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막내 여동생이 얼마 전 뇌혈관 수술을 받았다. 회갑 맞이 딱 두 달 전이다. 전신 마취에 대기 시간 포함 5시간이 걸린 ‘뇌혈관 문합술.’ 뇌경색으로 막혀버린 뇌혈관 대신 그 옆 작은 혈관을 이어 붙여 뇌혈류를 늘려주는 수술이란다. 자칫 전신마비 아니면 부분 마비를 일으킬 위중한 상황을 돌파한 것이다.
중환자실, 집중치료실을 하루 씩 경유해 일반 입원실로 옮겨졌다. 금지된 입원실 면회 대신 환자 휴게실을 찾아갔다. 막내가 말했다. “입원하러 집 떠나던 날 생각했어. 다시 이 문으로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왜, 아니겠나? 제 아무리 의료기술이 최첨단이라도 예측 불가능한 변수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수술 후 발생할지도 모를 온갖 부정적인 결과에 대한 사전 브리핑도 당사자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을 터다.
다행히 입원 열흘 만에 무사 퇴원. 뇌 MRI 결과, 뇌혈류량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단다. 뇌조직 괴사도 없다고 한다. 예고됐던 일시적 팔다리 저림이나 손가락 마비 등 수술 후 증세는 발생하지만 순조로운 회복세다. 온 집안이 초긴장 상태에서 풀려났다.
뇌수술이라는 상황, 그건 삶과 죽음의 얇은 경계선에 서봤다는 거다. 특별한 경험이다. 어쩌면 새로 맞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게 된 사람이라는 뜻일까? 흐릿했던 시야가 문득 밝아져 살아가는 일에서 ‘뭣이 젤로 중한 지’가 명료해지는 상황 말이다.
요즘 그녀는 말한다. “싹싹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남편이 온갖 수발을 들어주더라고. 좀 놀랐어. 수술이 무서워 수술 전에 지레 죽을 것 같은 공포도 하소연할 상대가 남편뿐이었어. 아이들이 하루씩 입원실 당번을 해주기도 했어. 그래도 제일 편한 상대는 역시 남편이더라니까. 이제부터 좀 잘해줘야겠어.”
한때 시댁과의 갈등 때문에 이혼 이야기가 격렬하게 오갔던 그들이다. 하지만 33년의 결혼생활로 다져진 전우애가 뜻밖의 적과 교전 중 모습을 드러낸 걸까. 요즘 많이 보이는 ‘사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리는 있는’ 부부 유형임엔 틀림없다.
모든 세상사는 죽음 앞에서 도토리가 된다던가. 그 어떤 분노나 미움도 죽음 앞에서는 그저 사소해진다는 말이다. 막내에게 수술은 지난 60년의 삶을 순식간에 되돌아보는, 극적인 전환점이 된 것 같다. 우리가 책 한권, 또는 영화 한편을 통과하면서 크거나 작은 변화를 겪듯이 이번 수술을 통과한 막내는 뭔가 달라질 것 같다.
그 변화는 굳이 심오한 깨달음이 아니어도 좋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사랑하는 쪽으로 가면 된다. 선물 같은 세 번 째 30년을 어떻게 살아갈지, 일종의 인생 리셋이면 좋겠다. 지금까지의 내 원칙을 살짝 내던지는 것을 포함해서다.
오래 원망하거나 미워했던 누군가를 용서할 수도 있다. 내 돈을 떼어먹은 뒤 연락이 없지만 어느덧 보고 싶어진 옛 친구에게 채무 면제를 선언할 수도 있다. 몸이 아픈 이들의 통증, 이에 못지않은 고립감과 우울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 것도 막내를 변화시키지 않을까. 절망으로 눈앞이 캄캄해져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절망에 말없이 손을 내밀 수 있을 테니까.
새 봄에 피는 꽃도 작년 꽃과 달리 보일 것 같다. 지구별의 한 귀퉁이에 태어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이 엄청난 특별함을 제대로 인식하게 될 것 같기도 하다. 한 순간 죽음을 아주 가까이 느껴 본 경험이 지금까지와 다른 삶의 태도를 장착하게끔 도울 테니까. 조금 다른 생각으로, 조금 다른 태도로 막내가 60 이후의 삶을 더 다채롭게 살게 기대된다.
막내의 수술로 형제들도 조금씩 변하고 있나보다. 채팅방 5남매간 오고가는 글이 늘어난다. 맏이인 언니는 잡채랑 조기조림을 만들어 분당에서 막내가 사는 충정로까지 배달하러 간다. 결혼 후 각자의 가족에 과도하게 매몰돼 살아왔다는 약간의 반성까지 곁들여 5남매간 왕래가 잦아진다. 혈연으로 묶인 인연의 특별함을 갑자기 되새긴 계기가 돼 준 병 덕분에 우리는 서로에게 더 다정해지고 있다.
퇴직 후 막내는 해금을 배우러 매주 종로에 있는 교습소에 다녔다. 이제 보니, 그 평범한 일상은 참 축복받은 일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해금 수업에 가게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행운이 될까. 막내는 꽃을 심고 나무를 가꾸는 것도 좋아한다. 오랜 직장 생활 중 부여에 작은 농막을 지었다. 부여 밭에서 기른 감자와 고구마는 해마다 형제들의 집으로 배달된다. 우리는 오래오래 그 감자랑 고구마를 먹고 싶다.
막내의 회갑이 다가온다. 어마무시한 회갑 통과의례를 치른 막내를 위해 언니와 나와 동생들은 그녀의 회갑 모임을 할 생각이다. 막내에게 해금 연주를 청해야겠다. 그 날 올해 피는 벚꽃나무 아래 함께 오래 앉아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