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태우고, 나를 태워버린 것
※ 주의 : 이 글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나의 처절함이 너에겐 흥밋거리
소설가를 지망하는 종수(유아인)의 현실은 고되고 버겁다. 그가 아르바이트 중인 유통회사에서 그에게 궁금한 건 야근과 특근의 가능 여부뿐이다. 16년 만에 전화를 걸어온 집 나간 엄마는 아들의 얼굴보다는 휴대폰 메시지에 집중하면서 그에게 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평소에도 자주 욱했던 아빠는 담당 공무원을 폭행하고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종수의 고향 친구이자, 그가 사랑하게 되는 해미(전진서) 역시 비슷한 신세다. 행사 도우미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그녀는, 북향의 원룸에서 살면서 남산타워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손바닥만 한 햇빛에 의미를 부여한다. 오랜만에 재회한 그와 그녀는 함께 담배를 피우며 가래침을 뱉는 종이컵을 공유한다. 그러한 그녀에게 그는 동질감을 느낀다. 그 동질감은 애정으로, 그리고 그를 살아가게 하는 욕망으로 급속히 확장된다.
하지만 그들의 고되고 버거운 현실은 누군가에겐 흥밋거리일 뿐이고, 흥미가 다하면 관심 밖으로 멀어져 지루해지는 일회성의 이벤트일 뿐이다. 아프리카에서 해미와 함께 돌아온 부유하고 세련된 정체불명의 남자 벤(연상엽)은, 옅은 미소와 함께 종수와 해미의 일상을 매너 있게 지켜보지만 해미가 열심히 추는 춤을 보며 조용히 하품을 한다. 벤은 북한과 맞닿아 있는 종수의 시골을 방문해 북한의 선전방송을 듣고는 피식 웃으며 짧게 내뱉는다. “재미있네.”
집 나간 엄마의 옷을 태울 수밖에 없었던 종수의 ‘버닝(burning)’은 삶의 처절함이지만,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재미 삼아 태우는 벤의 ‘버닝(burning)’은 삶의 여유다. 그랬기 때문에, 벤이 종수에게 했던 충고, “너는 너무 진지해. 가슴속 베이스의 울림을 느껴봐.”라는 말 앞에서 종수는 낡아빠진 용달차를 타고 덜컹거리며 떠날 수밖에 없었다.
2. 그레이트 헝거
종수의 고향 친구 해미는 진지하게 살아가는 유형은 아닌 것 같았다. 카드빚도 상당히 있는 것 같고, 가족들과 연락을 끊은 지도 꽤 오래된 듯 보였다. 해미의 가족들은 그녀가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잘 지어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요새 열심히 배우고 있다는 판토마임, 그러니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그 행위가 그녀의 허언과 허영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 역시도, 그녀가 아프리카에 여행을 가서 삶의 의미를 갈구하는 사람인 ‘그레이트 헝거’를 만나고 싶다고 말할 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어느 날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함께 돌아온 정체불명의 남자인 벤과 함께 종수의 허름한 시골집을 방문한다. 해미를 사랑하는 종수의 바람과는 다르게, 이미 많이 가까워진 해미와 벤은 시골의 노을을 바라보면서 익숙한 듯이 대마초를 나눠 핀다.
대마초로 몽롱해진 해미는, 갑자기 일어나 두 팔을 하늘로 향하며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신성한 태극기 앞에서 옷을 벗어던지고 그 누구보다 처절하게 몸짓한다. 하지만 대마초의 효력이 지속된 건 단 몇 분이었다. 그녀의 귀에 지극히 현실적인 소들의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춤은 멈춰지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해미의 ‘그레이트 헝거’는 찰나에 끝났다. ‘그레이트 헝거’와 대비되는 ‘리틀 헝거’는 당장의 배고픔만을 해결하려는 1차원적인 존재다. 삶에 대해 진지하지 않아 보였던 해미였지만, 그녀 역시 ‘리틀 헝거’에 머물기보다는 진심으로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맨 정신으로는 고단하고 버거운 현실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갈구하는 춤을 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3. 너를 태우고, 나도 태워버린 것
정체불명의 남자인 벤이 해미와 함께 나타났을 때부터 엄습한 불안은, 시종일관 목격되는 종수와 벤의 뚜렷한 대비를 통해 점차 고조된다. 삐걱거리는 용달차와 파워풀한 포르쉐, 허름한 시골집과 세련된 고급빌라와 같은 물질적인 부분뿐 아니라, 북한의 선전방송으로 시끄러운 접경지대와 조용하고 깨끗한 강남 주택가라는 공간의 차이, 그리고 어수룩하고 경직된 종수와는 달리 유머와 여유를 겸비한 벤의 모습에서도 종수의 박탈감이 선명하게 전달된다.
이 모든 것이 누적되어 터져버린, 옷을 벗고 춤을 춘 해미를 향한 종수의 폭언 이후로 해미는 실종된다. 쓸모없어진 비닐하우스가 불타 버린 것처럼, 자신의 춤이 한낱 창녀의 수작으로 격하된 해미도 비닐하우스처럼 태워져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안타깝게도 해미를 불태워 버린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종수는 모른다. 박탈감이 짓누르는 현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중한 사람을 태워 없애버리는 불씨를 심어 놓았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종수는 해미의 실종에 벤이 연관되어 있다고 짐작한다. 아니, 그에게는 벤이 범인이어야만 했다. 소중한 해미에게 해를 가한 것은 결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어야만 했다. 결국 종수는 해미와의 연결고리였던 고양이, 손목시계, 우물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벤을 죽여 불태운다. 그리고 그것은 종수 자신에 불붙여 스스로를 파멸시킨 행위와 다르지 않았다.
글을 쓴다는 종수에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글을 창작하고 싶어요?”, “무슨 글을 쓰세요?” 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한 글을 써 나갈 여력이 없다. 소설은커녕, 반겨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너절한 시골집에서 낯부끄러운 탄원서를 써야 하는 것이 그가 처해 있는 무기력한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청년들은 윗세대들의 충고처럼, 젊을 때 고생을 사서 한다거나 꿈을 향해 노력할 수 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중한 너를 태워 상처 주고, 결국은 나까지 태워 스스로 파멸하게 만드는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