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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타임조아나 Nov 19. 2020

사랑, 최초의 응원

산티아고 순례기 : Day 11

Day 11



  일정대로라면 산토 도밍고 Santo Domingo에서 지내야 했지만 어제 유경 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 덕분에 그라농 Granon으로 왔다. 산토도밍고에서 약 7km가 떨어져 있어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했다. 하루 종일 날씨가 좋아 기분 좋게 걸었다. 햇빛이 쨍쨍해 가방에 양말을 걸어 말려볼까 생각했지만 고속도로 옆을 걸어가야 했기에 다음을 기약했다. 대신 생각보다 마을에 일찍 도착해서 따뜻한 물로 빨래를 할 수 있었다. 볕이 좋아 금방 마르겠지. 언니의 말만 듣고 한 시간을 더 걸어 이곳 그라농까지 온 이유는 바로, 알베르게 때문이다. 성당을 개조해 알베르게를 만들고 기부금으로 운영을 한다는 이곳을 유경 언니가 추천해주었다. 






양 옆으로 펼쳐지던 포도밭과 솜사탕 같던 구름


  혼자 걸을 때는 움직이는 두 다리와 호흡에 집중한다. 찌르르하게 저려오는 엉덩이, 단단해지는 종아리 그리고 시큰거리는 발바닥에 집중하다 보면 잘 걷고 있는지, 아니면 기운 없이 축 늘어져 걷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계속 이어지는 길에 지루해지면 노래를 흥얼거린다. 주로 신나는 리듬으로 흥얼거리려고 한다. 빠른 박자에 맞춰 걸으면 조금 더 빨리 걷게 된다. 한바탕 노래 부르기가 끝나면 공상에 빠진다. 과거에 겪은 일도 떠올리고 오늘은 다이어리에 무엇을 끄적여볼까 고민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은 '연애'에 관한 기억이다. 







  우리엘과 하루 종일 함께 걸었던 날이 있었다. 날이 좋아 사진을 많이 찍고 근처 카페에 앉아 라떼 Cafe con leche를 두 잔씩 시켜마시며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었다.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은 <스위니 토드>라며 가지고 온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무거우면 네 배낭에 있는 것 중에 가장 무거운 거 들어줄게! 우리엘이 미소를 머금으며 하나 남아있던 추로스를 입에 넣었다. 순간, '내가 이 아이를 좋아하는 건가?' 고민에 빠졌다.  

 

  과연 나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보았을까? 아니 제대로 된 '연애'는 해보았을까? 제대로 된 사랑은 무엇일까? 연애를 하는 사람들은 다 사랑에 빠진 걸까? 이 차이는 무엇일까? 질문이 꼬리를 물고 따라온다. 누구나 바보 같은 시절을 지난다. 특히 연애사에 있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는 감정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견뎌내느라 애를 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약해지기도 하고 한없이 바보 같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괜찮다. 나 역시도 잘 겪어내겠지. 이 길을 걸으면서 천천히 흘러가는 풍경처럼 이 모든 것들도 가끔은 오래 또는 빠르게 곁을 지나가겠지. 걷는 발자국 하나마다 되새기고 또 되새긴다. 난 잘할 것이라고 그리고 분명히 괜찮아지고 있다고 말이다. 

 





직접 따온 붉은 오디 




  고대 그리스가 배경인 영화에 나올 법한 원형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벽면에는 이미 이곳을 거쳐 지나간 순례자들이 직접 적은 안내문이 나라별 언어로 붙어있다. 그리고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지만 이미 그 미소 만으로 모든 것을 평화롭게 만드는 호스피탈레로들이 우리를 반긴다. 모두 자원봉사자로 이곳에 온다. 순례자를 그저 돈을 가진 여행자로 보는 일부 사설 알베르게에 비해 이곳의 자원봉사자들은 진심으로 모두의 행복을 빌어준다. 함께 기도를 하고 저녁을 준비한다. 양파를 썰고 감자를 다듬는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왔다는 아주머니와 함께 디저트로 먹을 오디를 씻어 인원수에 맞게 구워놓은 푸딩 위에 얹는 것을 거들었다. 



그라농의 호스피탈레로 할머니


  다음날 아침, 나갈 시간이 되어 마지막으로 호스피탈레로 할머니를 찾았다. 나는 연신 땡큐 쏘 마치 Thank you so much, 감사합니다, 그라시아스 Gracias를 외쳤는데, 할머니는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이탈리아어로 무슨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는 두 손을 꼭 맞잡고는 한참을 서서 기도를 드려주셨다. 나는 믿는 종교도 없고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그 순간 주름진 손마디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내 모든 것을 감싸 안았다. 이것이 이 길을 걸으려는 이유였을까. 호스피탈레로 할머니는 내 양볼을 감싸 쥐고는 가벼운 포옹과 뽀뽀를 해주셨다. 누가 알았을까. 이 날의 기억이 힘들어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최초의 응원이 되었을 줄은.  







+ 덧글 


  간단한 재료를 가지고 음식을 맛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능력이다. 그날 저녁은 매콤한 맛이 나는 수프와 토마토와 양파, 참치, 옥수수 그리고 삶은 감자로 만든 샐러드 파스타였다. 새롭고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을 맛볼 때마다 잘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말라가에 살게 되면 해 먹어봐야지, 다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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