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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Dec 26. 2019

7월 11일, 39일 차, 취리히

세상 시원한 라인 폭포와 가슴 뛰는 취리히입니다

새벽 여섯 시에 눈을 뜹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은 취리히를 구경할 예정입니다만 숙소 문제 때문에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편하게 취리히에 숙소를 잡으면 좋았을 텐데 취리히에서 찾을 수 있는 숙소는 일박에 최소 20만 원부터 시작합니다. 스위스가 전반적으로 물가가 매우 비싼 편입니다만, 취리히의 숙소 비용은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행하는 도시에 숙소를 잡지 말고 그나마 값이 싼 바젤에서 숙소를 구하기로 합니다. 제겐 유레일 패스가 있기 때문에 어차피 이동비용은 0원이므로 돈을 많이 아낄 수 있습니다. 대신 그만큼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들어가므로 평소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게다가 바젤에서 숙소를 구할 때, 한 숙소에서 2박을 연속으로 잡지 못해서, 체크아웃과 체크인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다녀야 하는 일정입니다. 오늘도 쉽지 않은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벌써 환전한 현금을 다 써갑니다
빵 두 개와 물 한 병, 약 8500원

아침 일찍 취리히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기차를 타고 샤프하우젠으로 떠납니다. 취리히에서 북쪽으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샤프하우젠이 나오는데, 여기에 바로 유럽에서 가장 큰 폭포인 라인 폭포가 있습니다. 샤프하우젠에서 지역 기차를 타고 Rheinfall 역에서 내리니, 비릿한 물 냄새가 진동합니다. 분명 강이라고 했는데 웬 바다내음이 올라올까 의아해하며 언덕을 조금 내려가니, 바로 거센 물살이 부서지는 모습이 보입니다. 생각보다 높거나 거대한 폭포는 아니지만 시원하게 부서지는 물살을 보고 있자니 멀미로 메스꺼웠던 속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입니다. 이렇게 파도가 산산조각 나서 사방으로 물방울이 흩어지니 물 비린내가 왜 진동하는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난관에 붙어 넋 놓고 폭포가 부서지는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너 나할 것 없이 셔터를 누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부탁하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데, 제가 부탁드린 분이 이런저런 동작을 지시해주셔서 제법 멋진 동양상을 찍습니다.

기차를 타고 떠나볼까요
라인 폭포에 도착
역에서 언덕을 따라 내려가면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시원시원하게 부서지는 파도
폭포 한가운데 돌섬이 보입니다

폭포 하류 쪽으로 천천히 내려오니 폭포를 둘러볼 수 있는 유람선의 티켓 판매소가 보입니다. 유람선이라기보단 작은 보트 같습니다만, 하여튼 유람선을 타고 폭포를 구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유람선 종류가 다섯 가지 정도 있는데 그중 노란 보트를 타면 폭포 한가운데서, 물살을 둘로 가르며 거침없이 물보라를 일으키는 돌섬에 가볼 수 있다고 합니다.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하필이면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상황이라 노란 보트는 탈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라인 폭포 하류에서 국경을 넘어갔다가 폭포 밑에서 구경하는 분홍 보트를 탑니다. 분홍 보트 외관에는 태극기를 포함한 여러 나라의 국기가 장식이 되어있는데, 유람선들 중에서 유일하게 오디오 가이드를 제공하는 유람선입니다. 유람선을 타고 각 포인트를 돌며 라인 폭포의 이모저모에 대해 설명을 듣는데, 라인 폭포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생각보다 재밌습니다. 배를 타고 라인 폭포를 건너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라인 폭포를 폭파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거나, 현재까지도 무모한 도전을 즐기기 위해 라인 폭포에 도전하고 경찰신세를 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에피소드들이 특히 재밌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배는 어느새 폭포 아래에 닿아있었고, 물보라로 시야가 확 하고 가려지면서 폭포가 산산이 부서지고 물보라가 이는 풍경이 너무나도 생동감이 넘칩니다. 하루 종일 폭포 소리를 듣고 있어도 마냥 좋을 것만 같습니다.

