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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할미 Mar 19. 2023

멋진 그녀 양자경


 올해 아카데미영화상의 여우주연상은 60세 양자경이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으로 우리와는 80년대부터 홍콩 액션 영화를 통해 안면이 많았다. 작품상, 감독상 등 7관왕이 된 영화, <애브리씽 애브리웨어, 올앳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에서 빨래방 여주인 역으로 등장. 콧대 높은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첫 아시아인이 됐다.     


 시상식의 백미는 수상 소감, 후보 지명을 받은 후 스피치를 고심해 왔을 건 분명하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이 누군가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기를 바란 후 양자경이 말했다. “And ladies, never let anybody tell you that you’re past the prime.” 나는 뒤집어졌다. 자신 또래의 여성들을 향해, “당신의 황금기가 지났다는 남의 말 따위엔 신경 쓰지 말아요.”라고 외친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계의 인종, 성, 노인 등 차별 3종 세트를 동시 저격한 그녀의 패기! 오랜 연기 커리어의 내공이 담겨있어야만 가능한 워딩이다. 영화판 밖의 세상도 그리 다르지 않으니 나이든 여배우의 말은 묵직한 울림을 지닌다.  

    

 이어지는 한 마디. “제 엄마께, 세상의 모든 엄마들께 이 상을 바칩니다. 그분들이야말로 진짜 영웅이시니까요.” 신선하다. 자신의 엄마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엄마들과 골고루 나누는 상이라니. 가족 내 평생 노동과 헌신을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가족들에게 상처받고 쓸쓸해하는 모든 엄마들을 향한 따뜻한 위로! 코끝이 찡해진다.      


 홍콩 영화의 전성기가 지나던 무렵, 양자경은 할리우드로 진출했다. <007>과 <미이라 3>, 그리고 <아바타 2>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왔다. 내 눈에 그녀가 액션 배우 이상의 배우로 보이기 시작한 건 리안 감독의 2000년 작 <와호장룡>이다.      

 

 30대 후반 양자경이 맡은 배역은 주윤발과 함께 엄청 고귀한 검 한 자루를 지키려 목숨을 거는 쿵푸 고수 수련. 함께 출연한 장쯔이의 젊은 미모를 압도하던 그녀의 표정 연기는 서늘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떨림을 섬세하게 담아낸 양자경의 눈빛에 보는 내내 가슴이 아렸으니까. 말보다 눈빛으로 교신하던 과묵한 사랑의 쌔드 엔딩도 잊히지 않는다. 또 하나, 양자경이 어둠속 복면의 침입자를 쫓아 지붕 위에서 벌인 미드나잇 무술 대결은 둥둥 울리는 북소리와 완벽한 조화를 이룬 명장면으로 남았다.   

  

 영화 <애애올> 속 양자경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온 이민 1세대로 빨래방을 운영한다. 일터에서 집안에서 그리고 세무조사에 골머리를 앓으며 그녀는 제목 그대로 열일을 한다. 하지만 남편은 이혼서류를 몰래 준비했고 딸은 커밍아웃을 한다. 가족이 동지인지 적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초반 폭력이 난무하는 대환장 파티 40분은 국세청에 제출할 산더미 영수증과 씨름하는 그녀의 일상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맥락이 없어 보이는 고강도 액션을 해내는 환갑 여배우가 왠지 안쓰러웠던 건 나뿐이었을까. 벌떡 일어나 영화관을 나가버리고 싶을 때쯤 느닷없이 등장하는 ‘다중 우주 속의 수많은 나.’ 이건 도대체 뭐지?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처럼 헐리우드가 다중 우주를 소비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베네딕트 컴버비치 때문에 그 영화를 본 나는 끝내 어리둥절한 채 영화관을 나왔다. 멀티버스란 개념 자체가 와 닿지 않아서다. 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를 그냥 인정하는 수밖에.     


 <애애올> 속 양자경은 우주 간 이동을 뜻하는 ‘버스 점프’를 통해 다른 우주 속 배역으로 변신한다. 지리멸렬한 일상을 벗어나 ‘다른 나 체험’에 나선 여주, 그 모습들 중 몇은 마치 전생처럼 보이기도 한다. 수많은 영화 속 명장면을 짜깁기한 듯, <메트릭스>와 낯익은 옛 홍콩 영화의 씬들도 보인다. 반짝반짝 빛나는 다른 우주의 숱한 내가 있는데 하필 나는 왜  짜증나는 현실 속에 있는 거지?       

 

 때맞춰 등장한 우주 최강 빌런과의 치고 박는 한판승이 끝날 무렵, 그녀는 알게 된다. 그 모든 가능성 중 나는 이번 생을 기꺼이 선택한 것임을. 가족인지 웬수인지 수시로 경계가 모호한 남편과 딸과 함께 헤쳐 나가는 지금 이곳의 하루하루가 시시하지만 아름다운 것임을 인정하게 됨으로서. 

       

 이 난해하고 시끌벅적한 영화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멀티 버스 속 다른 생을 사는 내가 진짜로 존재하는 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런 SF적 상상력이 굳이 모두에게 필요할까? 그것도 모르겠다. 곳곳에 숨겨져 있다는 은유와 상징을 몽땅 발굴해낼 능력도 없다. 다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사는 이들에게 이번 생을 해석하는 새로운 공식  또는 힌트 하나를 제공한다고나 할까.      


 영화는 말한다.  지금 나를 괴롭히기 위해 내 곁에 있는 게 분명한 가족과 동료들에게 연민어린 ‘다정함’을 장착하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게 어떠냐고. 그 방법 외엔 이번 생을 살아가는 다른 뾰족한 수는 없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오늘의 내 나이를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인생에 20대 30대 시절만 있다면 삶을 보는 안목은 얼마나 단조로울까. 40대와 50대를 지나 60대에 이르렀을 무렵 비로소 삶의 맨 얼굴, 단맛보다 진한 쓴맛을 만나게 되는 것이므로.      


 운이 쭉 좋다면, 내겐 70대와 80대 90대를 제대로 살아볼 여정이 눈앞에 있다. 각각의 10년 동안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지금까지와 제법 다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양자경이 외친 그 모든 황금기를 누릴 수 있을지도 몰라.      

 

 감히 90세의 관점이 궁금해진다. 그  때쯤이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어떻게든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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