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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W Dec 08. 2018

Zn

배터리 교환형 전기차의 교훈

2000년대 초반, P사 신사업팀의 에너지 관련 신사업 인수·합병을 검토할 전문가로 초빙받은 적이 있었다. P사는 당시에는 탄탄한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던 최고의 기업이었다. 미래성장동력을 갖추기 위한 신사업으로 에너지 쪽을 한참 탐색하는 기업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검토할 대상 사업은 비밀이었기에 당일 회의 현장에서 자료를 보기로 양해 요청을 받았다. 도착하여 보니 연료전지 쪽 대전의 모 박사님, 그리고 이차전지 쪽 모 박사님도 초빙되어 와 있었다. 참석자도 현장에서야 공개할 정도로 나름 심각하게 보고 있는 사업이었다. 이윽고 실무담당자에 의해 사업 개요가 오픈되었는데, 사전 인지 없이 검토한 사업은 바로 『Zn-Air 일차전지를 이용한 배터리 교환형 전기차 비즈니스』였다.


《Zn-Air는 일차전지이기 때문에 재충전이 안 되지만, 배터리 팩을 재분해하여 ‘극판과 부품 재생' 공정으로 ‘재생 Zn-Air 일차전지’를 만든 후, 곳곳에 있는 교환 스테이션에서 실시간으로 교환하여 다시 도로로 나갈 수 있는 배터리 교환형 전기차 비즈니스를 하는 사명불명의 미국 기술 벤처》의 인수ퟁ·합병에 앞서 국내 전문가의 의견을 묻고자 초대 받았다. 당시 P사 건물 회의실에서 이미지의 미국 기술 벤처를 인수ퟁ·합병하여 국내에 교환 스테이션을 설치하고 배터리 전기차를 보급하는 비즈니스 모델에 국내 환경에 맞는가에 관해 치열한 논의가 이뤄졌다. 대개 기술 벤처 인수ퟁ·합병을 검토할 때는 뜬구름 잡는 아이디어에 혹해 진행될 때가 많았던지라 자료만으로 딱히 매력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전달했고 P사 측에선 그럼 일간에 일정을 잡아 미국으로 실사를 가보고 판단하자는 선에서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이후 인수ퟁ·합병 계획이 무산되었는지 더는 연락이 없었고 P사가 그 사업을 진행하지도 않았다.  


2000년대 초반은 GM EV1의 사업 중단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캘리포니아 주에서 여전히 실제로 운행 중이었기 때문에 많은 기업이 배터리 전기차를 신사업으로 관심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연축전지와 Ni-MH 이차전지는 배터리 전기차에 부적합하다는 시각도 조금씩 나왔고 ‘차세대’ 리튬금속폴리머 이차전지는 뜬구름만 보여주고 있는 상황에서 Zn-Air 일차전지는 충분히 매력적인 ‘떡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더 나간 이들은 Zn-Air 이차전지를, 더 나아가 Metal-Air 이차전지로 떡밥을 던지던 시절이다(알만한 사람들은 알고 모르는 사람만 모르는 건데, Zn-Air 이차전지는 이차전지 분야의 아주 오래된 ‘쉰 떡밥'이다). 기실, 이 미국 기술 벤처는 상당히 합리적으로 접근했었다. Zn-Air 이차전지라는 무리수로는 투자자들에게 통하지도 않을 것을 알고 있었는지, 방전한 Zn-Air 일차전지를 무리하게 충전하거나 조금만 개선하면 이차전지로 개발할 수 있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차전지를 정비하여 셀 구성요소를 교체'함으로 쌩쌩한 ‘재생 일차전지’로 만들고, 소모된 전극 등 부품은 재생 과정을 거쳐 재활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생 Zn-Air 일차전지’를 공급받아 가진 ‘교환 스테이션'이 이 비즈니스의 또 다른 핵심요소였다. 여기에 더해, 교환한 Zn-Air 일차전지 팩 하나로 ‘1000 km’ 정도를 달릴 수 있는 배터리 교환형 전기차는 내연기관 자동차보다도 주행거리가 길다는 게 미국 기술 벤처가 내세운 또 다른 강점이었다.


이 모든 게 2000년대 초반에 일어난 일이다. IT 캐스터들의 맥락 없는 최신 동향에 익숙한 지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 다들 의아해한다.


“배터리 교환형 전기차는 이스라엘 벤처 베터 플레이스가 르노와 2000년대 후반에 창출한 삼박한 비즈니스 모델 아니었어? 그러다 2013년에 사업 접었잖아.”


그런데 말이다. 원래 일차전지로도 배터리 전기차가 시도되던 아주 오래전에는 당연히 다 쓴 일차전지는 교환하는 방식이었고, 모바일 IT도 이차전지 비중이 올라가기 전에 ‘다 쓴 배터리는 버리고 새 배터리로 교환'하는 게 당연시되던 기존 패러다임이었음을 망각하고 신기술인양 시도한 사례의 좋은 예가 바로 ‘배터리 교환형 전기차'였다. 미국 기술 벤처가 당시 이차전지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회 사용시간이 긴 Zn-Air 일차전지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려는 아이디어까진 좋았다고 앞서 밝혔지만, 늘 그러하듯 아이디어는 구체화 단계에서 디테일이란 악마와 만나 그 실체가 드러난다.


