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의 인터페이스
_편집증적인 망상과 사이버스페이스
1950년는 풍요와 냉전이라는 양면성은 불안한 포즈로 동거를 하는 시기이다.
이런 상반되는 개념이 치열하게 부딪치는 긴장의 시기를 돌파하려는 강박적인 움직임이 발생한다.
이 세계가 빅브라더가 연출한 허구의 무대이며 가짜들의 신기루일 것이라는 믿음, 진실은 언제나 저 너머에 있다고 믿는 엑스파일의 음모론적 세계관이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편집증적인 망상이 저 너머의 세계에 대한 집착에 머무르지 않고, 빅브라더의 무대를 창조하려는 기술적 시도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실제로 일군의 과학자는 자유로운 가상의 공간을 발명하려 했고, 이후 가상현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이 시공간은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멘서>에서 "사이버스페이스"로 불리기도 했다. 깁슨은 이 개념을 미래의 프로그래머 들이 데티어의 시각적 표상을 통해 공감각적 환상을 경험한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표현을 빌려 표현하면 "냉전시대에 개발된 군 실험용인 머리에 쓰는 헬멧과 기초적인 그래픽 프로그램의 결합물"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_가상세계의 시뮬레이션 엔진
인터페이스의 역사에서 SAGE 시스템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스크린 기반 인터페이스의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여러 인터렉션 관련 소프트웨어 개발도 촉진시켰다.
최초의 커뮤펕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알려진 '스케치패드'도 SAGE프로젝트의 수많은 부산물 중 하나였다. 이 프로젝트는 당시 22세의 대학원생이었던 이반 서덜랜드에 의해서 실행되었다.
서덜랜드에게 스케치패드를 착상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준 것은 MIT 링컨 연구소의 TX-2 컴퓨터였다.
TX-2의 등장으로 인간-컴퓨터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진행되었는데, 서덜랜드의 스케치패드도 그중 하나였다.
스케치패드는 사물을 그리는 도구체 그치지 않고, 사용자 자신이 구현하길 원하는 법치에 복종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스케치패드는 투시도법의 원리를 고스란히 알고리즘으로 복제했지만, 또 다른 가능성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다양한 알고리즘을 통해 추상적 데이터를 지각 가능한 형태로 변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투시도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가상세계의 표면을 시뮬레이션할 수도 있었다. 하이퍼텍스트의 창시자, 테드 넬슨이 스케치패드를 "지금까지 만들어진 컴퓨터 프로그램 중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치켜세웠던 것이 이런 이유다.
_궁극의 디스플레이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면서, 서덜랜드는 스크린 기반 인터페이스에서 허기를 느낀다. 결국 서덜랜드는 1965년에 발표한 짧은 에세이에서 사용자가 가상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몰입 인터페이스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궁극의 디스플레이"가 바로 그것이다. 궁극의 디스플레이는 물질의 현존을 제어할 수 있는 컴퓨터가 있는 방의 형식이 될 것이다.
서덜랜드는 '인간과 컴퓨터의 공생'을 주창했던 릭 라이더의 뒤를 이어 고등 연구 프로젝트 국 산하의 정보처리 기술원의 책임자를 맡으면서 궁극의 디스플레이에 대한 아이디어를 심화시켰다.
서덜랜드는 헬리콥터의 조종사가 야간비행 시 험난한 지형에 이착륙할 수 있도록 돕는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궁극의 디스플레이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 프로젝트를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HMD)로 이름 짓고 제안했다. 이후 1968년에 유타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서덜랜드는 시각적 리얼리즘의 구현을 위한 3D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 개발에 몰두하면서 동료 교순인 데이브 에반스와 함께 에반스 앤드 서덜랜드 컴퓨터 코퍼레이션을 설립한다. 이 업체는 군사용 비행, 탱크, 시뮬레이터를 국방부에 납품하면서 승승장구했다.
199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대중문화 전바을 휩쓸던 가상현실의 이상 열기는 빠르게 사라져 갔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이런 실패담에 불구하고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컴퓨터 그래픽스의 상품화를 가속화하는 촉매의 구실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상품화 과정의 기술적 청사진을 제시한 컴퓨터 과학자들 상당수가 이반 서덜랜드의 유타 대학 제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픽사 애니메이션의 공동 창립자 '에드 캐트 멀', HMD 환경의 3D 그래픽스를 연구했던 짐 클락은 스탠퍼드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실리콘 그래픽스를 창립했다. 또한 존 위토크는 이후 어도비 시스템을 설립하여 포스트스크립트 언어의 개발을 주도했다.
_파노라마와 바그너의 극장, 마비로서의 몰입?
몰입의 경험을 제공하려는 인터페이스의 역사를 돌아보면, 건축물의 형식으로 몰입의 인터페이스를 구현하려는 시도는 근대 유럽에서 꾸준히 진행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세기에 큰 인기를 누렸던 파라노라마나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설계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 그것이다.
먼저 파노라마를 살펴보면, 파노라마는 당시 재현의 기본 단위였던 회화적 프레임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탈피하면서, 원형의 벽면에 거대한 이미지를 전시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방에서 관람객의 시선을 압도하기 충분했다.
평면의 회화 이미지는 고개만 돌리면 이내 현실세계로 복귀할 수 있었으나, 파노라마의 이미지는 원형의 대오를 갖추고 관람객을 포위하고 있어서 단순히 몸을 움직이거나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 이미지를 회피할 수 없었다. 파노라마는 시선 이탈을 허용하지 않았다.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현대적인 극장의 원형을 제시했다. 바그너는 모든 예술을 망라한 총체예술의 개념을 정초 하면서, 그것을 실현할 새로운 형식의 극장을 구상했다. 시청각적 몰입의 인터페이스를 얻었으나, 반대로 곽객의 역할은 극히 미미했다. 그저 관객은 앉아 잇는 객석의 물리적 한계를 잊은 채, 드넓은 무대의 세계로 빠져들 뿐이었다.
니체는 바그너의 친한 절친으로 열렬한 옹호자였다. 그러나 니체는 바그너의 극장을 보고 관객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이성적 판단을 무력화시키는 최면술의 공간이라고 비판했다. 이 비판은 몰입의 인터페이스들과 관련해서 충분히 숙고해볼 가치가 있다. 니체에 따르면 유형의 인터페이스는 세계에 대한 이간의 경험을 평면 화하고, 신체적 감각의 유기적 균형을 무너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