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나 이웃들 간에 딸이나 며느리의 난임 치료 이야기가 부쩍 오간다. 남에게 말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험관 시술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괴로움은 친정엄마나 시엄마 몫이기 때문이리라. 낮은 시험관 임신 성공률로 허탈해 하는 당사자를 매번 위로하기 괴롭다는 한 친구가 말한다.
“딸 시집보냈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어. 사돈댁이 시험관 비용을 공동 부담하자고 하더라고. 시술이 세 번 실패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친정부모가 내주길 은근 기대하는 거야. 좀 야속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떡하니? 다행히 다섯 번 만에 성공했어.”
시험관 시술이나 인공수정 시술엔 현재 건강보험이 적용된다. 그렇긴 해도 개인부담 비율은 만만치 않다. 시험관 시술비 외에 남는 배아를 냉동하고 보관하는 비용도 비급여 항목. 결국 시댁이나 친정이 형편껏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한편, 난임 치료에 투입되는 비용이 건강보험 적자를 악화시킨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나라 걱정이 많은 우리들 중 누군가 말한다. “난임은 치료할 수 있지만 진짜로 대책 없는 건 출산 기피 경향 아니니? 이러다가 설마 나라가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
2022년 이 나라의 합계출산율은 0.78 퍼센트.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소멸이 예상되는 국가 1위라는 소리도 들린다. 소문대로 일명 국민소득 3만불클럽에 든 선진국의 출산율 저주일까?
낮은 출산율의 배경은 나라마다 다를 것이다. 결혼도 출산도 안하겠다는 이 나라 젊은 세대들을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들에겐 각자의 이유가 있을 테니까.
“결국 문제는 부동산이야.” 한 친구가 딱 잘라 말한다. “결혼할 때 전세 아파트 하나도 당사자들 힘만으론 마련하기 힘든데, 아기 낳을 엄두가 나겠니? 출산 장려금 명목으로 정부가 돈을 찔러준다고 출산율이 올라갈 것 같아? 미친 집값부터 잡아야 돼.” 다들 폭풍 공감한다.
“맞아. 요즘 집값 폭락이라고 언론이 호들갑인데, 이건 집값 정상화라고 써야 되는 거지. 아파트 값이 더 빨리, 더 많이 떨어져서 젊은 사람들이 결혼이든 아기 낳기든, 스트레스를 덜 받는 날이 와야 돼.”
그렇다고 저출생, 저출산이 집값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류 문명의 방향이 비혼, 개인화로 가는 게 대세라던가.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더니 출산 역시 선택이 되어가는 건가.
2030 MZ 세대 여성들 사이에선 비혼이 거의 기본값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 이유 중엔 여전히 불평등 구조인 한국식 결혼이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을 것이다. 전업주부가 아닌 워킹 맘의 경우도 가사 분담률은 여전히 50퍼센트 이상. 식사준비를 포함한 기본 살림 노동만이 아니다. 출산 후 아기의 주 양육자는 물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변함없이 엄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실 시월드 속 감정 노동이나 명절 및 제사 노동 등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다. 가부장제의 한 전형인 시댁과 처가 가족들 사이 비대칭적 호칭도 아직 고쳐지지 않고 있다. 시누이는 ‘00 아가씨’인데 내 여동생은 그냥 ‘어이, 처제!’가 아닌가. 엄연한 사회 계약인 결혼에 내포된 숱한 불평등 조항이 젊은 주부들 사이에 광범위한 저항 연대를 형성하는 건 당연지사!
내 능력으로 생계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이상 내 인생을 내 뜻대로 살겠다는 그녀들의 자결권을 지지한다. 커리어와 내 인생이 결혼이나 아기 낳기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늘어나는 건 자연스런 경향일 터. 결혼을 하더라도 굳이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 아이 케어 뿐 아니라 경쟁 심리로 내몰리는 교육 지옥에 아이를 내몰고 싶지도 않고, 학부모 스트레스를 감당할 자신도 없다.
어느덧 관심은 반려 동물, 식물로 향한다. 과도하지 않은 책임감을 발휘할 양육 체험의 기회라서 좋다. 사랑스러운 강아지와 고양이와 함께 하는 나날,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진다. 이건 바로 내 딸과 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해 달라고 한다. 그럴 생각이다. 다만 내겐 나이 좀 먹은 선배로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기쁨과 고통이 고농축 배합된 패키지 프로그램이다. 분만실의 악전고투 끝에 아기를 품에 안은 순간에 일어나는 마법의 화학작용! 나는 단순한 DNA 전달자가 아니다. 아기는 내가 이 세상에 초대한 손님이라는 깨달음이다. 그렇다. 딸과 아들은 백년손님으로 내게 왔다.
하지만 현실 육아는 고통스러웠다. 도우미가 있어도 육아는 버거웠다. 아기는 자주 아프고 다치고 가끔 내 속을 문드러지게 했다. 아이들을 기르느라 몸과 마음이 피곤에 절어 혼자 삼박사일 잠자는 게 소원이었던 때도 여러 번. 연차를 내고는 출근하는 척 집을 나와 아무데로나 차를 달려 숲길을 혼자 걷다 탈진해 돌아온 날도 있었다.
아이들을 재우기 전에 먼저 잠들어 버리던 불량엄마. 주말 부부 시절, 혼자 감당해야 했던 육아로부터 도망가고만 싶던 날들의 기억이 지금도 나를 부끄럽게 한다.
어느덧 30대 후반과 중반에 이른 두 아이를 바라본다. 그들이 태어나고 한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풀코스로 지켜본 건 내가 이 세상에서 맛본 최대의 경이. 내 생애 최대의 업적이기도 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엄마도 아빠도 태어난다. 비로소 한 사람의 어른이 된다. 아기가 커가면서 엄마도 아빠도 함께 성장한다. 그리고 겸손해진다. 제 아무리 잘난 엄마나 아빠라도 금방 알아차린다. 자신들의 힘만으로 아기를 키워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나서야한다”는 것을. 옆집 아이가 울고 있다면 그 불행이 어떤 형태로든 내 아이의 행복을 방해한다는 것도 알아차리게 된다. 나는 믿는다. 아기를 낳고 키우면서 기쁨과 실망, 괴로움을 골고루 맛본 덕분에 나는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었다고.
모두가 나와 생각이 같을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사회적 지원체계 미비만을 탓하며 아기를 낳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이번 생을 낭비하는 것이 아닐까? 아기 기르는 여건이 완벽한 건 아니더라도 손쉽게 포기하지 말자는 거다.
한편, 덜 심각한 결혼, 또는 결혼보다 조금 느슨한 결합 형태를 고민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프랑스의 시민연대협약 (PACs)에 영감을 받아 만든 가칭 <생활동반자법>은 2014년 진선미의원이 발의했다. 하지만 기존의 가족제도를 위협한다는 우려로 상정되지 못했다. 성소수자들의 파트너십에 대한 법적 지위 부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활동반자법은 동거와 결혼 사이, 다시 말해 더 자유로운 동반자 관계에 법적 지위와 권리를 부여하는 데 초점을 둔다. 그 기간 중 태어난 아기들도 동일한 법적 권리를 갖게 된다. 본질적으로 어마무시한 리스크인 결혼을 감행하기 전, 함께 사는 결혼수습기를 통해 적응 훈련을 해보는 의미도 있다. 전면적 시월드 입성을 주저하는 여성들에겐 보호막을 제공하는 근거도 된다. 결과적으로 결혼 제도의 종말을 예방하거나 늦추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MZ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을 담아내는 결혼 담론의 백화제방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