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함과 자연스러움, 그 사이 어딘가의 바젤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부지런히 자전거를 밟습니다. 그저께 검은 숲 경기장에서 친구를 위해 정우영의 유니폼을 샀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를 위해 유니폼을 하나 더 사야겠더군요. 그래서 호스텔의 체크아웃 시간인 11시 전까지 검은 숲 경기장에 다시 다녀오기 위해 자전거를 부지런히 밟습니다. 자전거에 내비게이션으로 스마트폰을 달아두고 구글맵을 따라 찾아가는데, 실제 길하고 내비게이션이 달라서 이상한 건물로 들어갑니다. 제가 우왕좌왕하면서 길을 헤매자 건물에서 한 분이 나오시더니 친절히 길을 알려주십니다. 덕분에 제시간에 맞추어 도착한 팬 샵에서 저를 기억하고 계신 가게 직원분이 친절히 맞이해 주십니다. 여전히 직원분께서 'jeong'을 '이융'으로 발음하시는 데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무사히 체크아웃을 시간에 맞추어 호스텔로 돌아온 저는 다음 목적지인 바젤로 출발합니다. 드디어 독일을 떠나 스위스로 넘어가는 겁니다. 프라이부르크와 바젤 모두 국경에 인접한 도시라서 기차로는 겨우 40여분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만, 한 시간에 한 대씩 오는 차량이 무려 50분이나 연착합니다. 스위스로 넘어가는 설렘을 잠시 뒤로 미루고 저는 하는 수 없이 역 주변이나 좀 더 둘러보기로 합니다. 역 남쪽 방면에는 대학 도서관이 있는데, 대학 도서관 주변으로 자전거들이 주차되어 있는 모습이 장관입니다.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확실히 환경과 자전거의 도시였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인상적인 모습입니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바젤 역 플랫폼의 풍경은 이제 완전히 또 다른 세상입니다. 다소 투박하지만 정겨운 느낌의 독일식 플랫폼이나 우리나라의 7, 80년대를 떠오르게 하는 동유럽의 플랫폼과는 달리, 바젤의 플랫폼은 세련된 공항의 느낌을 들게 합니다. 차르륵 돌아가는 전광판에서는 바쁘게 돌아가는 비즈니스 사회의 세련된 모습이 투영됩니다. 역사에 배치된 가게들의 모습과 디자인이 인천공항에서 본 깔끔하게 정돈된 느낌입니다. 바젤 역의 모던한 이미지에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합니다.
일단 역에 도착하기는 했는데, 무얼 해야 할지 몰라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일단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아서 배는 고프고, 돈은 유로에서 스위스 프랑으로 환전해야 하고, 숙소도 찾아가서 체크인을 해야 합니다. 해야 할 일들이 두서없이 나열된 상태로 상태로 바젤 역의 분위기에 압도되어서 잠시 동안 멍 때리다가 굶주린 뱃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립니다. 어차피 체크인은 오후 4시 이후니까 그전에 돌아다니려면 락커에 짐을 맡기는 게 나을 거 같고, 그러려면 환전을 먼저 해야 하므로 환전소를 찾기로 합니다. 항상 그렇듯이 환전소 사기를 유념하며 인터넷으로 평이 좋은 환전소를 찾아봅니다만, 구글맵에 제대로 된 환전소가 나오질 않습니다. 방법이 없어 보통 평가가 좋지 않은 역내 환전소를 찾아가 봅니다만, 환전 비율이 알던 것보다 너무 낮은 데다가 심지어 커미션까지 뜯어가 100유로를 환전하니 손에 꼴랑 107프랑 밖에 남지 않습니다. 손해를 많이 봤다고 툴툴거리며 짐을 잠시 맡길 락커를 찾아보니, 이번엔 락커 이용료가 6시간에 무려 9프랑이나 합니다. 만 원이 넘는 돈입니다. 스위스에 도착하자마자 벌써 돈이 새어나간다는 압박감에 최대한 돈을 아끼는 쪽으로 움직이기로 합니다. 체크인 시간이 한참 남기는 했지만 일단 호스텔에 찾아가서 짐을 맡길 수 있는지 물어보기로 합니다.
