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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 Jul 14. 2019

중국 계파의 발생과 갈등

시진핑 파벌 대 장쩌민 파벌

중국의 성립 이후 지금까지 중국 공산당 내부의 권력 투쟁은 투쟁한다는 사실 만을 알 수 있을 뿐 현재 진행 중인 권력 투쟁 내용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길이 공개적으로 제공된 적은 없다. 폐쇄 사회의 이런 특성을 두고 과거에는 '죽의 장막'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지만 정보화 사회가 발전한 지금은 그나마 조금씩 관련 정보들이 직간접적으로 흘러나온다. 


이러한 중국 공산당 내부의 계파 형성, 계파 현황, 그리고 투쟁 상황 등을 이해하려면 적은 양의 정보에 기댈 수밖에 없어 작은 정보에 기초한 추론이 주를 이루게 되며 이 추론을 위해서는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경과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산당 계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작점을 천안문 사태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큰 사건이기도 하지만 중국 공산당 내에 사상적 분열이 일어난 최초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전에도 사인방 사건과 같은 것이 있었지만 사상적 분열이라기보다는 권력 남용과 권력 투쟁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안문 사건은 민주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로 중국 공산당 내부가 분열된 사건이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등샤오핑은 리펑 등이 보고하는 왜곡된 정보를 기반으로 의사결정을 하여 진압을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당시 국가 주석이었던 자오쯔양(赵紫阳)은 실각하여 가택 연금되어 17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나고야 만다. 이때 자오쯔양의 남은 국가 주석 임기 3년을 대체하게 된 사람이 장쩌민이다. 물론 장쩌민이 주석이 된 것은 당시 권력자였던 등샤오핑의 생각이었다.

장쩌민은 자오쯔양의 3년 임기를 채우고 다시 국가 주석이 되어 전례에 따라 연임함으로써 13년간을 중국 국가 주석으로 군림했다. 사실 장쩌민 주석이 무슨 국가사업을 했는지 필자는 아무런 인상이 없다. 오히려 당시에는 주룽지(朱镕基) 총리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부패한 관료 사회에서 분투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이 시기 장쩌민은 사방에 자기 사람을 심는데 주력했고 이 사람들이 바로 소위 상해방에 속한다. 사상에 의한 것이 아닌, 중국 공산당 본격적이고 지속적인 파벌의 형장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등샤오핑이 장쩌민에게 주석직을 줄 때 소위 :격세 후임 지명"이라는 것을 하였다.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차지한 후 지도자인 마오쩌둥의 전횡으로 대약진 운동, 문화 대혁명 등을 일으켜 나라가 어려워지는 경험을 한 이후에 이러한 일인독재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하여 취한 조치가 바로 "집단 지도 체제"와 "격세 후임 지명"이다. 


집단 지도 체재는 권력을 한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고 복수의 사람들에게 분산시켜서 나름대로의 견제와 균형을 도모한 것이다. 그리고 격세 후임 지명은 지도자가 은퇴할 때 반대파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자기 사람을 계속 지명하면 결과적으로 일인 독재에 준하는 폐습이 나타날 수 있고 부패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후임이 아니라 후임의 후임을 지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후임 지도자도 자기 후임이 전임 지도자의 지명을 받은 사람이므로 자신이 은퇴할 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일종의 절충이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후진타오(胡锦涛)

등샤오핑이 장쩌민에게 주석직을 줄 때 후임으로 지명한 것이 후진타오(胡锦涛)이다. 후진타오는 소위 홍얼다이(红二代)가 아닌 순수 관료 출신으로 지금은 공청단 출신이다. 차기를 지명받은 사람은 주위에 권력을 따라 사람들이 모이기도 하지만 신변의 위험도 극단적으로 올라간다. 후진타오의 경우에도 자중에 자중을 거듭하며 때를 기다려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후진타오가 정작 주석에 취임했을 때 소위 홍얼다이(红二代)들은 후진타오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모가 혁명 원로들이며 국가의 고위직을 장악하고 있는 들은 홍얼다이들 또한 국가 요직을 장악하고 있는데 후진타오는 말하자면 직원의 신분으로 자기들과 같은 오너 계열이 아니라는 정서가 강했다고 한다. 거기에 장쩌민이 직위는 물려주었지만 권력은 물려주지 않았다. 장쩌민은 계속 최대 권력자로 남아 실권을 행사했고 이는 후진타오 재직 10년간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후진타오를 중심으로 뭉친 그룹들을 공청단 출신이 많다 하여 공청단 파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난번 쓰촨 성 은천에서 대 지진이 났을 때 당시 웬자바오 총리가 군대의 동원을 명령했으나 해방군이 당신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며 무시한 일은 바로 이 후진타오 파벌의 무력감을 대표적으로 말해주는 사건이다. 다음 날 장쩌민의 전화를 받고서야 해방군은 은천에 병력을 급파하였고 어쨌거나 온 군대를 웬자바오 총리가 환영하자 "나는 옛 지도자의 말씀을 받들어 온 거요"라고 부대장이 말했다고 한다.


