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에 대한 고찰
소쉬르는 물질적 측면의 기표와 개념적 측면의 기의가 합쳐져 기호가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대부분 다중 의미체 즉,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다음은 다중 의미성에 대한 논문의 한 부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호가 갖는 다중 의미성은 기호의 오독을 낳을 수도 있는데, 이런 점은 기호적 훈련에 의해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으며 보다 중요한 것은 의미의 오해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그것을 인정하는 자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기호의 의미의 오해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독단(doxa)과 호전성은 바르트가 과학과 더불어 오만의 3가지 원천이라 지적한 바 있다.
<기호학적 방법론을 통한 그래픽 디자인의 의미 분석>에서
이 다중 의미성을 갖고 있는 기호는 오독을 낳을 수 있으며,
이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그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갖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나는 이 글을 보고 평소에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항상 모호하게 여기던 것이 떠올랐다.
이 아래는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중 유명하신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보면 모호하고
추상적 또는 시적으로 느낄정도의 작품들을 많이 보게 된다.
이런 작품들을 많이 보아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대학생 시절
그래픽이란 것이 벡터 이미지의 심플한 것 들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위의 작품은 김영나 다자이너, 슬기와 민의 작품이다.
단순 도형 동그라미, 세모, 네모, 또는 라인 들과 같은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슬기와 민의 경우 직접 저 작품의 의도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설명을 듣지 않고 그 의도를 알 수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단순 맥랑상 필요하여 두 분의 작품을 예시로 활용한다.)
위에서 언급하듯이 저것이 다중 의미성을 갖은 기호라고 생각하면,
수용자가 오독을 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이라면, 과연 디자이너가 하는 역할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단순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한 시각적으로 노이즈를 주기 위한 것에서 멈추게 되는 것 아닌가?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수업에서 기표와 기의를 다루고 있다.
나는 그 수업에서 보편성을 갖는 기호 또는 상징을 만들어
의미를 드러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선생님은 방향성을 잡아주시되, 자유성은 유지하려 하신다.
배우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끝까지 치닫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한단어를 개인적인 경험 기반으로 해석하여 그 단어를 분해하여
이미지 콜라주 방식으로 조합하여 상징으로 만든다.
나는 나름 이것 안에서 특수성을 걷어내고, 보편성을 얻어내려 하지만
(이것이 수업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것이 마음처럼 쉽지는 않다.
나도 추상을 좋아하고 시적인 것을 좋아한다.
그 안의 꽁냥꽁냥함은 내가 이 짓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내가 발견한 또는 느낀 특수한 관점들을 남들에게 공유한다는 것은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는 나만의 방법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생각하고 하는 것들이
과연 옳은 커뮤니케이션 방법이었는지 고민하게 된다.
게다가 주변의 많은 타인의 작품들을 비평적으로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 타인에 이미 알려져 있고, 나름 선구자로 알려져있는
유명 디자이너들의 작품들에도 이런 것들이 많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
나의 고민의 큰 문제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애송이인 나의 어리석은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디자인의 관점은
추상적인 것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있는 듯하다.
(앤디 워홀의 말과 같이, 단지 유명해지면 되는 것인가?)
시각적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함에 있어서 수용자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그래픽 디자이너의 요소이다.
하지만 함축함에 있어서 생기는 모호함들이 드러내야 하는 것들까지
흐리는 것이라면,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일까 하는 것이 나의 궁금증이었다.
(선생님은 이 궁금증에서 적당선을 찾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만약 불조심이라는 것을 수용자에게 전달할 때,
불과 엑스를 조합해서 그냥 전달하는 것뿐이라면,
너무나 재미없고,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존재 유무까지 모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