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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PB자랑

2025시즌 달리기를 갈무리함

by 오제명

소소한 PB 자랑. 10K기록을 겨우 몇 초 줄였을 뿐이지만, 2년만의 PB이니 몇 마디 소회를 남겨 놓는 걸로.

매일이 PB이던 축복의 시절이 지나고부터는, ‘거울나라의 앨리스’의 붉은 여왕처럼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가 고작이었던 시간이 이어졌다. 가져다 쓸 핑계도 일찌감치 다 떨어지고, 식상한 핑계를 돌려가며 이어가던 구차한 러닝 라이프.

욕심을 내려놓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식어가던 열정. 익숙함과 바꿔버린 근성. 쥐가 나고 숨이 차 걸을지언정 끝까지 밀어붙여 본 적이 언제였던가. 올해도 연습은 부족하고, 체중도 불었고, 빠지기 싫은 술자리도 많았지만, 그런 핑계는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도 빠지지 않고 깔릴 밑밥들.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진 말자. 뛰다 지쳐 걷더라도 끝까지 해보자는 마음. 올가을은 일단 ‘도전’을 목표로 삼았었다.

[서울 부산을 오가며 달리긴 했는데 체계적이진 못해 아쉽다]


첫 번째 도전은 하프. 추석 연휴인지도 모르고 덜컥 신청했던 춘천연합 마라톤. 일주일 전 대회를 설욕하기 위해 나름 온몸에 물을 뿌려가며 뛰었지만 누적 250미터의 업다운을 이기지 못하고 PB 대비 1분 늦은 기록.

두 번째 도전은 경주동마 풀코스. 언제나 불안한 페이스 세팅. 불어버린 몸무게가 걱정스러웠지만 1분이라도 기록을 줄이는 도전적인 페이스로 선택. 식도염 탓일까. D조 출발의 병목에서 너무 많은 힘을 낭비한 탓일까. 38킬로 지점에서 온몸을 돌아가며 올라오는 근육경련으로 아슬아슬했던 리듬이 끊어져 버리고. 겨우 완주로 마무리. 그래도 평소의 최선보다 더 짜냈다는 느낌 하나로 애써 정신 승리.

[완주 직후. 분한 마음이 다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기념촬영]

그리고 현실적으로 올해 마지막 도전이었던 부산바다마라톤 10K. 광안대교 위에서 출발하는 코스 구성상 PB가 가장 유력했던 대회. 이 기회까지 놓치면 올해 달리기 농사도 수확 없이 끝날 위기. 이번 풀코스 준비 과정에서도 스피드 훈련이 가장 소홀했던 부분이라 불안하긴 했지만 41분대를 목표로 출발. 다리 위 오르막 1.5K는 4분 15초. 여기서 까먹은 10초는 내려가는 급경사 구간에서 회복하고, 나머지 구간은 4분 5초로 가는 플랜. 계획은 그럴싸했지만, 당연하게도,

첫 오르막부터 4분 20초가 넘어가는 페이스. 불안한 마음에 조금 더 힘을 내서 내리막을 밀다 보니 어찌어찌 5K 20분 30초를 맞췄는데, 호흡이 엉키고 옆구리가 땡기는 느낌. 점점 숨이 차고 힘이 드는 게 덜컥 완주가 걱정되고, 잠시 멈추고 싶은 생각이 목끝까지 치고 온다. 급수대에서 약간의 실수로 시간을 허비하고 나니 뒤에서 뛰던 주자들이 하나둘 나를 제치고 지나갔다. 레이스 플랜의 실패가 선명해지자 귀신같이 페이스도 10초쯤 떨어진다. 겨우 버티며 뛰는데 주로 옆에 낯익은 영화님이 보인다. 인사를 했더니 같이 달리며 영상을 찍어주신다. 찍히는 동안이라도 힘을 내 보자. 자세는 무너지고 의지만 가득한 영상이 남았지만 덕분에 페이스를 잡고 이제 남은 2K. 이번에는 익숙한 싱글렛을 입은 뒷모습이 시야 한쪽을 스쳐 지나간다. 몇 해 같이 운동했던 기석이 형의 뒷모습. 예전처럼 뒤에 붙어서 뛰기엔 무리인 페이스. 등은 놓쳤어도 시야에서는 놓치지 말자는 마음으로 얼마간 버티다 보니 수영강을 건너는 익숙한 다리가 보인다. 저 다리를 돌고 나면 짧은 내리막. 그리고 왼쪽으로 꺾자마자 100미터 지점에 있을 피니시. 몇 번을 뛰어 익숙한 코스. 다리의 중간을 넘자마자 페이스를 올려본다. 이제부터 숨차게 달려도 퍼지지 않고 마무리는 가능한 구간. 400미터 한개. 끝까지. 결승선을 통과하며 본 공인 시계는 42분 10초대. 아, 또 10초 차이로 41분대도 못 찍은 것인가. 1킬로당 1초만 줄였어도. 늘 그렇듯 밀려오는 아쉬움. 그나마 이번에는 후련하게 쏟아낸 덕인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기록을 정리하려 어플을 켜는데 10K PB 알림. 41분 37초. 공식 기록보다 빠르다는 게 처음엔 의아했지만, 대회 코스가 약간 길었다는 후기들을 보고는 빠르게 인정!! 소소한 PB에는 넘치는, 소설 만큼 긴 후기지만. 뭐 그래도 좋다. 2년 만에 앞으로 내딛은 한 발인데 이 정도 유난쯤은 괜찮지 않을까.

[2년만의 작은 성취에 아낌없는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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