결국 후진타오 파벌은 무력감 속에 지내다가 임기를 마치게 되는데 이때 후임 문제가 불거진다. 장쩌민이 밀고 있는 보시라이(薄熙来)를 후진타오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보시라이는 대중들에게는 인기가 많았으나 주변 지도층 인사들 사이에서는 독단적이고 오만하여 거부감들이 많았다. 후진타오로서는 위협적으로 느낄 만했던 것이다. 후진타오가 추천한 인물은 리웬차오(李源潮)였다. 하지만 이는 장쩌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시라이(薄熙来)와 리웬차오(李源潮)


결국 이들 사이에 진전이 없자 후진타오가 장쩌민이 추천한 인물에 대해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결을 제안, 결국 장쩌민이 후진타오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인물을 발탁하여 추천한 것이 시진핑(习近平)이다. 시진핑은 당시 중앙 무대에 갓 진입한 인물로 아버지는 习仲勋으로 혁명 원로여서 홍얼다이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대인 관계가 원만하여 장쩌민 파벌과 후진타오 파벌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는 인물이었다. 후진타오는 시진핑을 받아들여 시진핑은 18대에서 주석으로 취임한다. 홍얼다이들은 시진핑 주석 취임으로 더 큰 힘을 얻었으며 이들을 통칭 태자당으로 분류한다. 사실 태자당은 과거 지도자들의 소수 자녀들을 지칭하는 말이고 세대가 3세대로 확대되며 당뿐만 아니라 관, 산업계로 퍼져나가 최근에는 태자당이라는 표현보다는 홍얼다이라는 말을 더 자주 매체에서 볼 수 있다.

시진핑(习近平)

하지만 이는 외부의 시각과는 달리 시진핑의 권력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후진타오가 국가 주석을 수행하며 겪는 어려움, 위험, 그리고 굴욕을 지켜본 시진핑은 자신의 입지가 후진타오 보다도 취약하며 더 큰 굴욕과 어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진핑의 주석 취임을 가장 반긴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홍얼다이들이다. 그동안 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만든 것은 자기들이라고 생각하던 홍얼다이들로서는 관료 출신들이 아닌 자신들과 같은 홍얼다이 출신의 시진핑의 국가 주석 취임이 반가웠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들 중 첩보, 정보 계통을 장악하고 있던 이들이 시진핑을 찾아가 이제 우리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정보 계통을 이전해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정보, 첩보 계통은 물려주지 않으면 받을 수 없지만 받으려 한다고 받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데 있다. 첩보 계통은 나름대로 자기주장이 강하고 권력자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성향이 있다.

마젠(马建)

시진핑이 첩보, 정보, 공안 계통을 접수하는데 실패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먼저 마젠(马建)이다. 마젠은 오랫동안 공안 계통에서 첩보 쪽을 담당해온 인물이다. 그런데 시진핑이 마젠을 부패 혐의로 체포하여 처벌한 것이다. 마젠은 무기 징역을 살고 있다. 시진핑이 실패했던 마젠이 반항했던 결과는 공안 계통을 시진핑이 장악하는데 실패했음을 시사한다.


시진핑은 민심을 얻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력한 반 부패 운동을 실시한다. 중국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최근 4, 5년간 당국이 조사한 부패 사건 통계는 다음과 같다. 

• 최근 5년간 반 부패 혐의 조시 건수 154만 건

• 관련 관료 153만 7천 명 이상

• 사법 처리 5만 8천 명


대만 대학 명거정 교수가 상위 1만 명 사법 처리된 관료의 파벌을 분류한 결과로는 70%가 장쩌민 파벌 핵심 인사, 15%가 장쩌민 파벌 인사, 15%가 후진타오 파벌 또는 시진핑 파벌이라고 한다. 결국 반 부패를 명분으로 장쩌민 일파를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시진핑 주석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장쩌민 일파는 워낙 뿌리가 깊어 아직도 시진핑 파벌과 장쩌민 파벌과의 충돌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쩌민 파벌이 견디고 있는 이유는 출중한 인물이 시진핑에게 잘 대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이는 다름 아닌 정칭홍(曾庆红)이다.

정칭홍(曾庆红)

정칭홍은 과거 장쩌민의 책사이며 숨은 동반자 역할을 했으며 두뇌가 비상하고 체력 또한 남달리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중국의 공안, 정보, 첩보, 특무 쪽을 장기간 담당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홍콩, 마카오, 타이완을 담당해 왔었다. 그의 존재는 시진핑이 공간, 첩보 쪽을 장악하지 못한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면이 있다. 정칭홍은 수완가로서 과거 장쩌민을 위해 잠재적 위협이었던 챠오스(乔石)를 70세 정년제 도입으로 은퇴시키고, 은퇴 연령이 되지 않은 리루이환(李瑞环)은 소위 '7하 8상', 즉  68세가 되면 가급적 은퇴해야 한다는 정책을 만들어 처리해 버렸다. 현재 장쩌민 일파를 현실적으로 이끄는 인물은 바로 이 정칭홍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홍콩에서는 연일 반 중국 송환 법을 외치며 반 중국 공산당 및 민주화를 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의 열망은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런데 그중 홍콩 의회를 점령한 사건에서 몇몇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주도한 사람들이 홍콩 사람 같지 않다던가, 이들이 팔에 인식표가 있다던가 등 중국 본토의 공작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혹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칭홍 그룹이 시진핑 일파를 대상으로 하는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시각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징후가 발견되면 시진핑 그룹이 무력을 동원할까 걱정도 하고 있다.


중국의 계파에 대한 이해는 중국 공산당의 정책 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내재 인수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정확하고 투명한 정보가 아니기에 자칫 잘못 해석하면 커다란 오판을 가져올 수도 있다. 결국 신중하게 지켜보며 분석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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