오디오 가이드가 붙어있는 유람선
다들 사진 찍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가까이서 보는 폭포는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폭포 구경을 끝내고 취리히로 돌아오는 길은 꽤 고생입니다. 폭포에서 역까지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데 하필이면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영락없이 캐리어를 끌고 등반을 해야 합니다. 게다가 배에서 뱃멀미라도 한 건지 바닥이 살짝 휘청거리는 느낌도 듭니다. 겨우겨우 기차역까지 올라가 한숨을 돌리는데 이번엔 기차에서도 멀미를 합니다. 그냥 내려서 쉴까도 생각해봅니다만,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오후에 취리히를 돌아볼 수 없기 때문에 억지로 참으면서 길을 재촉합니다.


취리히에 도착하니 하늘에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습니다. 린덴 호프 공원에 올라 취리히 도시의 전경을 배경 삼아 셀카를 찍고 있는데 손에 무슨 봉투를 들고 다니는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제게 "Are you tourist?"라고 물어보십니다. 셀카로 찍어봤자 제대로 사진이 안 나온다면서 자신이 제대로 찍어준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사진을 찍고 감사 인사를 드리며 갈 길을 가려는데 저를 불러 세우시더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스위스의 역사에 대해서 잘 아는 방법, 자신이 젊을 적에 남아프리카에 가서 공부했던 이야기, 그 시절에 전화도 너무 비싸서 오는데 2주나 걸리는 편지를 썼던 이야기, 취리히 밖에 모르던 자신이 유학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오픈마인드를 가지게 되었다며 제가 혼자 여행하는 것도 많은 것을 느낄 거라는 이야기 등을 해주십니다. 어르신 이야기가 재밌어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도 맞으면서 듣고 있는데 잠시 뒤에 "We have a relationship with the god"이라고 이야기하시면서 예수님의 위대함과 몸소 보여주신 희생의 의미,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아마 할아버지의 정체는, 공원에서 여행객들에게 자기 이야기와 함께 신앙 전도를 하시는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야기를 끊을 타이밍을 놓치고 계속 맞장구를 치다 보니 벌써 30분이 지나갑니다. 더는 죽치고 있을 수도 없고 인사를 드리니 "God blesses you"라며 제 여행에 축복을 빌어주시더군요. 보통은 선교나 전도에 대해서 별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거의 무시합니다만, 저는 지금 여행 중이니 굳이 평소의 규칙을 따를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도 사기꾼이나 소매치기에게 시달리는 것보다는 형편 좋은 이야기입니다. 제가 떠나자마자 곧바로 다른 타깃을 물색해서 "Are you tourist?"라고 물어보시는 걸 보고는 조금 씁쓸하기는 합니다. 꼭 RPG 게임의 NPC를 보는 기분입니다.

린덴 호프 공원에 올라 바라본 리마트 강
공원에서 저렇게 봉투를 들고 두리번거리는 할아버지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박물관 마감시간까지 두 시간 정도 남아서 어디를 가볼까 고민합니다. 정석대로라면 스위스 국립 박물관을 가보는 게 맞지만, 그렇게 큰 박물관을 돌아보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주위를 찾아보니 FIFA 박물관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흥미가 가는 대로 행동해야 후회가 덜 남는다고 국립 박물관은 재쳐두고 FIFA 박물관으로 향합니다.

동네가 오르막 내리막이 많아 걸어 다니기에 재미있는 취리히
피파 축구 박물관에 방문합니다

FIFA 박물관은 박물관이라기보단 테마파크 같습니다. 24 프랑이라는 다소 비싼 입장료를 내고 박물관으로 들어서는데, 당장 락커룸부터 역사적인 축구 선수들의 이름으로 마킹되어 있습니다. 전시실 들어서니 전 세계 국가대표팀의 유니폼이 색깔별로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는데, 붉은색 유니폼에 백호 마크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사방에는 대형 스크린을 통해 플레이 영상들이 재생 중인데, 꼭 경기가 한창인 축구장에 들어서는 기분입니다. 

