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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할미 Jul 10. 2024

다 큰 미국 아들 입양기


 6월 말, 장맛비를 뚫고 KJ가 서울에 왔다. 작년 가을,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된 인연으로 알게 된 사이. KJ는 LA출신 49세 미국인 변호사로 뉴욕과 캘리포니아, 그리고 워싱턴 D.C. 지역 면허를 갖고 있다. 현재는 워싱턴 D.C.에 거주 중.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들고 여러 나라를 무대로 뛰는 디지털 노마드족이다. 판교에서 열리는 <AI 정책과 법>이라는 학술회의에 연사로 초빙된 게 두 번째 한국행의 계기.      


 2박3일 컨퍼런스를 마친 그가 을지로 한 호텔로 옮기자마자, 우린 약수동의 노포 찜닭 집에서 만났다. 찜닭 집을 예약해 준 내 딸과 딸의 절친도 함께 했다. 그들은 이미 KJ와 구면이다.   

  

 이 집의 시그니처 찜닭이나 막국수, 그리고 주먹 만두는 모두 북한식. 서울에서 북한 스타일 음식을 먹는 걸 KJ는 재밌어 한다  결대로 찢어지는 닭살은 부드럽고. 쪽파를 듬뿍 올려 잡내 없이 깔끔하다. 막국수는 국물이 담백해 이북 스타일 슴슴한 맛을 잘 지키고 있다.    

  

 KJ는 고춧가루에 조미한 다대기 양념장이 고추장과 어떻게 다른가를 물어본다. 각자 양념장을 찍어 먹어가며 내용물을 추리한다. 빨간 양념장에 겨자와 식초, 간장을 취향대로 섞어 각자 찜닭 소스 믹스를 만드는 방식도 KJ의 맘에 드는 모양. 엄청 맛있어서 회의 참석으로 발생한 스트레스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쪽 눈을 쨍~긋 한다. 매운 음식을 먹었으니 커피와 디저트로 2차를 간다. 밀린 이야기가 쏟아진다.     


 KJ를 처음 만난 건 2023년 11월 말. 추수감사절 휴가 1주일을 한국어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서 서울까지 날아와 버린 미친 미국인이 바로 그였다. 만남을 주선한 이는 워싱턴 D.C.에서 한국어 강사로 활동 중인 정선생. KJ는 그녀의 학생이었다. 정선생과 나는 신촌의 모 대학 한국어 교원 양성코스의 동급생이었던 인연. KJ가 애초에 원했던 건 서울 시내 대학의 한국어학당이었다. 그러나 1주일짜리 한국어 코스가 없는 게 내가 그를 가르치게  된 경위다.  


 5일 간 32시간의 1대1 한국어 교습의 시급은 5만원. 그가 묵고 있는 광화문의 한 호텔 옆 카페가 교습 장소로 발탁됐다. 교재는 <Talk to Me in Korean> 레벨 1.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머리를 맞댄 열공이 시작됐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1,2년의 노력으로 내 것이 되기 힘든 게 외국어가 아닌가.   

    

 머리를 식힐 겸, 광화문 광장을 걸어 마주친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그는 흥분했다. 이 행성의  이곳저곳에서 한글을 배우는 모든 지구인들은 제일 먼저 세종대왕을 뵈러 광화문 광장에 와야 한다고 그는 자못 엄숙하게 말했다. 동상 옆 돌판에 새겨진 훈민정음 초기본의 자음과 모음의 순서에도 초집중, 관심을 보였다. 오늘날 한글 자음의 순서와 다른 훈민정음 초기본의 배치가 더 적절해 보인다는 의견과 함께.     


 5일 간의 점심이나 저녁밥도 수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나라 역사와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 한국 문화가 왜 지구적 인기를 누리게 됐는지, 등등도 포함해서다.  나는 대답하느라 진땀을 뺐다. 한글 선생 노릇엔 한글만큼 영어를  잘해야 한다. 퇴직 후 별로 써먹지 않던 내 영어는 이미 녹슬고 있었으니 그걸 다시 꺼내어 닦아 쓰는 건 예상보다 난이도가 높았다고나 할까.   

