 동일성을 추구하게 되는 것 같다. 낭만을 추구하면서 낭만이 어떨지 알기 때문에 시작에서는 회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동일성 기반의 사랑이 나의 본질적인 열망을 채워주는가? 그렇다. 불안함을 회피하기 위해 선택한 동일성 기반의 사랑이 결국엔 낭만이 되기도 한다. 출발점이 동일성일뿐 동일성이 사랑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의도가 일종의 회피였을지라도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상대를 타자화하게 되고, 결국 망각과 해체의 과정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동일성->안정감->관계->타자화->망각->자기해체->재구성->낭만->동일성->안정.. 사랑은 이런 과정의 반복 아닐까?


"에로스는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 관계이다. 에로스는 교환 관계를 중단시킨다. 이질성은 부기의 대상일 수 없다. 이질성은 대차대조표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소비되는 사랑엔 끌리지 않는다.


욕망은 결핍과 타자와의 거리감에서 생긴다. 하지만 고해상도의 현대 사회에서는 타자에 대한 정보가 즉시 주어지며, 신비와 결핍은 사라진다. 자극과 쾌감만 남은 사회에서, 욕망은 점점 충족 가능한 욕구나 소망으로 대체된다. 나는 원래부터 포르노그래피적인, 자극적이고 소비 가능한 관계에 전혀 끌리지 않는다. 사유도 변화도 없는 얕은 욕구는 너무나도 소모적이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고독이 더 유의미하다. 그렇기에 나는 진정한 에로스와 사유에 활기를 불어넣는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 플라톤식 에로스, 즉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만남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게 친구든, 연인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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