전설적인 축구선수들의 이름으로 도배된 락커룸
입구를 수놓은 전 세계 국가대표팀의 유니폼
한국, 일본, 북한의 응원 장면
전시실 입구를 수놓은 글귀 중 눈에 들어온 것은 '옐로우 카드'

전시실에는 피파 월드컵과 축구의 역사를 보여주는 패널, 월드컵과 관련된 각종 유물이 트로피처럼 전시되어 있습니다. 유리벽으로 된 공간을 통과하니 이번에는 역대 월드컵의 포스터 사진과 간단한 설명, 관련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일 월드컵의 포스터엔 브라질의 우승을 환호하는 호나우두의 모습과 환호하는 안정환의 인상적인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벽에 걸린 스크린에선 역대 월드컵 명경기들의 영상을 보여주는데, 때마침 2002년 월드컵에서 토티가 퇴장당하며 극적으로 역전했던 16강 이탈리아전 경기를 틀어주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가슴 졸이며 응원하고 환호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감회에 젖습니다. 02년, 06년, 10년, 14년, 그리고 18년, 제가 겪었던 월드컵들을 회상하면서 당시의 기억들을 떠올리니 전시 내용들이 꼭 제가 살아온 역사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축구의 역사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서 있는 기분

 

연도별 월드컵  포스터 전시
명경기 컬렉션으로 마침 그 유명한 장면을 목격합니다
당연히 별점 5점을 주고 갑니다
호나우두가 유달리 돋보이는 2002년 포스터
전시품으로 바로 지성이 형의 유니폼이 전시 중입니다
2022년 월드컵은 또 어떤 드라마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연도별 월드컵 역사 전시 후, 역대 월드컵 장면들을 하나의 경기처럼 엮은 시네마를 감상합니다. 경기가 시작하고 고조되는 분위기, 멋진 전술과 골, 격해지는 경기 속에서 속출하는 반칙과 부상, 하프타임에 가라앉지 않은 흥분, 후반이 지나가지만 골은 들어가지 않는 초조함, 마지막 인저리타임과 역전골, 휘슬이 울리는 대단원까지 하나의 대서사시를 그려냅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흥분할 수밖에 없는 영상입니다. 영상 시청이 끝나고 다음 섹션으로 이동하면 흥분을 풀라는 듯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섹션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특히 프리킥, 골킥, 코너킥, 드리블 등을 응용한 게임 섹션은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덕분에 땀 뻘뻘 흘려가며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해봅니다.

축구공과 축구화의 드라마틱한 변천사
2층 전시실에는 축구를 응용한 다양한 게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축구 핀볼이라니!

FIFA 박물관에서 재밌게 놀다 보니 어느새 문을 닫을 시간입니다. 더 늦으면 바젤에 돌아갔을 때 숙소에 체크인을 할 수 없으므로 취리히에서 딱 한 곳만 더 가보기로 합니다. 제가 선택한 곳은 바로 취리히 공대입니다. 리마트 강 동편 신시가지 쪽으로 높은 언덕에 위치한 취리히 공대는 아인슈타인, 폰 노이만, 파울리, 칸토어 등 세계적인 석학들을 배출한 세계 최고의 대학 중 하나입니다. 취리히 공대는 어떤 느낌일까 기분이라도 내보고 싶어서 중앙 건물에 들어서는데, 그 모습이 딱 제가 아는 공대입니다. 로비에 열을 맞추어 놓인 발표 포스터들을 보니 학부 시절의 종강 시즌이 생각납니다. 학생 알림판에는 학생들의 각종 구인 광고가 붙어있는데, 그 모습이 어딜 가도 대학은 대학이구나 싶습니다. 학부시절의 그리운 향수가 낯선 대학에서 느껴지는 하루입니다.

리마트 강 동편의 언덕을 따라서
언덕을 따라서 올라가면
꿈에 그리던 취리히 공대에 이릅니다
막 기말고사를 봤을 것만 같은 로비의 풍경
게시판에서 친구를 찾는 친구 구인 공고
막 발표회가 끝난 것 같은 포스터들의 흔적

다시 바젤로 돌아와서 체크인까지 마치고 나니 정말로 파죽음 상태입니다. 최근에 계속 강행군을 달리다 보니 체력이 부치는 게 눈에 띄게 느껴집니다. 조만간 인터라켄에서 해발 4천 미터의 고산을 올라갈 텐데 이대로는 좀 문제가 될 겁니다. 하루가 되었든 이틀이 되었든 조금 쉬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어떻게 쉬면 좋을까 계획을 짜며 잠을 청하는 취리히의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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