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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봉희 May 16. 2020

우리의 여름 이야기

 뜨거운 태양 아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어놀아 땀범벅이 돼도 아이스크림 하나면 충분던 2년 전 여름. 아이는 나에게 방학숙제로 반 친구들에게 손편지 쓰기를 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은 나는 순간 한 반에 20명이 넘는 친구들이 떠올랐고, 아이에게 “반 친구들 모두 다? 그걸 하루에 다 썼어?”라며 놀란 눈으로 말을 했었다. 아이는 “그건 아니고요. 10명 조금 넘게? 그리고, 하루에 한 명씩 썼어요.”라고 대답했다. 방학숙제를 개학 하루 전 날에 눈물을 머금고 하던 나와는 달리 시간을 내어 하루에 한 명씩 편지를 썼다는 아이. 나는 "친구들이 너무 좋아하겠다. 좋겠다!"라는 말을 하고는 그림 그리는 아이 모습을 오래 눈에 담았었다.


 그날 나는 아이에게 전보다 더 많이, 푹 빠져들었다. 손편지에 많은 의미를 두고 사는 나에게는 너무나 낭만적이고, 마음이 포근해지는 방학숙제였다. 그리고 손편지 쓰기 숙제를 했다고 말하는 아이의 표정에서 뿌듯함과 행복함이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그 순간의 감정을 아이도 느꼈을까. 느꼈다면 아마 나보다 더 커다란 감정을 느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긴 문장이 아니더라도 나를 생각하며 써 내려간 문장이 가득한 손편지를 좋아한다. 손편지를 쓴다는 건 편지 받을 사람을 떠올리며 그 사람에게 어울릴 것 같은 편지지를 고르고, 볼펜으로 쓸지 연필로 쓸지 고민을 하고, 볼펜으로 쓴다면 어떤 색으로 쓰면 좋을지 또 고민하고, 책상에 편지지와 필기도구를 올려놓고 어떤 말을 전할지 모든 준비과정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마음을 쏟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시간을 내어 주는 일. 내 시간을 선물하는 일. 그 시간이 소중하다는 걸 알기에 손편지를 선물로 받는 건 정말 고맙고, 행복하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학원에 온 아이는 나에게 수줍게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내 손 한 뼘도 안 되는 크기의 종이. 선을 맞춰 반으로 접어 '선생님께'라고 꾹꾹 눌러쓴 종이. 나풀거리는 종이 사이로 힐끔힐끔 보이는 자음과 모음. '좋겠다'라고 말했던 나를 기억하고는 내 생각을 하며 시간을 내어 써준 손편지. 작은 내 손바닥 만한 종이 한 장 속에는 나의 행복도 빌어주고, 나의 건강도 챙겨주는 문장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를 위해 어떤 노트를 자를지 고민하고, 가위로 원하는 크기로 잘라 내 생각을 하며 쓴 문장. 편지를 전해줄 날을 기다리고, 작은 가방에 편지를 넣어 학원에 오는 내내 설레었을 아이. 편지를 받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했을 아이. 종종 하루가 짧다 말하며 살았던 내게 그날만큼은 아이의 시간이 더해져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2년 전, 나에게 시간을 선물해줬던 아이는 요즘은 어디서 일을 하냐고 물어왔다. 나는 이제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었던 일을 좀 더 열심히 하면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는 나에게 선생님이 만든 책 나오면 사서 읽어보겠다며, 책이 잘 팔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는 바삐 인사를 남기고 다음을 기약했다. 고마운 사람. 선생님이 진짜 왕왕 열심히 해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게. 그리고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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