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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woong Jul 18. 2016

인터페이스 연대기 <3장>_1

포촘킨 파사드, 벤투라와 고다르

        포촘킨 파사드 그리고 가상현실


포촘킨은 여대제의 크림 반도 순방으로 인해, 전쟁의 암울한 그림자를 걷어낼 묘안을 생각한다. 

그것이 여대제의 마차가 지나치는 길의 양편에 나무 벽을 세우고, 그 벽 위에 단정한 집을 그려 넣는 것, 이것이 포촘킨이 생각해낸 '가상현실'의 요체였다.


이후 인구에 화자된 이 이야기 덕분에, '포촘킨 파사드'라는 단어는 외관만 번지르르하게 꾸민 속임수라는 의미를 지닌 일반 명사로 사전에 등재되었다. 


1968년 가을,  벤투리와 스코트 브라운은 "맥도날드 로고의 포물선 각도"의 역사적 유래 같은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런 관심사의 연장선상에서 예일대 건축학과 학생들과 라스베이거스의 시각 문화에 대한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라스베이거스의 교훈>을 출판해,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될 디자인 명제를 제시하게 이른다. 


그것은 일사불란한 톨일성보다는 복잡다단한 모순이, 기하학의 투명성보다는 아이러니의 유머가,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보다는 버내큘러의 임기응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이동)




        공간적 인지를 넘어서는 이미의 쾌락


앞서 언급했던, 벤투리와 스코트 브라운는 여타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구별되는 일면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도시 경관에 대한 독특한 경험의 형식에서 자신들의 디자인 논리를 추출해냈다는 점이었다.

그는 라스베이거스의 66번가에 주목 했는데, 고속도로 변의 간판들은 조각적 형태 혹은 도상적 실루엣, 공간의 위치, 그 변형된 모양, 그래픽적 의미를 통해 메가 텍스쳐를 정의하고 통합한다. 

즉, 벤투리는 이 도로에선 건축물의 공간적 인지보다는 이미지의 시각적 '쾌락'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66번도로는 버내큘러의 수사학이 자연스럽게 녹아있고, 가장 생동감 넘치는 어법으로 대중들에게 말을 건네는 간판 문화의 원형인 것이었다. 

벤투리의 글에서 한번쯤 눈여겨봐야할 대목은 "멀리서 다가오는 단지 몇 초의 시간 동안"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이 암시하듯이 사실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하는 벤투리의 관점보다는 무엇보다도 자동차를 몰고 이 도로를 질주 했던 그 자신의 경험에 대밭을 두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자동차 운전 경험에서 유래한 색다른 도시적 감수성은 당시 신세대와 구세대를 가르던 중요한 척도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시 경험의 자화상을 살펴보면, 19세기 중반 파리를 배경으로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당시 산보객은 메트로폴리스의 탈영병이었다. 유유자적 하릴 없이 거닐던 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것은 바로 '마차'였다. 그들은 '마차'에 대항 하듯이 거북이와 보조를 맞춰 한없이 느린 속도로 거리를 거닐기도 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자동차가 마차의 자리를 대신하며 산보객을 거리에서 추방하기 시작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일화를 보면, 오후 6시가 넘어 자동차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면서, 이 겁없는 스위스 출신 산보객을 덮칠 뻔한 일이 일었났다. 이 경험으로 그는 이대로 방치하면, 자동차들이 도시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는 자동차 기반의 시공간 기계로 파리를 탈바꾼하는 계획에 착수하게 된다. 

바로 이 계획이 도시에 대한 모더니즘적 이성을 가장 강렬하게 구현했다고 평가 받는 <부아쟁 계획>이다. 


이 부아쟁 계획은 3대 자동차 제조업체였던 부아쟁의 투자를 기반으로 진행된 계획으로, 르 코르뷔지에가 도시의 성공 여부를 가늠한느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한 것은 '자동차의 속도'이다. 그러나 르코르뷔지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은 그다지 운전을 즐겼던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운전석이 아니라 언제나 거리의 자동차들을 멀리서 내려다보는 마천루의 전망대에서 머물러 있었고, 결국 투시도적 조감의 시선 역시 유통기한이 그리 길지 못했다. 


미국 초국적 자본의 지원으로 짧은 전성기를 누리던 모더니즘 디자인이 빠르게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첨단 무기들이 군사 기밀의 인장을 각인한 채 베트남 전쟁에서 시험 가동에 들어가던 시기, 바리 이 기묘한 역사적 시공간이 벤투리 같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모더니즘의 이상을 마음껏 조롱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벤투리의 말을 빌리면 "명확한 것은 '시각 오염'이 대기 오염이나 수질 오염 같은 현상과는 다른 질서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땅, 대기, 물을 오염시키는데 '좋은'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간판들이 가득 들어찬 거리에서, 시각적인 것을 오염시키는 '좋은' 방법을 습득 할 수 있다. '시각 오염'이 전부 나쁜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이토록 매료시킬 수 있겠는가?(완연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말이다)



        하이리얼리티와 인터페이스


벤투리는 자동차를 타고 라스베이거스의 거리를 누비던 경험이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벤투리에게 자동차는 하나의 '인터페이스'로 작용 했고, 그에게 '움직이는 시선'을 건네주었다. 

일단 자동차 인터페이스는 운전자에게 쇠덩이를 움직이는 감각의 생생함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주목해보자. 핸들의 속도계,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 페달 등은 운전자에게 차체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인터랙션을 통해 차체화 일체화 하는 감각을 제공한다. 


다음 단계는 시선의 동질화인데, 여기서 운전석과 탑승객 좌석은 극장의 관객석 같은 역활을, 차체 유리창은 일종의 여과 장치 역할을 떠맡는다. 전자는 거리를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를 특정한 방향으로 고정하며, 후자는 실제거리와의 접촉을 차단한채 여타의 외부 자극으로 부터 시가적 자극을 분리해낸다. 청각이나 후각의 이물질을 걸러낸 채, 정면과 측면에서만 도시의 경고나을 바라보는 차체 내부의 시선, 여기에 질주의 속도감이 결합되면, '움직이는 시선'이 완성된다. 그리고 차체의 진동, 메마른 엔진 소음과 어울려 이 시선의 현실감을 배가하는 역할을 한다. 이 단계로 진입하면, 폴 비릴리오의 지적대로, 차체 공간의 창은 "새로운 속도의 차원에서 세계를 경하게끔 해주는 일종의 "스크린"으로 기능하게 된다.


벤투리가 언급한 '기호들의 메가텍스쳐'란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 도시의 경관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1967년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현대적 생산 조건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살아 숨쉬던 삶의 모든 측면들이 재현의 차원으로 퇴각한다"라고 지적한바 있다. 


이것은 문화적 인터페이스가 일상생활에서 지속적으로 증식한 결과로, 신체적 경험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기호와의 커뮤니케이션이 강조되는 상황에 대한 진단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표현처럼 이 하이퍼 리얼리티의 세계에서 "육체, 경관, 시간은 모두 장면으로 사라지며, 시뮬레이션의 기혹하이 감각의 현상을 대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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