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팀장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비슷한 질문을 반복해서 듣게 된다.
“이제 제 경험은 다 무용지물 되는 거 아닌가요?”
“AI 앞에서 제가 너무 낡아진 것 같아요.”
AI가 기획서를 30분 만에 만들고, 데이터 분석을 순식간에 끝내는 시대다. 15년, 20년 쌓아온 경험이 한순간에 구형 기술처럼 느껴진다는 말도 이해가 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최근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을 떠올린다. 그리고 혼자서 이렇게 묻는다.
“김부장이 AI를 활용할 줄 알았다면, 그는 그렇게 회사에서 밀려나지 않을수 있었을까?”
이 드라마에서 내게 아직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두 개 있다.
첫 번째는 김부장이 팀장이었을 때의 장면이다.
이게 같은 색깔이야?
회의실에서 막내 팀원이 만든 PPT를 보며 김부장은 팀원 뒤에 서서 말한다.
김부장 : "이 빨간색 뭐냐? 인쇄물이랑 파일 색이 같아?”
팀원 : “부장님, 인쇄되면 좀 달라 보이는 건데…”
김부장 : “눈으로 봐도 다른데, 이런 것도 구분 못 해? 이게 같아?”
팀원 : “요즘엔 레드도 톤을 낮추는 게—”
김부장 : “아, 그냥 죄송하다고 하고 끝내.”
김부장은 자신의 경험과 감각을 근거로 팀원을 몰아붙인다. 팀원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수정한다. 김부장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의 주장이 검증되지 않은 감각이었던 것이다.
만약 김부장이 그 때 AI를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프롬프트에
“이 두 색상의 RGB 값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려줘.
그리고 프레젠테이션 가독성 관점에서 문제가 되는지도 확인해줘.”
그럼 AI는 아마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했을 것이다.
그럼 김부장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확인해보니 정말 미묘하게 다르네. 기준상 혼동될 수 있어. 이 부분만 같이 고쳐보자.”
같은 지적이라 하더라도 전혀 다른 리더십으로,
꼰대가 아닌 기준을 제시하는 리더로,
거듭날 수 있었을 것이다.
넌 공장 안가
두 번째 장면은 조금 결이 다르다.
김부장이 회사에서 밀려난 뒤 우여곡절 끝에 세차 일을 하고 있을 때다. 어느 날, 자신의 정적이었던 후배 도부장을 만난다. 도부장이 그날 상무 승진에서 미끄러진 직후 이를 한탄하는 장면이다.
도부장 : “백상무가 저 공장 보내버릴지 몰라요.”
김부장 : “못 그럴 거다. 백상무도 니가 있어야 전무를 달 수 있거든.
그게 회사가 너랑 백상무를 활용하는 방식이야.”
이 판단에는 데이터도 없고, 차트도 없고, 기준도 없다. 하지만 나중에 이 말은 현실이 된다. 왜일까? 이건 정답을 맞히는 문제가 아니라 방향을 잡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건 AI가 계산할 수 없는 영역이다
누가 누구를 필요로 하는지,
이 조직은 사람을 어떻게 쓰고 버리는지,
지금 포기하면 무엇을 잃게 되는지,
이건 AI가 계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사람을 오래 경험한 리더만이 가질 수 있는 판단이다.
만약 도부장이 같은 질문을 AI에게 던졌다면 아마 이런 답이 돌아왔을 것이다.
“최근 3년 KPI는 상위 15%입니다. 다만 리더십 역량 점수가 동기 대비 2.4점 부족합니다. 경쟁 후보의 대형 프로젝트 수주 실적이 승진 실패의 결정적 요인입니다.”
완벽하다.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정답이다.
하지만 이 정답이 승진에 실패하고 인생 전체를 부정당한 것 같은 사람의 마음에 과연 닿을 수 있을까.
김부장이 던진 건 ‘답’이 아니었다 김부장의 진짜 역할은 답을 알려주는 데 있지 않았다.
그는 도부장에게 다음 질문을 던진다.
“넌 왜 임원이 되고 싶었냐?
왜 안 됐는지 말고, 왜 그렇게 바둥바둥 살았는지부터 솔직해져 봐.”
이 순간, 대화의 차원이 ‘승진 실패’에서 ‘삶의 방향’으로 바뀐다.
AI는 다음 승진 전략을 제시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승진이 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었냐”
이 질문을 대신 던져주지는 못한다.
정답의 판단, 방향의 판단 김부장의 두 판단은 전혀 다른 종류였다.
색깔 장면은 정답이 있는 판단, 도부장 장면은 정답이 없는 판단
AI는 첫 번째 판단을 아주 잘 도와준다.
하지만 두 번째 판단 앞에서는 침묵한다.
문제는 많은 팀장들이 이 두 판단을 구분하지 못한 채 흔들린다는 점이다.
AI는 '손'이고 김부장은 '눈'이다.
AI 시대에 밀려나는 건 경험이 아니다.
AI 때문에 경험의 중요성이 줄어든 게 아니다.
경험을 절대화하는 태도가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된 것뿐이다.
AI 시대에 진짜 위험한 리더는 자기 판단을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AI는 ‘손’이고 김부장은 ‘눈’이다.
신입에게 AI를 쥐여주면 이렇게 프롬프트를 입력한다.
“인사말 써줘.”
하지만 김부장은 이렇게 입력한다.
“보수적인 심사위원들 앞에서 신뢰를 주면서도 혁신적으로 보이려면 어떤 톤이 좋을까?”
이 질문은 오직 경험에서 나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이 팀원에게 지적할 때, 그건
"기준이 있는 판단인가. 아니면 감정에 가까운 확신인가"
당신이 누군가에게 “조금만 더 버텨”라고 말할 때, 그건
"책임질 수 있는 조언인가. 아니면 위로처럼 던진 말인가."
AI는 그 질문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질문을 더 정확하게 던질 수 있게는 도와준다.
김부장을 바꾸는 건 AI가 아니다.
AI 앞에서 스스로에게 질문할 줄 아는 리더다.
AI는 우리가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는 알려준다.
김부장은 우리가 어디로 달리고 있었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김부장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