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기 : Day 9
Day 9
스페인어를 배워가는 중이다. 제대로 발음하기가 힘들고 버벅대지만 그래도 떠듬떠듬 스페인어로 아침식사를 주문하고 최대한 '대화'라는 것을 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오늘은 마켓에서 돼지고기, 양파, 제철과일을 여러 가지 사는데 손짓 발짓을 해가며 겨우 성공했다. 그래, 뭐든 하나씩 해나가면 되는 것이지.
작별의 순간은 애틋하다. 여기서는 더욱 그렇다. 다들 각자의 리듬으로 길을 걷기 때문에 일정이 비슷하거나 묵는 숙소가 매번 같지 않는 이상 다시 마주치기가 쉽지 않다. 오늘 아침 카페에 들러 순례자 메뉴 -각 카페마다 다르지만 주로 커피와 오렌지주스, 올리브 오일과 토마토소스를 발라 구운 호밀빵이 함께 나온다-로 아침을 먹는데 브랜든 할아버지가 다시 보자며 작별 인사를 했다. 어딜 가나 홍차를 마시며 가이드북을 읽던 브랜든 할아버지였는데, 어쩌면 이게 마지막 인사일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괜히 아쉬워졌다. 빵을 먹다 말고 문 앞까지 나가 배웅을 했다.
팀 그리고 웬디와 작별인사를 하고 이틀을 나와 멜, 우리엘 그리고 조가 함께 걸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가 되었다. 오늘은 로그로뇨에서 나헤라까지 가는 일정이었는데 나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은 중간의 작은 마을에서 지내기로 했다.
무리 중 나이가 가장 적었던 나는 왠지 모르게 막내딸이 된 기분이었다. 무겁게 짊어지고 온 재료들로 뚝딱하고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어주던 멜과 가파른 언덕이 나오면 장난스럽게 뒤에서 배낭을 밀어주던 우리엘 그리고 함께 와인을 마시고 그네를 타다가 미끄러져 기둥에 코를 박아 생긴 멍을 보고 한참을 놀려대던 조까지 이 모두를 두고 혼자 다시 길을 떠나려니 괜한 걱정이 밀려왔다. 카페에 들러 화장실을 다녀온 나에게 조가 '너도 여기 남지 않겠냐'라고 재차 물었다. 너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다 여기 있지 않느냐고. 하지만 다시 길을 나서기로 결정했다. 혼자 걸을 때가 오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익숙하고 좋은 사람들을 떠나는 일은 당연히 고되고 슬프다. 하지만 나는 나헤라로 오고 싶었다. 지금 나는 떠나는 연습과 녹아드는 연습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겠지. 9월 12일, 생장으로 가는 야간 기차에서 혼자였고 오늘 다시 혼자가 되었다.
까미노는 인생을 제대로 시작해보지 않은 사람들과 어떻게든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내고 마무리에 들어선 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이 섞이며 만들어내는 화음은 아름답지만 가끔 일방적이고 이기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평화롭다.
나헤라로 오는 길에 함께 걷게 된 마리아는 크로아티아에서 온 22살의 소녀다. 나이가 비슷한 여자애 둘이 모이니 금세 이야기가 통해서 깔깔거리며 걸었다. 특히 남자 이야기를 할 때의 우리는 무척이나 잘 맞았다.
마리아는 현재 남자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니, 제대로 된 연애를 하지 못했다기보다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는 것이 더 맞겠다. 왜 전화를 하지 않았는지, 왜 나를 더 사랑해주지 않는지 끊임없이 묻고 애정을 구걸했다. 하지만 지금 남자 친구를 만나고부터는 쓸데없는 불안도, 의심도 없어졌다고 했다. 가끔 예전에 만난 남자들을 떠올리면 우울해지거나 전 남자 친구 생각을 멈출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이렇게 소리친단다.
"Hello, Feeling! you come again! 안녕, 이 감정들아! 또 찾아왔구나!"
듣자마자 배꼽을 잡고 한참을 웃었다. 머리로는 그만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그저 또 찾아온 그 빌어먹을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외친다는 것이다. 안녕! 또 왔구나! 이 이야기를 분명히 어디에선가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포도밭의 흙냄새와 함께 양볼을 스치는 장작 냄새를 맡으며 마치 물에 젖은 스펀지 마냥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되었다. 안녕! 너 또 왔구나!
+덧 글
일본에서 근무하던 때, 브랜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들었다. 할아버지의 아들이 유품과 메일을 정리하다 까미노 패밀리에게 소식을 전했다는 것이다. 마음이 먹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