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전날, 딸의 친구 셋이 왔다. 추석 때처럼 우리 집 차례상 준비를 돕겠다는 갸륵한 명절 가족. 모두 30대 중후반의 싱글이다. 육전 맛집의 명성을 이어가야한다며 딸과 친구들은 팔을 걷어 부친다. 양념된 소고기를 곱게 펴서 밀가루를 묻히고 계란물에 적시는 업무가 분담된다. 고소한 기름 냄새와 그녀들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진다.
갓 부쳐낸 육전이 차려지고 와인은 향긋하다. 먹성 좋은 그녀들이 무장 해제되는 시점. 각자 근황을 업데이트한다. 남친과 헤어졌다는 보고도 스스럼없다.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들고 나타난 오약사는 경북의 한 도시에서 2년 가까이 근무한 뒤 서울로 돌아왔다. 딸과는 대학시절 해비타트 활동 차 몽골에 집 지으러 갔다가 만난 사이다. 딸 부잣집 아버지 놀이에 신이 난 내 남편, 명절 딸들에게 궁금한 게 많다. 페이 약사로서 일한 곳의 고객 특성을 묻는다. 60대부터 80대 여성 고객들이 많았다는 오약사의 대답. 산부인과나 비뇨기과 진료를 꺼리는 노년 여성들이 남몰래 고통받아온 질환들에 대한 상담을 조금씩 해주게 됐단다. 친절하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났고 약국에 손님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다들 우리 외할머니 같은 분들이어서 그분들의 고민 상담을 해드리게 된 거예요. 처방전을 가져 오시든, 안 가져 오시든, 아는 껏 도와드리는 게 약사 역할이니까요.” 유병장수의 시대, 여성 노인들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건강 이슈의 숨겨진 이면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는 그녀. 한편 외지인 약사로서 주변 토박이 약사들의 은근한 견제를 경험한 것도 의미 있는 세상 공부였다는 자평이다.
또 다른 친구는 내가 부탁한 물오징어 네 마리를 들고 왔다. 예전 직장을 그만 둔 뒤 실업급여 상태로 열공, 최근 청소년상담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다들 축하하기 바쁘다.
당장 급한 건 상담 실무 경력 쌓기란다. 근데 요즘 청소년 상담 일자리는 경단녀들의 각축장이 된지 오래라고 한다. 그 까닭에 파트 타임보다 풀 타임 상담사로 취직하기가 더 쉽다는 이색지대라나. 이리저리 면접시험 보러 다니느라 좀 여윈 그녀, 하지만 의욕 충만 눈빛은 반짝반짝 빛나며 우리를 안심시킨다.
와인과 육전 파티 후 오후는 브레이크 타임. 딸은 친구들과 함께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인 자신의 집으로 갔다. 임시보호 중인 강아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저녁엔 평택에서 일하는 아들까지 합류, 동네 먹자골목에 있는 와인 바에서 2차를 벌였다. 와인 리스트는 국적과 품종 별로 방대하고 안주는 휴대하거나 주문 배달로 마련하는 개성파 와인 가게다.
아들이 먹고 싶다는 대방어 한 접시를 동네 테이크 아웃 횟집에서 미리 픽업한다. 치킨은 근처 단골 가게로 주문하고 피자는 배달앱으로 해결. 순식간에 차려진 설 이브 잔치상. 옆 탁자 손님들이 데려온 강아지가 우리 팀의 관심에 기분 좋아진 듯, 우리들의 다리 사이를 누빈다. 와인 박사 학위 소지자임이 분명한 사장님은 비스킷을 자꾸 리필해주며 와인 질의응답에 성실히 임한다. 이래저래 지나치게 기분 좋은 시간! 과음과식은 피할 수 없다.
파티의 마지막 순서는 김장 김치 나눠주기다. 배추김치든 갓김치든 좋은 친구들이 올 겨울 내게 보내 준 금쪽같은 김치, 혼자서 먹는 건 범죄! 또 한 가지, 남 부끄러운 음식 솜씨를 자랑하는 내가 간 마늘을 과다투입 해가며 양념한 LA갈비도 세 봉지로 나눠준다. 올 가을 추석 이브에 또 다시 명절 가족으로 재회하자는 유쾌한 작별이다.
어릴 적 딸은 집에 온 내 직장 동료들을 “재선이모, 미영이모”라고 부르며 함께 놀았다. 지금도 내 친구들과 잘 어울린다. 이젠 내가 딸의 친구들과 함께 노는 즐거움을 누린다. 때로 내 사회 친구를 연결시켜 주기도 한다.
나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각자 처한 난관을 털어놓되 자신의 상황을 객관화하는 지성을 갖췄다. 사회생활의 좌절과 우울함을 비틀어 녹여내는 경쾌한 유머까지 지닌 그녀들! 사랑스럽다. 윗세대에 대한 비판이나 일상 속 자신의 어리숙함을 개그 소재로 활용해 모두를 웃게 한다. 생소한 ‘문찐’이나 ‘JMT,’ ‘많관부’같은 일상 신조어를 익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명절 가족이 어느덧 ‘확대 가족’다운 케미를 이뤄낸 건 그녀들의 유쾌발랄 덕분이다.
내겐 이미 뭄바이에 ‘롱디’ 딸이 둘 있다. 딸이 인도에서 공부하던 시절 뭄바이에서 얻은 엘레노어 알메이다와 싱글맘 암발리카 굽타다. 엘레노어는 딸의 쉐어 하우스 메이트였고 암발리카는 클래스메이트였다. 뭄바이에 다니러 갔던 나를 그녀들은 ‘오마니’라고 불렀다. 내가 그 두 딸에게 발급한 서울집 숙식권은 유효기간 무제한이다. 코로나 터지기 전 추석, 서울에 온 엘레노어는 나랑 양재천을 걸었다. 인도 전통 의상 쿠르타를 차려입고 내 친정집의 추석 파티에까지 출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역병도 거의 물러갔으니 인도 딸들이 다시 와줄까? 그날이 기다려진다.
우리 모두는 혈연 가족에서 태어나 성장 후 곧 그 울타리를 넘는다. 비혈연의 우정과 신뢰에 더 많이 기대어 세상살이 풍파를 겪어낸다. 좋은 친구들, 좋은 동료들과 부대끼며 함께 성장하고 무르익어간다. 이 위대한 진리를 터득한 딸과 평생 동지들의 우정이 계속될 것을 믿는다. 그녀들의 존재가 날로 든든해져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