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의 흑해를 찾았던 건 작년 10월이었다.
계절의 변화를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때였다.
밤 9시까지도 누릴 수 있었던 유럽의 따뜻한 햇살은
이제 오후 5시만 되면 찾기 어려웠다.
비 오는 날이 잦아졌고,
금방이라도 세차게 물을 뿜어낼 기세의
시커먼 구름들이 하늘을 덮는 날도 많았다.
속절없이 떨어진 푸석한 낙엽들이
거리에 쌓여가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바다 옆에서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한여름의 성수기가 지난 흑해를
찾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듬성듬성 해변에 꽂혀 있는
파라솔들은 비어 있었고,
바다 위 갈매기들과 바다 속 해파리들은
묘하게 정적이었다.
흑해를 찾았던 모든 사람들이
이미 모두 원래의 삶의 둥지로 돌아가고,
우리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계절이 바뀌었다는 건
4월의 봄에 시작된 우리의 여행이
벌써 6개월이 되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애초에 1년을 계획했던 여행이었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확연히 줄어 있었다.
분명히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소중하고 감사한 여행을 하고 있지만,
차가운 가을바람은 냉정한 목소리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온 몸에 전달했다.
우리가 선택한 이 여행,
언젠가는 끝내야 할 이 여행.
하지만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10월의 흑해는 말없이 고요했다.
때때로 송곳처럼 느껴지는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보석 같은 장소들이 주는 에너지 때문이다.
우리는 불가리아 흑해 주변의 세 도시인
부르가스, 네세바르, 소조폴은
때로는 유쾌한, 때로는 신비로운,
때로는 차분한 에너지를 선사해 주었다.
부르가스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고양이였다.
사람보다 훨씬 많은 고양이들이 거리를 활보했고
저마다 가로수 그늘을 차지하고 앉아 낮잠을 잤다.
우리와 눈이 마주친 어떤 고양이들은
사뿐사뿐 다가와 야옹거리며 몸을 비벼댔고,
우리는 마치 선택된 사람들처럼 기뻐했다.
고대 도시의 유적들과 바다가 어우러져 있는
네세바르에는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네세바르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가
3천 년에 걸친 이 도시의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작은 바닷가 마을인 소조폴의 아침은 한적했다.
해안가에 멋들어지게 자리 잡은 카페에서
간단한 아침식사와 커피를 곁들이면서
고요한 흑해를 감상했던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든 순간순간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짙은 안개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된다.
한 달에 한 번씩 다른 나라로 이사를 하는 여행은
분명 즐겁고 기대되는 일이다.
하지만 매달 다른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기력을
조금씩 소진시키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불어온
낯선 타국의 차갑고 건조한 가을바람은,
면역력이 약해진 우리를 움츠러들고 가라앉게 했다.
조금만 걸어도 금방 피곤해졌고,
까닭 모르는 두드러기가 우리를 괴롭혔다.
면역력이 약해지니
낯선 음식을 받아들이기도 어려워졌다.
불가리아의 음식들은
대체로 우리 입맛에 잘 맞지만,
이 시기에 우리는 식재료들을 직접 사다가
간단한 요리를 해 먹으면서 몸을 추슬렀다.
외식을 해야 할 때는
불가리아 음식인 샵스카 샐러드와
요구르트 음료인 아이란을 주로 먹었다.
불가리아의 전통 샐러드인 샵스카 샐러드는
아주 간단한 음식이지만 영양은 훌륭하다.
토마토, 오이, 피망 같은 신선한 야채에
하얀 치즈 가루와 올리브를 섞어 먹는다.
불가리아 어디서도 마실 수 있는 아이란 덕분에
따로 유산균 영양제를 챙겨 먹지 않아도 됐다.
샵스카 샐러드와 아이란은
우리가 차츰차츰 기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 고마운 친구들이다.
장기 여행은 이렇게 때때로 고단하지만,
오랜 시간의 체류는 우리의 선택폭을 넓혀 주었고
좀 더 충실한 여행을 하게끔 이끌었다.
여행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날씨에 많이 좌우된다.
짧은 기간의 여행이라면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궂은 날이라도
당초 계획한 스케줄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또한 아무리 아름다운 여행지라도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인파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소음은
여행의 감동을 반감시키기 일쑤다.
우리는 날씨와 시간을 고를 수 있었다.
우리는 햇볕 좋은 날,
한적한 평일 오전 시간을 골라
불가리아의 고도인 벨리코 터르노보를 찾았다.
절벽을 휘감고 굽이치며 흐르는 강 때문에
천혜의 요새라는 굴레가 씌워지고,
외부의 적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가 세워질 수밖에 없었던 이 도시의 운명.
천 길 낭떠러지에 위태로운 집을 짓고
떨어지지 않으려 매달리듯 살았을 그 때의 사람들.
한때는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로서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번영했지만,
그랬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타겟이 되어
무너지고 부서져 몰락했던 쓸쓸한 곳.
조용하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벨리코 터르노보가 전해주는
이야기와 감정에 집중했다.
여행을 하면서
한국 음식이 특별히 그립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시안 슈퍼마켓은 물론이고
많은 유럽의 대형마트에서
신라면을 찾을 수 있어서,
종종 라면을 사다 먹으면서
한식에 대한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
그래도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국, 일본, 태국 식당들을 볼 때면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유럽 주요 도시에 일부 한식당들은 있지만,
특히 떡볶이와 김밥 같은 분식을
주로 판매하는 식당은 찾기 어렵다.
불가리아 소피아는
화사한 외관의 분식집이 있는 특별한 곳이다.
한국인 부부께서 꾸려 나가고 계시는 이곳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많은 불가리아 젊은이들이
특별히 현지화 시키지 않은
컵라면, 컵밥, 떡볶이, 김밥과 같은
한국의 분식들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우리도 귀한 떡볶이와 김밥을 감사히 먹었다.
불가리아를 떠나기 며칠 전인 10월 중순 즈음,
소피아를 감싸고 있는
비토샤 산 봉우리에 첫 눈이 왔다.
수줍게 쌓인 첫 눈을 바라보는 심정은
마냥 낭만적일 수는 없었다.
조바심, 불안감, 그리고 압박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충분히 길다고 생각했던 여행이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덧 6개월이 지나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여행을 떠나기 위해 수 없이 고민했던
예전의 나를 생각하려고 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떠난 여행.
타의가 섞여 결정되었던 나의 삶을
조금 더 주체적으로 이끌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여행.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함께 떠난 여행.
여행의 매 순간마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나의 감정들을 소중히 돌보고,
내가 좋아하고 흥미를 느끼는 것들,
즐겁게 푹 빠질 수 있는 것들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과 경험들을
아내와 공유하면서
나와 우리가 더 깊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 다 잘 될 거라는 긍정적인 기운과 함께
또 다른 여행지로 떠날 수 있었다.
2017년의 늦가을에,
우리는 불가리아를 떠나 세르비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