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구구절절이 실감하는 슈피츠입니다
전날 늦게까지 다음 일정을 계획하느라 잠을 좀 설쳤습니다. 이제 인터라켄으로 이동해서 유럽의 정상, 융프라우를 올라가는 것이 목표입니다만 날씨라는 변수가 생각보다 문제가 됩니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꼭 밝은 날에 올라가라고 추천하는데, 이틀 뒤인 화요일 날을 제외하고 일주일 내내 계속 비가 온다고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월요일 날 융프라우를 올라갈 것을 가정하고 이미 화요일 오전 체크아웃, 화요일 오후 밀라노 도착 일정으로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일정이 조금 꼬여버립니다. 조금 빡빡하긴 하지만 체크아웃 후에 융프라우를 올라갔다가 저녁에 밀라노로 이동하는 것으로 일단 일정을 잡습니다.
추가적으로 인터라켄에서 슈피츠를 경유하여 밀라노로 넘어가는 저녁 시간대 국제선 열차를 알아보니, 추가적인 티켓 예매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티켓 예매를 온라인으로 할 수 있으면 좋은데 유레일에서 지원하는 몇몇 온라인 예매 사이트에서는 국제선 티켓 예매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티켓의 예매 가능 여부에 따라 부득이하게 인터라켄에서 숙소를 하루 더 잡아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조금 서둘러서 정보를 알아보기로 합니다. 온라인에서 정보를 찾지 못한다면 직접 발로 뛰어서 찾을 수밖에 없으므로, 베른에서 인터라켄으로 가는 길에 슈피츠에 들러 예매가 가능한지 알아보고, 가능하다면 예매까지 처리하기로 결정합니다. 어차피 슈피츠는 인터라켄으로 가는 길에 있고 베른에서 거리도 멀지 않고, 무엇보다 오늘 일정이 없기 때문에 오늘 하루는 슈피츠를 둘러보기로 합니다.
베른을 떠나기 전에 전날 걸었던 구시가지에 잠시 들러봅니다. 어제 구시가지를 돌면서 여러 기념품들을 봤었는데 그중에 마음에 드는 것들이 있어서 도시를 떠나기 전에 구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제 그렇게 사람이 북적거리고 활기차던 구시가지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합니다. 문을 연 가게는 보이지 않고 시장도 닫혀있고 길거리 연주가들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관광객도 거의 안 보입니다. 갑자기 죽어버린 거리를 걸으며 가게 안내를 보니 일요일은 구시가지 전체가 일제히 쉬는 날인가 봅니다. 관광지가 대목인 일요일에 문을 닫고 쉰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고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옵니다. 쉬펜의 기차역 폐쇄 건부터 베른의 여행은 생각지 못한 일의 연속입니다.
베른 역에서 30분 정도 기차를 타니 금방 슈피츠 역에 도착합니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호수와 산등성이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너무나 푸르고 화창한 날에 산등성이의 집 한 채, 나무 한 그루 선명하게 보이는 맑은 풍경 아래로, 호수에 일렁이는 물결에 햇빛이 반짝거리며 마치 백일몽 꾸는 것만 같습니다. 내리쬐는 햇볕에 얼굴이 다소 찌그러지는 것만이 유일하게 현실감을 상기시켜 줍니다.
넋 놓고 있는 것도 잠시, 일단은 슈피츠 역에 정차한 목적부터 먼저 처리하기로 합니다. 다행히 슈피츠 역의 티켓 안내소에서 유레일 패스와 앱을 보여주며 티켓을 문의하니, 바로 밀라노행 국제선 티켓을 예매해줍니다. 15 프랑의 예매 비용을 들이기는 했지만 일단은 밀라노까지 내려가는 일정이 무사히 완성됩니다. 머리를 한참을 굴려가며 짰던 일정이 맞아떨어지다니 속으로 쾌조를 부르짖어 봅니다.
예매를 마치고 딱히 할 일은 생각해두지 않았습니다만, 역에서 내리자마자 보였던 풍경은 그냥 두고 가기엔 너무 아쉽습니다. 미리 계획했던 여정은 아니지만, 간단하게 산책하며 툰 호와 산맥을 구경해보기로 합니다. 우선 점심을 먹으면 좋겠는데 산골 동네라 그런지 주변에 음식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호수를 따라 펼쳐진 국도를 무작정 걷다 보니, 곧 식당이 있는 작은 시내가 나옵니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는 길 입니다만 적당히 뜨거운 햇살과 시원한 바람에 걷는 것조차 마냥 즐겁습니다. 분위기 있는 가게에 들어가서 take away로 칠리 콘 카르네를 주문하고 아무것도 없는 차도를 따라 계속 걸어갑니다. 걷는 길의 풍경들이 새삼 신기해 잠시 멈추어 셔터를 누르고 다시 걷기를 반복합니다. 사람도 없고 가끔 차가 지나가는 길은 세상에 온전히 저 혼자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호수가 한눈에 트이는 묘지공원에 앉아 가져온 점심을 먹고 있자니, 꼭 영화 속에서 본 나 홀로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이 된 것 같습니다. 다 먹고 나서는 길에는 강아지와 산책하던 한 아저씨가 제게 'Enjoy your journey'라고 인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슈피츠 성으로 향하는 길은 언덕을 오르내리는 쉽지 않은 코스입니다. 제법 경사가 급한 길을 캐리어와 함께 오르내리는데 힘이 부칩니다. 처음 출발할 때도 무거웠었지만 여행을 다니면서 늘어난 짐은 확실히 무거워진 게 체감됩니다. 내리막에서는 떠내려가지 않게 잡느라, 오르막에서는 끌고 올라가느라, 자갈길에서는 직접 들고 가느라 한참을 진을 뺍니다. 간신히 도착한 슈피츠 성은 현실의 성이라기 보단 과자와 헝겊으로 기어 만든 동화 속 성처럼 보입니다. 성 내부엔 별다를 것이 없지만, 성에서 보이는 호수와 산골의 풍경이 볼만 합니다. 호수에 바둑판처럼 서있는 보트들과 유람선, 산골을 따라 지어진 마을의 풍경을 눈과 마음과 카메라 셔터에 담아두기로 합니다.
성을 한 바뀌 둘러보고 다시 슈피츠 역으로 돌아옵니다. 즐거운 산보를 끝내고 인터라켄으로 가던 기차를 마저 타고 갑니다. 툰 호를 따라서 얼마 가지 않아서 바로 인터라켄 역이 나옵니다. 인터라켄 역은 자연에 둘러싸인 전형적인 휴양지입니다. 사방이 구름에 잠긴 산과 호수들로 둘러싸인 동네에 걸어도 걸어도 주변에 호텔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중간중간에 골프장, 테니스장, 수영장이 있고, 시내에는 식료품점들과 기념품점들이 모여있습니다. 신기한 것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하늘에서 페러글라이더가 끊임없이 내려온다는 것이고, 하나는 한국인이 진짜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숙박하는 백패커스 호스텔은 호텔 안내 대부분이 한국어로 이루어져 있고, 보이는 투숙객의 70 퍼센트는 한국인인 거 같습니다. 인터라켄의 각종 액티비티나 안내 책자도 한국어로 되어있고, 심지어 카톡 플러스로 관광 안내 상담까지 해주는 것이, 여기가 한국 관광지인가 착각할 정도입니다.
호스텔에 도착해서는 글을 정리하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눈을 감고 되새김질하는 슈피츠의 여정은 생각할수록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여행'을 실감하는 슈피츠의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