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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개구리 Jun 23. 2020

소리

살아가면서 환청처럼 듣게 되는 엄마의 목소리

봄비 그친 밤이다.

어느덧 빗소리도 사그라지고, 주위는 고요하고 시계 소리만 ‘째깍째깍’ 들린다.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지는 저 소리가 싫어 소리 없는 시계로 바꿔버릴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저것마저 들리지 않는다면 이 밤이 너무 쓸쓸할 것 같아 바꾸지 않고 그냥 쓰기로 했다.
 
어느새 8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함께 살던 엄마와 영원한 이별을 한 것이...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언제일지 모르는 이별을 막연히 상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혼자가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미 8년의 세월이 지나가버렸으나 눈감으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날...
일 때문에 밤을 새우고 들어온 날 새벽, 예민한 성격이라 잠을 곤히 주무시지 못하는 엄마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나는 살금살금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내 방에 들어가 금방 단잠에 빠져들었다.

몇 시간을 곤히 자고 일어나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하기 위해 컴퓨터에 앉았다. 그리고 뭔가 알 수 없는 허전함은 새벽잠이 없어 항상 일찍 깨는 엄마의 인기척이 없기 때문이란 걸 알기까지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엄마가 깰까 염려하며 살짝 안방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이런 긴 이별을 생각하진 못했다. 엄마는 한마디 말도 없이 내 곁을, 사랑하는 가족의 곁을 떠나버리셨다.
 
119에 전화를 했다. 고인은 엠블런스로 이송하여야 한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형제들에게 어떻게 전화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엄마의 분신과 친척들에게 연락을 취했고 영안실에서 우리는 모두 났다.

지금도 난 운전하다 길에서 만나게 되는 엠블런스의 왱왱거리는 소리에 문득문득 슬픔이 울컥 차 올라옴을 느낀다. ‘아∼ 저 소리는 또 어느 분의 가정에 나처럼 슬픔을 안겨줄까?’ 생각하며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애끓는 통곡소리도 함께 떠올리곤 한다.
 
엄마 이름 앞에 붙은 익숙하지 않은 고(故)라는 글자... 그리고 작년까지 꼭 여덟 번을 지내면서도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의식, 제사... ‘산사람은 산다’는 말처럼 인간에게는 망각이라는 것이 있어 힘든 일을 겪고 나서도 살아낼 수 있는 모양이다. 그때의 그 슬픔에서 꽤 멀리 와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기억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건 아니어서 요즘 같이 아름다운 계절 봄이면 그날의 일들은 스멀스멀 기지개를 켜고 내 곁에 자리하곤 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엄마는 함께 차를 타고 다니는 걸 좋아했었다. 날씨 좋은 봄가을을 이용해 나도 될 수 있는 한 많은 곳을 엄마와 여행하려 노력했지만 ‘다음에...’ 하고 미루었던 스위스로의 여행을 가지 못한 채 엄마는 떠나버렸다. 그래서 풍수지탄이라는 말이 생겼나 보다. 부모가 이미 세상을 떠나 효도할 수 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의 사자성어를 이렇게 뼈저리게 느끼게 될 줄 알았으면 더 많이 효도하였을 텐데... 무엇이든 미루지 않고 그날그날 해버렸을 텐데...
 
나는 차를 타면 항상 음악을 틀었고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엄마는 따라 불렀다. 싫어하는 노래가 나오면 “저것도 음악이라고...” 하며 다른 걸 틀어주길 원하였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이면 그대로 틀고 다녔다. 지금 엄마가 단 하루만 내 차를 탈 수 있게 된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로 몽땅 틀어줄 수도 있는데...
 
전화하길 좋아하지 않는 난 아무리 늦어도 전화를 잘하지 않는 편이어서 엄마가 늘 먼저 전화를 거는 편이었다.  밥때가 지나면, 어둠이 내리면 어김없이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 내용은 늘 한결같았다.
“밥 먹었나?”
다소곳이 먹었다, 안 먹었다만 얘기하면 될 것을 내 대답은 또 퉁명스럽다.
“지금까지 밥도 안 먹었을까 봐?”
엄마가 떠나고 한참 동안 내 귓가를 맴돈 건 ‘밥 먹었나’와 ‘춥지’였다. 추운 겨울이면 끼니를 거를까 걱정하는 것 외에 '옷은 따뜻하게 입었나'가 하나 더 추가된다. 늘 들을 수 있을 땐 몰랐는데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그립다.
 
일곱 남매 중 아버지를 닮은 자식들은 노래를 못 하는 편이었고 엄마를 닮은 자식들은 노래를 잘하는 편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닮아 음치에 가깝다. 가족 소풍이나 가족 잔치에서 엄마가 잘 부르는 18번은 ‘애정이 꽃 피는 시절’이었다. 음색 좋은 엄마의 고운 노랫소리는 항상 모두의 박수를 받고 어김없이 앙코르도 받아냈다.
어느 해 아버지 직장에서 남해 쪽으로 여행을 갔을 때 우리들 중 세 자매가 엄마와 함께 따라갔었다. 그때의 추억은 카세트테이프에 그대로 녹음이 되어 있어 문득 엄마가 사무치게 보고 싶을 때는 항상 테이프 속에서 엄마의 음성을 찾아 듣는다.
 
