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잡지사의 세 친구 이야기, <볼드타입>
<볼드타입>은 뉴욕의 패션 매거진 회사를 배경으로 하는 에피소드 형식의 드라마이다. 제인 슬론과 서든 브레이디, 캣 에디슨의 세 캐릭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세 사람은 패션 잡지 ‘스칼렛’에서 근무한다. 각자 에디터, 비서, 소셜 미디어 관리자로서 조직 내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 같은 사무실에서 어색하게 얼굴만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 셋은 긴장감 넘치고 재미있는 사건을 통해 함께 웃는 사이가 된다.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을 때는 세 사람이 정말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각 인물의 배경이 드러날 때마다 내 예상은 하나씩 깨져갔다.
서든은 집안 형편으로 인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급하게 일자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원하지도 않는 비서직으로 ‘스칼렛’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반면, 제인은 어릴 적부터 ‘스칼렛’의 에디터를 꿈꿨다. 차근차근 준비를 거쳐 원하던 자리를 얻게 되었다. 캣의 경우, 부모님이 소개해준 인턴직으로 비교적 빠르게 ‘스칼렛’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래서 현재는 친구들보다 높은 직급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캣은 뭐든 해보는 도전 정신과 자신감을 지녔고, 서든은 자신이 원하는 일에는 완벽하게 매진하는 동시에 성숙한 인간관계를 꾸려나간다. 그에 반해 제인은 관계에 폐쇄적이며 새로운 환경에 두려움이 많다. 이렇듯 세 친구는 가정환경, 경제 사정, 그리고 인간관계까지 모조리 다르다.
<볼드타입>의 각 에피소드에는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한다. 세 사람은 같은 문제를 놓고도 언제나 서로 다른 태도와 의견, 그리고 해결책을 보여준다.
‘스칼렛’에 다니던 제인은 새로운 언론사 ‘인사이트’로부터 스카웃 제안을 받는다. 이직 후 에디터 활동을 이어갔지만, 예상과 달리 ‘인사이트’는 제인의 올바르고 자극적이지 않은 기사들을 석연치 않아 한다. 제인의 동의 없이 기사 내용을 전부 바꿔 발행하고, 그의 방송 활동까지 통제하려고 한다.
제인은 ‘인사이트’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생방송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그러나 돌아온 결과는 해고였다. 시즌2 5화의 에피소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은 제인은 급히 구직 활동을 한다. ‘인사이트’로부터 부정적인 소문이 나 많은 회사가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낙담하던 제인은 지인을 통해 새로운 잡지사 면접을 보게 된다. 면접 분위기는 꽤 우호적이었다. 제인은 당연히 붙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있었지만, 탈락이라는 결과를 듣는다. 지인이 전해준 탈락 사유는 이렇다.
“그 회사가 요즘 인종 다양성을 추구하려고 노력하는 단계라 널 채용하는 건 어려울 것 같대.”
제인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억울함을 전한다. 다양성을 향한 변화를 만들어 볼 거래. 착잡한 표정과 말투로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도 그건 좋은 움직임인 거잖아. 캣이 말한다. 그래, 나도 그게 중요한 건 알아. 하지만 그런 움직임만 아니었다면 직장을 얻었을 수 있었을 텐데. 불공평한 처사라고 생각해. 제인의 말에 캣은 씁쓸한 듯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니까 넌 너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다양성을 지지하는 거구나.”
“So your all for diversity as long as it doesn’t affect you?”
캣은 유색인종이다. 자신이 백인이라서 억울한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제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캣은 ‘스칼렛’에 알게 모르게 늘 백인만 새로 채용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유색인종 지원자의 포트폴리오는 한번 들춰져 보지도 못한 채 제외되곤 했다.
캣은 그런 현실을 인지하고 조금이나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소셜 미디어 부서에 한해서라도 다양성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유색인종 지원자의 능력에 조명을 비추어주었다. 더불어 ‘스칼렛’의 소셜 미디어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소수자들에게 마이크를 건네며 힘 써왔다.
그러나 제인은 캣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왜 내가 인종차별주의자(racist)인 것처럼 말하는 거야?"
"Why are you acting like I’m being a racist?"
두 사람은 다음 날 다시 만난다. 제인은 여전히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탈락했다며 억울해한다. 이에 대한 캣의 대답이 인상 깊었다. 그래. 유색인종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해. 제인은 피부색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 경험이 처음이었겠지만, 캣은 그렇지 않다. 캣을 비롯한 유색인종들은 기회에 언제나 차별이 동반하는 세상에 살아왔다. 불이익이 익숙한 삶 속에서 이따금 제대로 된 기회를 얻는다. 제인이 탈락한 바로 그 자리를 두고 말이다.
