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네거리, 점심에 친정 4자매가 모였다. 깜찍 총명한 초딩 외손녀의 근황을 우리에게 들려주던 언니가 황혼육아의 고달픔을 털어놓는다.
딸과 사위의 커리어를 위해 손녀가 태어나자마자 공동 육아의 과업을 떠맡은 지 8년. 언니는 외부 도우미를 거의 청하지 않았다. 홈 메이드 이유식으로 시작해 채소 가득 한식 집밥으로 손녀를 키웠다. 자신의 국어교사 경력을 살려 동서양의 고전을 스토리 텔링해 들려줬다. 육아는 우리 모두의 눈에 대성공! 초딩 2학년 손녀는 뛰어난 한국어 어휘 능력을 갖춘 유쾌 발랄한 캐릭터로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언니는 허리와 무릎의 만성 통증 외에 약간의 신경 쇠약을 훈장으로 받았다. 손녀의 방과 후 학원 투어 일정을 맞춰주느라 날마다 신경을 계속 써온 덕분이다.
“너희들은 절대로 손자 손녀 키워주지 마. 자기 몸만 골병 들어.” 황혼 육아 성공 사례자로서 뜻밖의 발언이다. “키우는 보람이야 진짜 크지. 아기가 태어나고 자라나는 순간들이 얼마나 눈부신지, 안 키워보면 모르니까. 놓치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시간이었어. 그렇긴 해도, 황혼 육아는 너무 버거운 책임이야. 정말 권하고 싶지 않아. 너희들, 내 말 명심해라.”
아직 황혼 육아 여부를 고민할 상황이 닥치지 않은 나머지 세 자매, 뭐라 대답할지를 몰라 애매하게 웃는다. 그 중 제일 다급한 건 바로 나다. 나이 70이 코앞이건만 황혼 육아할 아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기만 하는 처지. 비혼인 딸은 나이 40이 내일 모레인 비혼주의자다. 그 입장을 존중하는 게 마냥 마음 편하지는 않다.
30대 중반 아들은 결혼할 생각이 있지만 마땅한 상대를 몇 년 째 찾고 있는 중. 이 나라의 결혼 적령기가 폐지되었다는 소문은 사실인 건가. 결혼을 기본값으로 설정하지 않은 2030의 비율이 갈수록 늘어난다는 세태를 절감한다. 게다가 내 딸과 아들은 강아지와 고양이를 임시 보호하거나 기르며 각자 즐거워 죽겠다나.
그러니 황혼육아의 고달픔을 토로하는 언니나 친구들이 마침내 부러울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비교적 건강한 건 황혼 육아로 심신이 쇠약해질 기회가 없었던 까닭인가. 하지만 생물학적 건강 수명은 75세란다. 제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나이 70 넘어 황혼육아 새내기가 된다면 맡은 바 책무를 다해낼 수 있을까. 전망은 살짝 비관적이다.
마음이 다급해진 김에 내가 꿈꾸는 황혼 육아를 혼자 그려본다. 먼저 나는 아기 포대기로 아기를 업고 싶다. 레트로 감성인가. 젊은 엄마들에겐 유모차도 패션이라지. 제각각 유럽형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한겨울에 제 맛이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함께 걷는 엄마들의 웃음소리. 멋진 도시 풍경이다. 앞으로 아기를 안는 아기띠도 꽤 자주 보인다. 하지만 이 방식은 허리가 하중을 많이 받게 된다니. 할머니 육아의 시그니처 아이템은 역시 아기 포대기. 아기 포대기로 아기를 업으면 무엇보다 아기의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아기에게도 엄마의 심장 박동이 전달돼 안정감을 준다고 한다.
작은 아이가 돌 무렵일 때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나면 산책 시간이었다. 포대기에 아이를 둘러매고 집을 나선다. 아이는 포대기 속에서 발차기를 하며 좋아한다. 아파트 단지 옆 학교 마당 한 모퉁이에 있는 토끼장까지 걸으며 나는 아이에게 말을 건다. 아이는 쉬지 않고 옹알이 수다로 화답한다. 머지않아 아이의 언어들은 팝콘처럼 터져 나올 것이었다. 가벼운 어둠 속, 등에 업은 아이와 함께 걷는 그 시간을 나는 사랑했다. 그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서 나는 손자나 손녀를 기다리는 걸까.
친구들은 “황혼 육아 월드의 쓴맛을 못 본” 나의 낭만적 어리숙함을 비웃는다. 한 친구는 자신의 기도 내용을 말해준다. “주여, 축복 넘치는 대한민국 엄마 노릇, 한 번으로 그치면 안 되는 겁니까? 나이 60 넘어 또 한 번 엄마 노릇하느라 무릎이랑 허리가 남아나질 않네요. 제발 이 분에 넘치는 축복을 거둬 가 주세요. 하하.”
황혼육아 경력 10년차인 그들에게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할머니가 되고 싶은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내겐 외할머니에게 진 빚이 있다. 시골 살던 어릴 적 해질녘이면 배추나 열무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자주 오셨다. 외가댁 논밭에서 일을 마친 외할머니는 김치 담글 채소를 내려놓자마자 떠나셨다. 한 시간을 걸어 외가에 도착하면 또 다시 저녁밥을 짓는 일과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한 겨울밤, 초저녁 잠 사이로 들려오던 외할머니의 목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할머니는 항아리 속 켜켜이 넣은 볏짚 사이에 보관해둔 홍시나 곰국을 담은 자배기를 머리에 이고 어둔 길을 걸어오셨다. 외풍 센 방안, 솜이불을 뒤집어 쓴 채 홍시를 받아먹는 어린 손주들의 뺨에 얼굴을 한 번씩 부비곤 부리나케 다시 떠나셨다. 외할머니의 저고리 섶에서는 아궁이 연기 냄새랑 구운 간 갈치 냄새가 났다. 고된 노동의 피로가 스며있는 할머니의 향기! 말수 적은 외할머니께 받은 사랑을 내 미래의 손주에게 전하지 않으면 어찌 그 빚을 되갚을 수 있겠는가? 나도 외할머니 같은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건 내게 이번 생의 가장 의미있는 챕터였다. 돌이켜 보면 임신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의 본질은 ‘낮아지는 체험’이 아니었을까.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안위가 내 자신의 안위보다 진짜로 더 중요해지는 마법은 그다지 자주 발생하는 실제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엄마 되기’는 일종의 고강도 수행 커리큘럼으로 보이기도 한다.
내가 황혼육아 적령기를 넘기기 전에 두 번째 엄마 노릇을 할 기회가 와줄까? 조바심이 나기 시작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요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