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준 Jan 09. 2020

7월 13일, 41일 차, 베른

아인슈타인과 곰과 친구가 된 베른입니다

아침에 알람도 맞춰놓지 않고 자연스럽게 눈을 뜰 때까지 푹 잠을 청합니다. 오늘은 다른 사람들이 짐을 싸느라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누군가 커튼을 열어서 내리쬐는 햇볕도, 체크아웃 시간과 빠듯한 기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보채는 알람 소리도 없습니다. 호스텔의 부자유에서 벗어나 저만의 개인실에서 열 시가 될 때까지 정말 푹 잠을 잡니다. 오랜만의 휴식과 숙면에 정말 온몸이 개운합니다. 며칠간 머릿속을 짓눌렀던 두통이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참고 여정을 떠날만합니다.


숙소를 박차고 나가서 베른 역으로 향해봅니다. 느지막이 숙소가 있는 쉬펜 역에서 베른 역으로 가는 기차 시간표를 알아봅니다. 그런데 유레일 앱에서 베른으로 가는 기차가 당최 보이질 않습니다. 기차로 고작 15분 거리고, 어제 분명히 베른 역에서 기차를 타고 쉬펜 역으로 왔는데 다시 베른 역으로 가는 기차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뭔가 유레일 앱에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서 기차역으로 나가 시간표를 보니 매일 30분마다 베른 역으로 향하는 기차가 있다고 안내합니다. 플랫폼의 전광판도 잠시 뒤 기차가 온다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역시 앱이 잘못되었구나 안도하고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역사에서 한 아저씨가 저한테 뭐라고 말을 하십니다. 오늘은 기차가 다니지 않으니 버스를 타야 한다고 말입니다.

쉬펜 역에서 여행을 떠나 봅시다..?
오지 않는 기차를 가리키는 전광판입니다

도대체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당황스러울 뿐입니다. 아저씨께서 말씀하신 간이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니 몇몇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이 보입니다. 기다리다 보니 다행히 버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는데 이번엔 티켓이 문제입니다. 간이역이라서 그런지 버스 티켓 판매소가 없는데, 티켓을 어떻게 구하냐고 버스 기사님께 이야기를 드리니 "No Ticket"을 연발하면서 티켓을 판매하지 않는다고 답이 돌아옵니다. 운전사마저 티켓을 팔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고 좌절하며, 티켓이 없으니 버스를 타는 걸 포기하기로 합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습니다. 여기서 베른 역까지 걸어서는 3시간이 걸리고, 자전거를 타면 1시간 정도 걸리지만 안타깝게도 주변에 대여할 수 있는 자전거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이 외딴곳에 갇혀 하루를 보내야 하나', '내일도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같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리던 찰나 버스 기사님이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무슨 일인지 몰라 어벙하게 서있자 그냥 타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저는 뜻밖의 호의에 감동하며, 갑작스레 열린 활로에 정말로, 정말로 가슴을 쓸어 담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지옥과 천당을 다녀온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자리에 앉자 긴장이 풀려서는 그대로 축 쳐져 버립니다. 

사진마저도 에너지가 다 빨린 것 같은 버스의 사진

(나중에 숙소로 돌아올 때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기차가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 임시로 대체 버스를 운행하고, 대신에 표값을 받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대체 버스의 티켓값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습니다. 그리고 오전에 기사님이 No Ticket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티켓을 팔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는 것을 드디어 깨닫습니다. 숙소 가격이 10만 원이나 세일을 하는 이유도, 제가 숙박하는 기간이 딱 대체 버스가 운행되는 기간이기 때문이었다는 데까지 생각이 닿습니다. 여행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들의 연속입니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여행의 참맛 아닐까요?

베른 역에 도착하자마자 뒤륌 케밥을 사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베른 역 북녘의 언덕을 올라 베른 대학의 정원으로 향합니다. 대학 주위가 좋은 이유는 광장, 넓은 잔디밭과 함께 항상 쉴 공간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벤치에 앉아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며 케밥을 먹습니다. 맵고 매운맛을 시켰는데 살짝 볶음 김치 맛이 나는 것이 많이 짭짜름하지만 배를 채우기엔 딱 적당합니다. 대충 밥을 해치우고 소화도 시킬 겸 정원을 천천히 둘러보는데, 아인슈타인이 앉아 있는 벤치가 보입니다. 지나가는 커플에게 아인슈타인과 어깨동무하는 사진 한 장을 부탁합니다. 저는 "I made a friend in Bern whose name Einstein"이라며 환호하고, 사진을 찍는 커플은 축하한다며 웃음을 참지 못합니다. 

