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산의 다이어그램
_거대 시공간의 기계
20세기 초반의 유럽은 도시 계획에 대한 관심사가 계속 이어진다.
급격한 산업화로 무질서와 혼돈이 심해지고 있었고, 이 상황은 당시의 모더니스트 건축가와 디자이너에게 시급하게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로 인식되었다. 이들이 제안한 다양한 해결안 중 가장 주목받은 것이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 계획안이었다. 그는 '거대 시공간 기계'라는 계획을 내세웠고, 그 계획안에 따르면 주거의 안전과 교통의 흐름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것으로, 도시인들에게 독특한 질서의 감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시각성의 인터페이스이기도 했다.
한네스 마이어도 르 코르뷔지에와 비슷한 전략을 취했는데, <코업 비트리인>은 도시에 대한 모더니즘적 상상력의 원천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공장의 생산 라인과 도시의 공간 배치 간의 유비 관계를 가시화하면서, ‘거대 시공간 기계’라는 은유의 기원과 그것이 지닌 강한 호소력의 근거를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_포스트 히로시마 시대의 도시계획
이 당시의 도시계획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핵전쟁 발발 시 대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대비책들도 양산되었다.
포스트 히로시마 시대의 도시계획은 모더니스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수학자 노버트 위너가 제안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방어 계획’은 이런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 대표적 사례이다.
1950년에 사이버네틱스 선언문인 <인간 존재의 인간적 사용>을 완성한 위너는 MIT 동료 교수들과 함께 특집 기사를 기고했다. 그 기사의 제목은 <미국의 도시들은 어떻게 원자 전쟁에 대비할 수 있는가>였다.
이 기사는 미국의 대도시에 원자폭탄의 투하를 전제하고,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묻고 있었다.
여기서 위너가 제시한 해법은 도시에 대한 은유로 인간의 신경망을 끌어오는 것이었다. 즉 뉴런들이 천여 개의 시냅스로 서로 연결되듯이, 도시의 기관들 역시 풍부한 여분의 교통로와 통신망을 확보해 다층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위너의 제안은 핵전쟁에 대비한 도시계획을 상상하는데 일종의 시발점이 되었고, 탈중심화된 도시 계획을 제안하기 시작한다.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계획은 시각적 차원의 투명성을 추구한 반면, 노버트 위너의 도시 계획은 커뮤니케이션 차원의 투명성을 선취하려 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투명성은 완연하게 다른 색채를 띠고 있다.
전자는 모더니즘의 유토피아적 전망 속에서 전능한 통제의 시선으로 도시의 공간 배치를 계획하려 했던 반면, 후자는 그러한 전망이 고갈된 상황에서 출발하려 했다.
하지만 수소폭탄의 개발로 뉴욕 같은 대도시를 단숨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새로운 무기의 등장은 이러한 도시 계획의 종지부를 찍게 만든다.
_이글루 화이트 작전 대 구치 땅굴
10년 후 SAGE시스템은 ‘이글루 화이트’라는 작전명 붙여진 감시. 폭격 자동화 시스템으로 진화했고, 위너의 도시 계획은 베트콩들이 만들어낸 게릴라 요새로 변모했다.
이글루 시스템이란 베트남 전쟁 당시, 수천 개의 센서들을 설치하여, 수백 킬로 미터 떨어진 잠입감시센터에 전송되어 스크린 위에 ‘하얀 벌레’ 모양으로 표시한다. 센터의 컴퓨터는 이 벌레의 이동방향과 속도를 계산한 뒤 베트콩이 확실하다고 판단될 경우, 정찰 중인 전투기에 예측 좌표를 전송한다.
하지만 이런 첨단 시스템에도 틈새가 생기게 마련이고, 베트콩들은 이것을 역이용하여 허위의 정보를 만들어서 적들을 유인하여 엉뚱한 장소에 폭격을 가하도록 한다.
구치 땅굴은 베트콩이 만들어낸 분산 구조의 군사 요새이다.
이것은 적들에게 노출되더라도 마치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부분적인 손실만으로 다시 복원되는 교통의 무한 구조물, 끊임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미로의 세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위너의 탈중심화된 도시 계획은 베트남 정글의 지하 세계를 경유해 분산의 다이어그램으로 진화한다.
_분산 네트워크와 세미라티스
베트남전 시기에 네트워크 이론과 디자인 방법론에서도 분산의 다이어그램이 등장한다.
전자는 “냉전 전략의 메카”로 불리던 랜드 연구소의 폴 배런이 제안한 ‘분산 네트워크'
후자는 수학자 출신의 디자인 이론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가 개념화한 ‘세미라티스’였다.
폴 배런은 1964년에 ‘잠재적인 파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래프 이론에 근거해 네트워크의 세 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중심화된 네트워크, 탈중화된 네트워크, 분산 네트워크가 바로 그것이다.
중심화된 네트워크와 탈중심화된 네트워크는 각각 허브와 결절점의 위계적 관계에 바탕을 둔 까닭에, 적의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배런은 이것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분산 네트워크다.
분산 네트워크에서 개별 단위는 마치 준-자율성을 지닌 대리체처럼 기능하면서, 외부의 간섭 없이 다른 단위와 연결된다. 따라서 네트워크는 중심이나 위계를 지니지 않으며, 개별 단위들은 상황의 추이에 따로 서로 연결될 수 있다.(유동적)
이듬해 디자인 방법론의 주도적 이론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일명 나무 이론의 주창자였다. 하지만 1년 후에 <도시는 나무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완전히 뒤집는 입장을 취한다.
디자인 프로세스는 분석과 종합이라는 두 단계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디자이너는 분석의 단계에서는 요구 사항을 명세화하면서 문제 요소들을 논리적으로 정의하고, 종합의 단계에서는 그 요소들에 대한 개별적인 해법을 구하고 이를 종합하여 최적의 해결안을 도출한다.
<도시는 나무가 아니다>라는 논문은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고속교통시스템 프로젝트의 실패에서 이어진 연장선이다. 알렉산더는 지하철의 기능과 관련된 390여 개의 문제 요소들을 추출했지만, 이내 자신의 방법으로는 우발적인 요인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이 시스템 과학에 의지했던 자신의 방법론적 접근, 그리고 더 나아가 모더니즘이 구상한 대단위 도시 계획들이 공유하고 있던 사유의 구조를 문제 삼는다.
나무 형식은 모더니스트들이 계획한 인공 도시들의 대부분의 근간을 두고 있는 형식인데, 이런 도시들은 군대 병영에나 적용될 법한 엄격한 기율을 거주민들에게 강요하고, 풍요로운 일상의 패턴이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한다.
즉, 개념적 단순화를 위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도시의 인간성과 충만함을 희생하게 된다.
이에 반해서, 세미라티스는 복잡한 조직망의 구조다. 그것은 살아 있는 대상이 만들어내는 구조이며, 위대한 회화나 교향곡이 성취해낸 구조인 것이다.
혼돈에서 질서가 부상하는 것은 디자이너가 부여한 명쾌한 위계의 질서 때문이 아니라, 요소들 간의 복잡다단한 중첩 관계 덕분이다. 따라서 디자이너가 현대 도시의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이 관계를 도외시할 경우, 디자이너는 도시에 내재한 세미라티스의 요소들을 임의적으로 발췌해 특정 관점에 따라 편집하는데 그치고 만다.
모더니즘 -> 포스트모더니즘 으로의 시대적 흐름을 보여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