호스텔에 도착하니 직원분이 반갑게 맞이해주십니다. 체크인을 빨리 할 수 없지만 다행히 제 짐을 리셉션에 맡아주신다고 합니다. 더불어서 바젤 카드라는 걸 끊어주시는데, 이게 있으면 숙소에 묵는 기간 동안 도시 내 교통비 공짜에 웬만한 관광지 입장료가 반액으로 할인된다고 합니다. 따로 제가 구매하지 않고도 숙소에 머무는 것만으로 이런 혜택을 주다니 생각보다 동네가 비싸기는 해도 여행객에게 관대한 모양입니다. 호스텔 숙박비용부터 각종 식사비용이 그 독일보다도 더 비쌌기 때문에 다소 돈을 쓰는 걸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런 혜택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호스텔에 짐을 맡기고 향한 곳은 바젤 동물원입니다. 굳이 동물원을 가봐야 할까 싶다가도 동물원의 평점이 대단해서 가보기로 합니다. 확실히 바젤 동물원은 제가 지금까지 다녀본 다른 동물원들하고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동물원이 숲 속에 우거져있고, 우리 자체가 매우 낮게 돼있어서 동물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동물들은 축사를 나와 행인들이 지나다니는 곳에 나오기도 합니다. 동물원이 자연 친화적이라고 해서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는데, 동물 우리가 인위적인 느낌이 잘 안 들고 숲 속에 영역만 나뉜 것처럼 자연스럽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연적인 분위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덜 받는 모양인지 다른 동물원처럼 동물들이 축 늘어져 있지 않고 활기찬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축사 같은 경우 아이들이 우리에 들어가 직접 먹이를 줄 수도 있고, 작은 동물들의 우리 같은 경우 펜스가 거의 없다시피 하여 사람들이 직접 동물을 만져볼 기회도 많습니다. 동물들이 마음만 먹으면 탈주할 수도 있을 텐데 관리가 어떻게 되는 건지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동물원이 너무 자연친화적이어서 사람 편의 시설이 거의 없습니다. 동물원 도착하자마자 내부에서 점심을 해결하려던 저의 계획은 쫄쫄 굶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동물들을 구경하고 난 다음엔 시내 중심지로 향합니다. 으레 그렇듯이 도시의 중심에 서 있는 대성당부터 구경합니다. 성당 정면에 금칠로 장식된 시계가 인상적인 성당 지하엔 작은 카타콤이 있습니다. 마치 지하에 돌무더기를 파해 친듯한 장소에 이름 푯말이 곳곳에 보이는 게, 여기에 묻혀있는 귀족과 성직자들의 이름이 것 같습니다. 화려한 대성당 밑에 공포스러운 지하무덤이 있다는 사실은 항상 섬뜩한 것 같습니다.
대성당을 나와서 시청사로 향하는 길은 제법 재밌습니다. 길 좌우로 명품 가게들이 줄지어서 있습니다. 그중엔 제가 아는 몇몇 브랜드도 있는데, 특히 시계 브랜드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명품거리를 따라 걸으며 도착한 시청사 앞 광장에서 바라본 시청사는 유달리 붉은 외형 덕에 눈에 바로 들어옵니다. 다양한 양식이 뒤섞여 화려한 외형을 뽐내는 시청사 내부에는, 벽화와 함께 위엄 있는 전사상이 절 반겨줍니다. 쇠창살로 닫힌 정문에서 광장을 바라보니 도로가 상당히 이색적인 풍경으로 느껴집니다. 내부 전시관도 들어가 보고 싶은데 벌써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 아쉽게 들어가 보진 못합니다.
요즘 들어 피로가 계속 누적되는지 잦은 실수를 연발하는 것 같습니다. 자전거를 몰다가 피로에 지쳐 실수하는 것도 그렇고, 오늘은 맥도널드에서 세트메뉴를 들고 가다가 그대로 자빠져서 음식물과 함께 바닥에 엎어지고 맙니다. 저는 정신도 못 차리고 허둥대고 있는데 매니저가 나와서 괜찮냐고 물어보면서 제 휴대폰을 먼저 챙겨줍니다. 연신 미안하다고 인사를 드리면서 속으로는 비싼 세트메뉴를 입도 못 대고 엎어버렸다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제게 다시 메뉴를 가져다준다고 이야기하면서 도리어 제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에 당황합니다. 이렇게까지 서비스를 해줄 줄은 생각도 못한 일입니다. 애초에 이런 실수를 할 때까지 피로를 누적시키고 무리한 스스로가 더 보잘것 없어지는 순간입니다. 앞으로 조금 쉬엄쉬엄 다녀야겠다고 다짐하는 바젤의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