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결이냐 숙청이냐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라는 말은 가끔 매체에 등장하지만 잘 알고 계신 한국 분들은 적을 것 같다. 하지만 매년 열리는 이 회의는 내부 정보가 거의 외부로 흘러나오지 않는 중국 공산당 체계에서 그나마 가장 많은 정보가 모이고 어젠다가 토의되고 정보가 공유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는 주목받을 가치가 있는 행사이라고 본다.
"베이다이허는 어떤 곳인가? 북경에서 진황도로 가다 보면 친황다오에 못 미쳐 있는 해안의 일부 구역이다. 행정적으로는 친황다오 시의 '베이다이허 구'이다. 2018년 말 기준으로 인구는 121,950명이다.
이 베이다이허는 중국 정부의 "夏都"로 불리며 혹자는 베이다이허가 중국 정치의 청우계라고도 말한다. 베이다이허는 원래 1948년 11월 중국 공산당이 베이다이허를 점령하고 나서 요양지로 매우 좋은 입지를 지니고 있음에 착안하여 부상당한 동지들을 요양하는 곳으로 이용한 데서 시작되었다.
1948년 6월 주덕 당시 총사령관이 베이다이허를 이용하여 지도자 급에서는 처음으로 베이다이허를 이용한 인물이 되었는데 주덕은 이 베이다이허를 매우 마음에 들어하여 매년 여름 이곳을 찾았고 죽은 뒤에도 베이다이허에 묻힐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 후 1952년에 중앙 조직부 요양원이 중앙 반공청으로 이관되면서 중직 기관 요양원(中直机关疗养院)으로 개명하고 간부들이 1년 중 1주 동안 이 곳에서 요양할 수 있게 하였다. 1953년 공산당 중앙이 하절기에는 집단으로 베이다이허에서 업무를 하기로 결정, 이곳에 건물 등을 조성하였는데 그 첫 건물은 마오쩌둥의 거소였으며 27호까지 지었는데 등샤오핑의 거소는 17번이었다고 한다. 후에 1960년 마오쩌둥에게 건물을 다시 지어주었는데 95호 동이었다.
1958년 8월 중앙은 여기서 정치국 확대 회의(통칭 베이다이허 회의)를 열고 "대약진 운동"의 첫 정책 결정을 하였다. 1962년 8월에 중앙은 베이다이허에서 중앙공작회의를 열었는데 이때 각 성의 서기들이 참석하였다. 1965년 11월부터 1966년 7월까지 마오쩌둥은 정치적 이유에서 북방에 오지 않고 남방에 머물러 베이다이허도 잠시 후퇴하는 듯했으나 1966년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다시 베이다이허가 정치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다.
그 후 등샤오핑이 집권하게 되면서 1984년 베이다이허에서 여름 업무를 하는 제도가 부활하였다. 가장 최근에는 1997년 15대의 준비가 이곳에서 진행되어 명실상부한 공산당 중앙의 핵심 요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최근 시진핑 주석은 공산당 내부 회의에서 자아 혁명(自我革命)을 이야기하며 공산당 중앙 및 지도부의 권위를 따르고 의견을 일치시킬 것을 주문하고 있다. 현재 대두된 여러 도전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중앙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 중앙을 중심으로 단결이지 사실 상 자신을 중심으로 단결하라는 말이다. 미국의 소리 방송은 이를 이번 베이다이허 회의를 열기 전에 사전 정지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당내 다른 목소리들이 있어서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사실 시진핑 주석이 권력을 잡은 후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숙청을 당하는 인물들이 계속 나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군부 인사들이 많았는데 2017년 7월 당시 총칭 시 서기였던 순정차이(孙政才)가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숙청되었고 해방군 상장이었던 장양(张阳), 팡펑회이(房峰辉) 등이 모두 베이다이허 외희에서 숙청된 바 있다.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해방군 원로 장군인 창완췌엔(常萬全)도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결국 이번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인사와 숙청이 어떤 결과를 보일지 긴장이 감도는 분위기이다. 결국 이번에도 베이다이허 회의는 파티이지만 서로 간에 칼날을 겨누는 홍문연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