캣은 그런 유색인종의 상황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사회는 기묘할 정도로 백인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캣은 제인에게 이렇게 묻는다. 백인으로 가득 찬 방에 들어가면서 그걸 인지해본 적 있어? 제인은 대답하지 못한다. 스칼렛의 이사회는 모두 백인으로 구성되어있다. 캣은 발표를 위해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불쾌한 기시감을 느꼈을 거다. 중요한 자리라면 어디든 백인이 훨씬 많았다. 제인은 지금까지 그 사실을 의식조차 하지 못했고, 캣은 매 순간 뼈저리게 느껴온 것이다.
제인은 멋진 캐릭터다. 자신의 커리어에 위협이 생길 거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썼던 기사의 편협했던 시각과 오류를 생방송에서 정정한다. 제인은 타인 혹은 자신이 소속한 단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처음 마주한 자신의 불이익 앞에서는 제인도 객관적이지 못했다. 살아오던 방식에서 멀어져 난생처음 차별을 겪은 사람은 대부분 제인처럼 반응한다. 지금껏 누리고 살아온 혜택은 ‘누렸다’라는 인지를 하지 못한 채 빼앗긴 한 가지에 집중한다. 평생 백인으로서 얻은 혜택과 특권은 제인의 무의식 속에 있다. 어쩌면 무의식에조차 없을 수도 있다. 세상은 당연히 그렇게 흘러가는 거라고 여기며 살아왔다면 그런 자기중심적인 시각을 가지기에 십상이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이다. 누리고 있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맹점으로 내버려 둔다.
예를 들어,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엘리베이터가 없는 지하철역은 걸어서 다니면 그만이다. 대다수의 비장애인은 어떤 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있는지 기억하지도 못할 거다. 사회가 조성해둔 비장애인 중심의 환경을 누릴 만큼 누리다가 장애인 지하철 시위가 있는 날이면 내가 왜 이런 불편을 겪어야 하는 거냐며 그들을 탓한다.
제인에게 백인으로서의 특권을 각인시킨 캣도 사실 부유한 부모님에게 많은 걸 받으며 자라왔다는 경제적 특권을 가지고 있다. 당장 일자리가 없으면 생계가 위험해지는 제인과는 상황이 다르다. 다만 캣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인지하고 인정했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으로 소외된 이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캣과 충분한 대화를 마친 제인은 자신이 누려온 혜택을 인정하고 불평하기를 멈추었다. 제인은 성공적으로 그리고 떳떳하게 새 일자리를 구한다.
캣과 제인이 그러했듯 우리도 자연스레 가지게 된 사회적 특권들을 인지해야 한다. 길거리에 나선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시끄럽게 목소리를 내는지 생각해보자. 자신은 이미 가지고 있는 걸 간절히 바라고 있는 모습은 아닌지, 자신은 오만하게 그걸 직접 쟁취했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충분히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여전히 개인적인 노력의 수준으로만 결과가 정해진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주류 계급에 속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백인이거나 남성이거나 비장애인이거나 이성애자이거나, 영어권에 거주하거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거나. 그 외에도 다양한 사회의 주류에 소속되어있을 거다. 앞서 말했듯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문제’로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의 몫을 떼어 받은 이들은 그걸 웬만해서는 인지하지 못한다.
<볼드타입>의 이 에피소드가 유난히 기억에 남은 건, 특권을 주제 삼은 갈등이 매우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의견 대립은 보통 서로를 향한 증오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제인과 캣은 어쨌든 서로를 매우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 사이이기에 수용적인 태도로 대화에 임한다. 둘의 갈등은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이외에도 <볼드타입>은 우리가 쉽게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는 수많은 주제를 다룬다. 캣은 20대의 끝자락이 되어서야 성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그리고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정계에 발을 들이기도 하지만 숱한 억압과 조롱을 받으며 한계를 깨닫기도 한다. 제인은 유전으로 유방암 진단을 받고 유방 절제 수술을 한다. 암 판정과 수술, 그리고 회복 단계에서 제인이 겪는 심리적/신체적인 고통을 숨기지 않고 보여준다.
<볼드타입>은 이렇게 평소 대화를 나누기에 곤란할 법하면서도 참신한 주제들을 다룬다. 묵직한 주제들을 재미있게, 그리고 그리 슬프지 않게 볼 수 있었던 건 주인공이 세 명의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어떤 역경을 겪어도 그의 옆에는 꼭 두 명의 친구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도 안정감을 주었다. 당신도 당장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볼드타입>을 시청하고 그들의 끈끈하고 건강한 우정을 함께 느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