소위 배터리 교환형 전기차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배터리 팩 총 개수가 보급된 배터리 전기차 대수보다 늘 더 필요하다. 최적화된 물류 및 교환 스테이션 배치를 통해 최소한의 ‘여분의 배터리 팩' 확보와 최소 물류비용을 달성한다 하더라도 안 그래도 비싼 배터리 팩 비용을 줄일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교환 스테이션과 자동 교환 메커니즘들도 배터리 일체형 전기차에 비하면 잉여 투자이다. 그래서 배터리 교환형 전기차는 초창기부터 자동차 제조사들 입장에선 배터리 제조사만 좋은 일 시키는 거라며 난색을 보이는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거기에 더해, 채용할 배터리 팩 사양과 운용 모델이 극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 모델의 최강점은 ‘충전시간이 필요 없다’는 점과 ‘고속충전(급속충전이라고도 한다)으로 인한 배터리 팩 추가 열화’ 문제가 없다시피 하며 충전 인프라 구축 비용도 줄일 수 있다(물론 배터리 교환형만으로 구축했을 때 장점이므로 배터리 일체형과 혼재되면 사라지는 장점이다).


그런데 말이다. 심지어 전문가들조차도 종종 빠지는 함정이 있는데, ‘비판 없는 아이디어 차용’이다. 배터리 교환형 전기차와 배터리 일체형 전기차를 셀폰처럼 생각하여 모바일 IT 쪽의 교체형과 일체형 차이만 생각하고 그대로 차용했다가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문제는 배터리 교환형 전기차의 배터리 팩 크기와 에너지양이다. 배터리 교환형 전기차 비즈니스를 검토할 때는 배터리 일체형 전기차의 배터리 팩 비용을 넘어서게 되면 정부 실증 사업 때 말고는 수익성이 줄어들고 초기 투자 비용도 증가하므로 민간이 맡기엔 난감한 사업이다. 또한, 배터리 전기차 전문가와 함께 물류 전문가의 최적화 설계 능력이 필요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배터리 팩의 에너지양은 ‘교환 스테이션’에서 배터리 팩 교환이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하므로 저에너지밀도의 저가 배터리 팩으로도 운용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만일 배터리 일체형 전기차의 배터리 팩 비용보다 줄이도록 설계할 수 있는 사업자가 나오면 금상첨화일 거다(배터리 일체형 전기차와 동일급의 배터리 팩을 추가로 준비하여 이 실증 사업을 하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짓은 없다. 셀폰에선 배터리 팩 단가 백분위가 워낙 낮으므로 일체형만큼 고에너지 밀도의 교체용 배터리 팩으로 설계해도 괜찮다).


두번째 문제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필자는 2000년대 초반 P사 사업 자문 때 고민했던 것을 토대로 배터리 교환형 전기차를 상정하여 배터리 전기차 진입 장벽을 낮추는 방안으로 ‘배터리 팩 리스’ 방식을 고안했고 필자의 저서인 《그린카콘서트》에 배터리 교환형 전기차 비즈니스의 한 옵션으로 수록하였다. 배터리 팩 가격이 워낙 비쌀 때의 보급촉진책으로의 궁여지책형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할 수 있다. 이후 우연의 일치로 배터리 교환형 전기차를 시도했던 르노 측 RCI 방크에서 배터리 전기차 리스의 「한 옵션」으로 배터리 팩 리스도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차는 소유하되 차량의 최고가 부품인 배터리 팩은 관리 프로그램을 더하여 ‘빌려 쓰는 방식’이었다.


필자가 고안한 비즈니스 모델은 순전히 배터리 교환형 전기차를 상정한 것이었고 RCI 방크는 모든 타입의 배터리 전기차 리스의 추가 옵션 계약이었던 거다. RCI 방크 비즈니스는 배터리 팩 가격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에 맞춘 것이라 볼 수 있지만, 필자가 고안한 배터리 팩 리스는 배터리 팩의 가격이 지금보다 고가일 때 유효하며 효과적이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에서 사업하던 베터 플레이스가 무너질 때 즈음에 공교롭게도 제주도 배터리 전기차 실증 사업으로 배터리 팩 리스가 포함된 채 모집 공고가 나갔는데 산업부 담당과 담당자들은 르노의 아이디어를 따왔다 주장하나 근거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중앙행정부처의 댓가 없는 잦은 표절은 익히 경험한 터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무전략적인 산업부의 접근으로 인한 무절제한 예산 낭비이다. 당시 제주도 사업 공고문에도 제주도 배터리 전기 버스, 택시 등의 실증 사업 비즈니스 모델은 특수목적법인 형태의 사업제안자에게 전적으로 맡긴다고 되어 있었다. 그럴거면 아예 실증 사업 자체의 지정 공모 사항이 없었어야 할 부분이다.

배터리 교환형 전기 버스의 내관 / 출처: (주)비긴스

제주 배터리 교환형 전기차(버스, 택시, 그리고 렌터카)와 교환 스테이션 사업은 이미 국외에서도 크게 한 번 실패한 상태인 방식의 재도전이라 볼 수도 있다. 중국 TAIGI 그룹에 인수된 TGM((전) 한국화이바)이 생산한 2세대 배터리 전기 버스(특징은 2개의 하이에너지 이차전지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를 기반으로 하는 등 개선을 꾀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도 과연 실패한 《제2의 저속 전기차 보급 사업》이 될지에 대해 우려가 깊어진다. 늦었다 생각할 때가 외려 이를 때이니 고칠 수 있을 때 고쳐 더 나은 길로 가길 바란다.

배터리 교환형 전기 버스가 제주도 도로를 달리는 모습 / 출처: (주)비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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