수많은 인재를 양성한 명문, 베른 대학입니다
시야가 뻥 뚫린 잔디밭에서 
케밥으로 간편한 점심을
아인슈타인과 친구가 된 오후

점심도 먹고 배도 채웠겠다 이제 중앙역에서 걸어내려 가 구시가지 길을 걷습니다. 이 구시가지는 도보로 20~30분 정도 길이 이어져있는데, 도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고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도로 양 옆으로는 각종 명품, 기념품 가게들이 들어서 있어서 길을 따라 걸으며 가게 구경만 해도 눈 호강을 합니다. 인도를 따라서 지하로 향하는 철문들이 보이는 데, 지상으로 보이는 매장들 말고도 지하에도 매장들이 깔려있는 모양입니다. 자동차나 트램이 지나갈 수 있는 구시가지 길의 중앙통로에는 조각상, 분수대가 보이는데 길 양 옆으로 걸린 각종 국기들의 모습과 어우러져 신기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특히 중간중간에 세워진 죄수의 탑, 시계탑과 함께 사시사철 축제가 벌어지는 모습은, 동화 속에서 본 퍼레이드가 이루어지는 마을의 풍경을 보는 듯합니다. 곳곳에서 보이는 거리의 악사들은 이미 퀄리티가 차원이 달라서 본격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버스킹하는 곳에서 악기 케이스를 놓고 팁을 받는 경우야 흔합니다만, 케이스 안에 앨범을 담아놓고 앨범을 파는 경우는 처음 봅니다. 시계탑 앞에서 바이올린, 첼로, 아코디언의 4중주 연주 소리를 도무지 그냥 지나칠 방도가 없습니다. 감명 깊은 연주에 여행에 와서 처음으로 팁을 내봅니다. 과연 대단한 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트램이 지나가는 아름다운 거리, 베른의 구시가지 길
시계탑에서 정시를 기다리는 사람들
잊을 수 없는 거리의 공연
거리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가게들의 독특한 구조를 찾아볼 수 잇습니다

명품 가게들로 가득한 베른 구시가지의 도로 한 구석에는 아인슈타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베른 대학에서 본 아인슈타인 동상도 그렇습니다만, 베른이 아인슈타인으로 유명한 이유는 아인슈타인이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도시가 바로 이 베른이기 때문입니다. 구시가지 길 한가운데 아인슈타인이 베른에 살 적에 살던 생가가 그대로 남아있는 데, 주변에 아인슈타인 관련 기념품들이 많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아인슈타인 하우스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 하우스는 2층짜리 작은 집으로 방들이 좁고 크지 않은 셋방입니다. 현재는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첫 부인 밀레바와의 신혼 생활을 한 흔적들과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던 시절의 몇 가지 흔적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당시 발표했던 학술 내용에서 학부생 시절 공부하던 내용이 생각나 반갑고 자랑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딱 봐도 여긴 아인슈타인 하우스라고 광고하는 49번지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광전효과의 페이퍼입니다
업적을 전시한 공간에 놓인 육아물품은, 아인슈타인 가정에 대한 현실적인 모습을 상상하게 도와줍니다

아인슈타인 하우스를 나와선 구시가지를 벗어나 좀 더 도시를 둘러보기로 합니다. 베른 대성당, 스위스 연방 궁전 등의 명소를 돌아봅니다. 성당이나 궁전 내부 등도 멋있지만, 푸르게 빛나며 힘차게 흘러가는 아래 강과 아래 강을 건너는 철교, 다리들의 풍경에 더 눈이 갑니다.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강을 향해 걷다 보니 어느새 철교를 건너 베른 역사박물관이 보입니다. 그냥 지나칠까도 생각해보지만 인상 깊은 베른이라는 도시의 역사를 건너뛰기에는 제 호기심이 용납하질 않습니다.