   

 뜻밖에 내가 배우고 있는 중국어가 한글 공부에 도움이 됐다. KJ는 샹하이, 베이징, 홍콩에서  9년 동안 일했고 중국어를 잘한다. 내 중국어 실력은 신통치 않지만, 한국어에 풍부한 한자어 단어를 설명할 때 중국어가 도움이 된다. 물론  같은 단어지만 뜻이 달라진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소심(小心)은 한국어로는 대담하지 않고 소극적이란 의미. 중국어로는 조심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32시간의 집중 학습에도 불구하고 KJ의 한국어 실력은 일주일 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는 게 내 정직한 평가다. 이건 학생 KJ도 인정했던 현실. 살짝 좌절한 까닭에 KJ  이후 내 한글선생 노릇은 개점휴업 상태다.    

  

 KJ를 안내하며 북촌과 서촌 일대를 걸었다. “가갸거겨 고교구규...”를 소리쳐 외우면서 청계천과 남대문 시장 약수시장을 구경했다. 거리의 교통 표지판이나 지하철 정류장 이름, 가게 이름도 KJ에겐 한글 읽기 교재. 함께 이태원 참사 현장에 갔고, 분향소에 들렀다. 지하철을 바꿔 타며 송도의 캠퍼스타운에 위치한 조지 메이슨대학 분교에도 갔다.     

 

 나는 대한민국의 ‘3대 친미 메뉴’인 LA갈비, 커피 아메리카노와 부대찌개를 소개했다. 그는 동아시아 분단국에 주둔한 미군 부대 주변에서 탄생한 부대찌개에 얽힌 이 나라 근·현대사를 놀라워했다.     


 KJ는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줬다. 그는 인도계로 LA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원래 인도 북서부 구자라트 출신으로 무슬림 중 소수 그룹인 스마일리 종파에 속한단다. 선조들은 인도의 주류 종교인 힌두교의 박해를 피해 탄자니아로 이주했고 KJ의 부모님은 탄자니아에서 결혼 후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는 코로나 19에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는 80세로 현재 LA에서 살고 계시고 캐나다에 거주 중인 여동생은 LA를 오가며 패밀리 비즈니스 관련 업무를 그와 분담하고 있단다.  

   

 주말을 포함해 일주일을 날마다 함께 한 고강도 열공의 끝날, 우리는 서로를 얼싸안았다. 그가 말했다. “제 엄마가 되어주세요.”      


 윽~, 엄마 노릇엔 별로 소질이 없는 게 나란 인간이다. 내가 낳은 딸과 아들에게도 그리 우수한 엄마라고 내세울 수 없는 처지. 다 큰 미쿡 아들을 입양할 깜냥은 못 된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나를 엄마로 낙점(?)한 셈이지만. 게다가 KJ와 내 나이 차이는 19세. 어쨌거나 일주일간 쌓인 정이 있으니 딱 잘라 거절하진 못하고 “생각해 보겠다”는 애매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추수감사절 방문 이후 그는 보이스 메시지나 문자 교신 때 나를 “엄마”로 불러댄다. 나는 아직 국적이 다른 아들을 둘지, 확신이 없다. 어쨌든 나를 ‘엄마’로 불러대는 KJ가 귀엽게 느껴지는 건 사실.  내 남편은 아직 KJ를 만나진 못했지만, 이 사건을 재밌어 한다. 내 친정 자매들은 ‘조카’를 입양하려면 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들이 미쿡 조카를 들일지 면접시험을 보겠다며 팔을 걷어 부친다. KJ는 심사위원회를 적극 만나겠다는 입장.       


 두 번의 서울 방문으로 한국에 관심이 많아진 KJ는 이곳에 일자리를 알아보기까지 한다. 이미 한 군데와는 교섭이 어느 정도 진행 중인 모양.     

 

 엄마와 아들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그냥 천천히 친해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모자 관계이니만큼 별 기대 없이 재밌고 명랑하게 만나면 될 일이다. KJ가 다시 서울에 오는 날, 우선 집밥부터 먹여야겠지. LA갈비를 굽고 그가 좋아하는, 맵고 프레시한 김치를 차린 밥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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