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7시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생각-4

by Old Bamboo 노죽


산티아고 순례길 22일 차를 걸었다.

이제 남은 거리가 300km도 남지 않았다.


뉴스에서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엊그제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역에 갑작스러운 정전이 발생했다.

일부 지역이 아닌 국가 전체가 정전이라니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나는 오전부터 열심히 걸어서 12시경에 예약해 놓은 숙소에 도착하여 체크인 수속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건물 내부가 어두운 상태였다.

침대를 배정받고 짐을 풀고 핸드폰 충전을 하려고 하니 전기가 없어 숙소 관리자에게

물어보니 정전이라고 한다. 그때서야 정전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였는지 로밍해 간 핸드폰이 카카오톡을

내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걸으면서 먹을 것들을 사기 위해 수퍼마켓을 찾아 나섰다.

수퍼마켓은 큰 대형 체인과 작은 동네 가게가 있었는데 나는 멀리 가기 싫어 동네 가게로 갔다.

들어서 둘러보니 이 사람들의 밥 대용 빵들은 다 팔렸고, 디저트용 달달한 빵들만 남아 있었다.

나는 물, 주스 바나나 정도 사고 계산을 하는데, 손으로 일일이 붙인 가격표를 보고 계산을 했다.

나중에 큰 체인 마트에 간 친구들 얘기를 들으니 전기가 나가니 거기서는 바코드 스캐닝이 되지 않아

계산원이 일일이 계산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영업을 중단했다고 한다.


숙소에 달린 Bar와 식당에서는 음료와 술은 마실 수 있지만 조리를 하는 음식은 서비스가 되지 않았다.

샤워도 온수를 공급하는 보일러와 물을 세게 보내주는 펌프가 작동되지 않아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다들 당황하다가 다행히 날씨가 쾌청하였기에 하나둘씩 야외 테이블로 모였다.

각자의 음료를 들고 그리고 나처럼 미리 장 봐둔 먹거리들을 나눠 먹으며 서로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테이블에는 독일, 네덜란드, 남아공, 에스토니아 그리고 나까지 5명이 앉아 처음에는 서로 들은 정전에 대한 정보를 나누다가, 2차 대전, 동서독 분단, 우리 남북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코로나 시기 상황 비교도 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느낀 생각들도 나눴다.


이제 Bar에서도 맥주나 와인을 주문해도 그동안 설거지가 되지 않아서 플라스틱 용기로 서비스할 때까지

정전은 복구되지 않았다.

오후 8시경이 되면서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모두의 걱정이 커질 무렵 숙소 관리자가 이제 전기가 들어온다고 기쁜 목소리로 소식을 전한다.


오후 1시부터 장장 7시간에 걸친 우리들의 음주(?) 대화를 마칠 수 있었다.

보통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저녁 8시는 취침 준비를 완료한 시간이다.

이 날은 밤늦게까지 샤워 등 낮에 못한 정리들을 하느라 피곤한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걷기 시작하다가 식사를 위해 잠시 들린 카페에서 TV를 보니 항공기 운항이 중단되고 달리던 고속열차가 멈출 정도로 심각한 일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심각했던 정전 때문이지만, 우리가 함께 웃고 즐기면서 보낸 7시간은 우리의 산티아고 순례길의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 이후 걷는 여정에서 같이 놀았던 친구들과 종종 부딪치면 반갑게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만남은 스페인 전국을 멈춘 정전도 막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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