한여름의 녹음보다 5월의 푸르른 신록이 더 좋다던 엄마는 네 잎 클로버를 찾아 아파트 화단을 산책하곤 했다.
어느 5월, 행운을 준다는 네 잎 클로버를 찾고 소녀처럼 즐거운 웃음을 지으며 건네준 클로버 잎사귀는  내 책꽂이 제일 앞자리에서 항상 나를 지켜주고 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엄마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이것이 네게 행운을 줄 거야.’라던 엄마의 말씀처럼 큰 행운이 찾아올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엄마는 신문 읽기를 좋아했다.  1면부터 32면까지 때로는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나는 ‘엄마처럼 똑똑한 사람은 치매에 안 걸릴 거야.’라고 했지만 엄마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치매 같은 힘든 병에 걸려 자식들을 고생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신문을 열심히 읽었나 보다. 신문에서 얻은 지식으로 엄마는 컴퓨터 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린다든지 엘니뇨, 라니냐 등의 기후변화에 관한 뉴스도 가장 먼저 알려주었다. 모르는 게 없는 엄마가 다소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엄마가 곁에 없는 지금은 엄마 방송 뉴스를 단 한 번만이라도 듣고 싶다.

 
절을 지어 사회에 헌납하셨던 외할아버지의 딸답게 엄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크게 소리 내어 읽는 <천수경>은 어린 시절부터 내 귀에 익숙한 것이어서 자연스럽게 내 종교도 불교가 되었다. 엄마가 다니던 절에 가서 향내를 맡고 독경소리를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엄마처럼 열심히는 아니지만 아버지의 위패가 모셔진 그곳을 나는 가끔 찾는다. 부처님께 절을 하고 기원을 하는 불자들 속에서 엄마의 경 읽는 소리를 듣는다.
‘마하반야 바라밀다 심경 관자재보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 모지사바하’로 끝나는 엄마가 늘 외우시던 불경 <반야심경> 역시 특별히 외우려 하지 않았어도 귀에 쟁쟁한 것이다. 독경이 끝나고 나면 “니 아부지 보고 가자.”라는 엄마 소리가 들리는듯하여 아버지 위패를 찾아 꼭 절을 올린다.
 
평생 열심히 독경을 읽고 착하게 산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모두가 원하는 최후를 맞이했다. 나이 들어가며 바라는 한결같은 소망 ‘자는 듯이 가는 것’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것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꼭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긴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내게도 가장 큰 바람이 되었다.
 
“선한 사람이 이긴다.”
“착한 끝은 있다.”
“조금 손해 보는 듯이 살아라.”
엄마가 늘 하는 말에 나는 “에이, 악하게 사는 사람이 더 잘 되던데?”라고 했었다. 하지만 내 생각도 악하게 사는 것보다 착하게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결론이다. 청개구리 같은 내 대답에 엄마는 항상 “아직 다 산 거 아니다. 세상 마칠 때 보면 착하게 산 사람의 끝은 있다니까... 자기 대에 못 받으면 후대에서라도 꼭 복 받을 거다.”라고 얘기했었다. 인생의 반 이상을 훌쩍 넘긴 이 나이가 되어 주변 사람들의 최후를 보며 생각해보니 엄마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일상생활을 하며 나는 8년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는 또렷한 엄마의 흔적들과 만난다. 엄마는 약을 먹고 나서 약봉지를 식탁에 그대로 두는 습관이 있는데 그걸 치우며 나는 항상 잔소리를 해댔었다. 그럴 때마다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들어주던 엄마... 하지만 지금 나는 너무나 엄마와 닮아 있는 나를 보곤 웃음 지을 때가 종종 있다. 그래야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쉽게 기억할 수 있다고 하던 엄마가 오늘따라 무척 그리운 건 아마도 봄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개수대에 설거지용 그릇을 꺼내 두고 수돗물을 졸졸 소리 나게 틀면서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곤 한다.  엄마가 그럴 때면 언제나 마음속으로 ‘개수대에 그냥 물을 틀어놓고 설거지하면 될 일을 수돗물 얼마나 절약한다고...’라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내 곁을 떠난 지 오래된 엄마지만 아직도 매사에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갈림길에서 흔들릴 때도 늘 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엄마의 목소리가 있어 주변 사람들에게서 사랑받고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전화소리에서, 노랫소리에서 그리고 독경소리 등 엄마와의 추억이 얽혀 있는 모든 소리들에서 나는 늘 엄마를 만나고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현실세계에서 그 모습이 사라졌어도 이렇게 우리 모녀처럼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기는가 보다. 자신과 꼭 닮은 자녀를 남겨 그분들을 그리워하게 하는 것처럼...
 
시계 소리는 점점 크게 들리고 주위는 더욱 고요해졌다. 봄비는 이미 그쳐 있고 아파트의 건너편 동 불빛도 이제 거의 꺼졌다. 

어딘가에서 들리는 엄마의 음성, “이제 그만 자거라.”
환청일 거란 걸 뻔히 알면서도 두리번거려지는 건 간절한 보고 싶음이었다. 그리고 그리움이었다.
아직도 시계는 “째깍째깍” 지치지도 않고 잘도 간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 위로 엄마의 얼굴이 부옇게 비친다. 이내 코끝이 따가워진다.
나는 저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던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던 하지만 정말 하고 싶었던 한마디를 중얼거려본다.
“사랑해, 엄마...”
 
엄마일 까닭 없는 엄마 소리를 따라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꿈속에서 엄마를 만나 엄마 냄새를 맡고 아직도 다 하지 못한 말들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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