베른 대성당과 스위스 연방 궁전을 지나서
아래 강 철교를 건너
베른 역사박물관에 도착

박물관 내부에는 다양한 전시가 진행 중인데, 특히나 은으로 된 조각상과 기묘한 느낌의 해골들, 그리고 수많은 곰들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베른은 곰을 처치하고 세운 마을로, 마을 이름도 곰이라는 단어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베른의 휘장은 곰이 혀를 내밀고 있는 모습인데 상당히 기괴한 느낌입니다. 베른의 문화 중 하나로 소개하는 해골들의 '죽음의 무도'도 그렇고, 얼굴을 과도하게 부각한 토르소도 그렇고, 마을 건설 설화까지 여러모로 기괴한 상징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괴기한 중세의 전시물들이 나열되다가 중간에는 갑자기 달 전시관이 나오니 또 생뚱맞은 느낌입니다. 인류 최초의 월면 착륙에 대한 내용과 당시 기록 및 소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베른 대학에서 닐 암스트롱과 월면 실험을 진행했기 때문에 이를 전시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곰을 처치하고 만들어진 도시 베른
베른을 상징하는 문양도 혀를 빼꼼 내밀고 있는 곰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은 장신구가 발달한 베른의 괴이한 센스란
해골과 관련된 '죽음의 무도' 모티프도 전시관 내내 일관된 테마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류 최초로 달을 밟는데 공헌한 베른 대학
저는 오늘 우주비행사도 되어봅니다

박물관의 한 층은 아인슈타인 전시관으로 전시 중입니다. 아인슈타인 전시관은 아인슈타인 개인의 생애나 업적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아인슈타인을 둘러싼 역사적, 시대적 배경들을 광범위하게 전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는지, 특히 19세기에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아인슈타인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 나치의 대두가 아인슈타인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그리고 맨해튼 프로젝트와 원자폭탄 투하가 아인슈타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전시 중입니다. 마치 아인슈타인의 생애와 함께 한 편의 역사서를 읽는 느낌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발견하고 정리한 물리학적 원리들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는데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아인슈타인 전시관으로의 입장은 별세상으로 가는 것만 같습니다

박물관을 한 바퀴 다 돌면서, 아인슈타인의 탄생부터 고난, 성공, 역경과 말년, 그리고 죽음까지 관람하니 조금 씁쓸함이 남습니다. 물리학을 배울 때는 아인슈타인의 이름과 공식을 통해서 만나지만 그 너머에 있을 아인슈타인 개인과 아인슈타인을 둘러싼 사화적 배경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친숙하게 생각했던 사람에 대해서 실은 거의 알지 못했다는 조금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업적과 삶의 흔적을 겹쳐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깁니다.

아인슈타인이 고단한 생활을 지냈음을 보여주는 전시물들
아인슈타인의 인생을 송두리째로 바꾸어버린 나치의 대두
말년의 아인슈타인을 죄책감에 잠들게 했던 원자폭탄 투하. 이를 바라보는 일본인 가족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박물관이 문 닫을 때까지 구경을 하고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잠시 곰 공원에 들릅니다. 공원 안에는 실제로 살아있는 곰이 세 마리 살고 있다고 하는데 애써서 찾아보지 않아서인지 곰과 만나 보지는 못합니다. (도대체 도시 한가운데에 어떻게 곰이 살고 있고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지는 풀리지 않는 의문입니다.) 대신 강가에 앉아서 강물이 흐르는 것을 멍하니 구경합니다.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에 손이라도 담가볼까 하다가 실수로 뭐하나 떨어뜨리면 물살에 떠내려갈까 가까이는 가지 않습니다. 강물이 세차게 흘러가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조금 어지럽기도 하고 강물 냄새도 비려서 멀미가 나는 것 같습니다. 한가로운 분위기 속에 젖어 자연경관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물러나야 할 때도 중요한 법입니다. 하루 종일 재밌는 구경을 마치며 그만 쉴 시간을 재촉하는 베른의 하루입니다.

곰이 여기 어디 있다고 하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아래 강과 베른 마을의 풍경
흘러가는 강물만 바라보아도 너무나 행복한 하루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7월 12일, 40일 차, 바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