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기 : Day 4
Day 4
한 젊은 남자가 마임공연을 하며 마련한 돈으로 순례를 마치고 그 기록을 발행한 사진집을 본 적이 있다. 물 대신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에서 와인을 홀짝홀짝 받아 마시다가 취해 순례를 겨우 마쳤다는 구절도 기억에 남는다. 또 하루는 한겨레 신문의 짧은 에세이를 싣는 칸에 한 기자가 혼자 순례를 다녀온 후기를 남긴 것을 읽게 되었다. 이런 길도 있고, 이런 길을 혼자 걷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언젠가'는 나도 걸어봐야지, 생각만 해 온 것이다.
가방을 덮는 덮개를 잊어버렸다. 어제 와인을 마시고 일찍 침대로 돌아가 잠든 탓에 새벽녘 늦게 일어나 물을 찾았다. 허벅지와 어깨가 쪼개질 듯 아파왔다. 피례녜 산맥을 넘으며 신고식을 호되게 치른 탓인지 가방에 먹을 게 있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어제 마신 술 덕분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결국 아침부터 주방에서 난리법석을 피웠다. 아침부터 허둥지둥. 결국 레인커버를 두고 나오는 것으로 대가를 치렀다. 무엇이든 한번 할 때 제대로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샤워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헹구지 않으면 몸이 가렵다.
새로운 까미노 패밀리를 만나게 되었다. 지난 대성당 저녁 만찬에서 만난 울리엘과 같이 걷게 되었다. 이스라엘에서 온 투어 가이드인 우리엘은 아버지가 걷던 까미노를 따라 걷고 싶어 왔다고 했다. 혼자 하는 여행은 처음이라며 굉장히 들떠있었다. 그리고 아침을 먹다 만난 팀과 웬디는 변호사인 큰 딸과 치과의사인 작은 딸 그리고 재활치료를 공부하는 막내딸이 있다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3년 간 영어 선생님으로 일했던 멜을 만나게 되었다. 멜은 채식주의자인 순례자들을 위한 다양한 채식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함께 길을 걷다가 오디나무가 보이면 한 손 가득 수북이 따 가지고는 쥐어주기도 했다. 하루는 오렌지를, 하루는 구운 파프리카를 스윽 내밀었다. 근육이 아프다고 하면 어느새 볼타민과 멘톨 냄새가 나는 크림을 놓고 가고 젊은 배낭여행자를 위해 바느질하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팀과 웬디, 우리엘과 멜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서 조곤 조곤 이야기를 하며 길을 걸었다. 영화 이야기도 하고 성당에 들러 도장도 받고 기도를 드리며 눈물을 훔치는 멜의 곁에 앉아서 휴지를 건네주기도 했다.
팜플로나에 묵을 생각은 없었는데, 마을도 천천히 둘러볼 겸 그냥 쉬어가기로 했다. 까미노를 걷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혼자 해나가는 것, 다시 말하면 정해진 루트나 옳다는 일정이 없기 때문에 그저 나의 체력과 마음이 허락하는 대로 자유롭게 흘러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이제야 서서히 이해해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